2장 위대한 전환점 “이제는”
(롬3:21-31)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1:16~17 복음에 대한 진술
1:18~3:20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유 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
3:20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 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는 말로 끝맺음.
- 바울은 그 점을 못박아 놓고서 이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는'(But now)이란 두 마디 말보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말 중에서 더 놀라운 말이 없다.(King James version에는 두 단어로 표현). 이 말은 사도가 복음을 소개할 때마다 함께 사용한 말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청교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복음을 소개하기에 앞서 율법의 작용이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언제나 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제는”이라는 말보다 우리에게 더 복되고 놀라운 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말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철저한 시금석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신앙이란 진실로 일종의 저항(protest)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대적하는 모든 말을 듣고도 또한 가장 가혹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말하는가? 믿음의 모든 비결은 그 모든 것을 대항하여 이 두 마디로 대처하여 일어서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브라우닝, “나에게 있어서 믿음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신앙을 잠잠케 하는 방편이다.” 그의 말은 마치 미가엘 천사가 뱀의 머리를 발로 누르고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믿음으로 서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낼 수 없고 한 가닥의 소망도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확실하다면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을 기뻐할 준비가 된 것이다.
-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바울은 이제 막 끝낸 이 사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생애와 죽음 부활 승천 등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며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기쁜 소식이다. 바울이 1:16,17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이유이다. 자기 존재의 참 모습을 지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수 없다.
- 이 경탄스러운 기쁜 소식이 무엇인가?(개괄적인 분해)
:21-24 구원의 길에 대한 묘사
첫째, 하나님께서는 의를 준비하셨는데 전에는 약속하셨고 이제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둘째,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것은 율법의 행위나 율법을 따른 결과가 아니고 전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길은 모든 자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넷째,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며 유효하다는 것이다.
:25-31 이 위대한 구속의 특징에 대한 진술
첫째, 이 구속의 길이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는 것이다(:25~26).
둘째, 이 길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길이라는 것이다(27~28).
셋째, 이 길이 하나님이 모든 세상과 모든 족속의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주는 길이라는 것이다(:29~30).
넷째, 이 길이 율법을 영예롭게 하고 굳게 세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31).
이 본문이 전체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구속에 대한 우리의 사상이 반드시 이 부분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과 이 부분을 시금석으로 해서 우리의 사상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논리인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오게 하고 결과를 얻기 위해 너무나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같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진술이며 또한 그 진술은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것도 그냥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이 시금석적인 부분으로 가져와야 한다. 우리는 가감해서 말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이 진술 그대로를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특별히 모든 복음 전도자들을 위한 위대한 기준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으며 그들은 신학에는 관심이 없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 되려 한다면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처리하시기까지는 그들은 절대 신학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것을 깨닫게 하실 것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진리를 심어 주실 것을 믿으며 그들에게 설파하는 것이다.
- 바울의 이 위대한 진술을 서술하는 방법에서 배워둘 교훈은 우리가 진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체계를 꼭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에 의해 제공된 의,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의, 하나님에 의해 유효하게 된 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항상 말하며 강조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경향은 하나님은 제쳐놓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은 언제나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논의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죄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죄의 바른 개념은 복음 전도의 출발점이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고,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화해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의 모든 목적과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데 있다고 했다.(벧전3:18)
둘째로, 그것이 창세 전, 영원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복음은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그제서야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율법 가운데 복음이 있다. 창3:15에서,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서도, 구약의 의식법과 선지서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나타내 주지 않는 구원의 설명이 어떤 것이든 참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복음은 구약에 감추어 있고 신약에 나타나 있다” 이 3:21-31까지의 부분은 복음의 모든 설교와 표현에 대한 권위이다. 구약에 예언된 것은 이제 실제적으로 실현되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다 주는 몽학선생이다. 율법은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하는데 그것은 죄를 선고하여 구원의 길을 지적하는 일이다. 율법의 사역을 도외시한 어떠한 구원에 대한 견해도 참으로 부족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한 모든 일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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