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화목제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으며 더 나아가 그것이 왜 이런 식으로 일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21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기독교 교리와 구원의 방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아크로폴리스’(그리스 성채-이 구절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요충지)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25절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말씀으로 많은 논쟁과 다툼을 일으켜 왔다.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바울이 25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공공연하게 “내세웠으며” 계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일은 정확히 무엇인가? 십자가 상에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화목제물’이라는 말이며, 둘째로는 ‘피’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을 합해서 화목제물이라고 하자.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25절 화목제물을 ‘속죄소’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속죄소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언약의 돌판을 넣은 법궤 윗면의 금판이다. 대제사장이 들어가 피를 뿌릴 때 하나님께서는 흡족하심을 천명하시고 백성들은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을 천명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새로운 속죄소이며 거기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를 만나시고 이렇게 해서 계명은 높임을 받았고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5절의 이 말은 ‘화목’, ‘화목제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화목제물, 즉 화목제물의 피는 화목되는 장소 즉 속죄소에 뿌려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소로 언급된 곳은 성경 전체를 통해 한 곳도 없다.
또한 인기 있었던 미국 표준개혁 성경에서는 ‘화목제물’을 ‘속죄제물’이라는 말로 쓰고 있다. 그들이 ‘화목제물’이 아닌 ‘속제제물’로 주장한다.
- ‘화목제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 오웬은 어떤 화해에도 본질적인 요소들이 네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화목제물에 대한 관점은 이 네 가지를 다 적용한다.
1.가해를 중단하고
2.피해자를 유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3.가해는 상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4.가해를 사유케 하는 희생이나 다른 수단을 써야 함.
바울이 25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혔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왜 당신은 그렇게 하려고 고심하고 애를 쓰고 있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이 ‘화목제물’이란 말을 거절하는 이유는 첫째, 언어학적 문학적인 이유이다. 그 말은 이교도들이 성난 신을 유하게 하고 진정시키는 뜻으로 쓰여졌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70인역에서) 더 이상 그런 뜻으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70인역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 안에는 어떠한 진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며, 그것은 모독적인 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구약적인 개념이며 하나님을 괴물이나 귀신으로 변이시키고 있다. 그들은 진노는 악한 행위의 필연적인 귀추이다.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고통 받게 되어 있으며 그것은 악한 것을 향하면 반드시 일어나는 자연법칙이며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다. 문제는 죄된 사람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사람의 눈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에 열려져야 하고 하나님 편에서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교리이다. 현대 교사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 사상은 580회나 나타나 있다. 신약에서도 요3:36, 마25:, 행17:31,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로마서에서 10번 언급, 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18)
-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한 모든 것에 대한 그분의 변함없는 대적하심과 그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필연적으로 악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부인하는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죄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죄란 인간 존재의 상황이며 영혼의 상황이다. 인격과 죄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실 때는 인격도 처리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은 죄와 죄인을 적대시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들은 ‘속죄’란 선에 대한 필연적 귀결이라고 하며 그들은 진노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기를 단지 인간의 죄는 반드시 말소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행하심으로 인간의 죄는 말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왜 인간의 죄는 말소될 필요가 있는가? 당신들은 왜 속죄를 필요로 하는가? 만일 속죄제물이 제공되지 않았다면 어떤 처지에 있었겠는가? 분명 속죄 개념은 화목으로 이끌어 주며 오직 하나의 대답은 죄가 속해지기 전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오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1-2)
사람들은 속죄제물이라 하든지 화목제물이라 하든지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정말 알기 원한다면 화목제물에 대한 견해를 취해야 한다. 화목에 대한 개념은 속죄의 개념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이다. 사도는 1:18부터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줄곧 단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깜짝 놀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다. “화목제물이 제공되었다”
비평가들은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이교적인 견해로 이교도들은 뭔가 좀 안 되면 “신들이 우리를 향해 노해 있으니 신에게 예물을 바쳐서 그의 입을 막도록 노력해야겠다. 신은 우리의 제사를 기뻐한 나머지 우리의 죄를 하감하고 사해 줄 것이다”고 말하곤 한다. 당신들이 똑 같은 일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태도를 바꿀 어떤 일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가 우리들을 사해 주십사고 하나님을 설득하였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그것을 행하고 있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터뜨리시고 죄인이 구원받도록 하는 길을 마련하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여러분은 화목과 속죄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화목이란 누군가가 공격을 당했고 누군가는 손해를 끼쳤으며, 상해가 있었으며, 양편에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는 관념을 전달해 준다. 이 위대하고 영광스런 교리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해를 끼친 바로 그 하나님께서 범죄자를 해결하여 주실 길을 제공하셨고 죄인을 향한 진노는 풀어졌고 그럼으로써 사람을 그 자신에게 화해시킬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죄있는 사람이나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이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복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성경 가운데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빼버린다면 거기에는 아주 작은 성경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 가르침을 반대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적인 계시를 헬라 철학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헬라 철학자들의 신은 감정이 없어서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일어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감동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죄나 죄인에 대해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노도 없고 화목제물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적인 하나님 개념 대신 헬라 철학적인 하나님 개념을 가지고 출발한다면 진노의 사상을 밖으로 내던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성경일 수 없으며 또한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내가 성경에 복종하고 성경의 계시를 인정하든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로는 -- 이렇다”라고 말하든지 양단간의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1840년경 이후 계시 진리에 우선하여 철학을 놓고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내시기를 그렇게 기뻐하셨던 것 앞에다 철학 사상을 갖다 놓았기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그것은 모든 영역 즉 모든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인 갈보리 언덕 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사건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성경강해·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6장, 예수 그리스도의 피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2.03 |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4장 오직 값없는 은혜로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1.24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3장 사죄보다 더한 것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1.24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2장, 위대한 전환점 "이제는"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1.24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머리말, 1장 서론적 기초 (2017 수정강의안,김영희사모) (0) | 2017.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