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2/5 주일설교, 주는 그리스도, 막 8:29-32a

강대식 2017. 2. 6. 18:13

2017-02-05 주일설교

본문: 8:29-32a

제목: 주는 그리스도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8:29)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마지막이 다가올 무렵 중요한 질문을 하셨다.

먼저 주님이 물으신 것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7)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였다.

 

그러면 3년 동안 나와 함께 한 제자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수제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

마태복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신앙 고백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주는하는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를 알게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셨고,

주님은 이 신앙 고백의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다.

주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안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사람들이 아는 것과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아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달라야 한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어떤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불분명하면 그 교회(교인)은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세워진 교회(교인)이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고, ‘보내심을 받은 자’,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고, 기름 부음 받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요 구세주이시다.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로,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들과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면서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믿지를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였다.

 

성경에는 시편과 율법서와 선지서 등에 특히 이사야 53장은 대표적으로 고난 받는 그리스도가

예언되어 있는데도, 자기들이 원하는 영광의 그리스도만 믿고 이를 배척하였다.

제도권의 종교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보다는 사람의 계명과 전통에 빠져들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7:6-8) 

 

십자가(고난)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쥐고 매일 읽고 외우면서도

초림주의 고난과 재림주의 영광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직 영광만을 취할려고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였다.

 

성경을 올바른 지식으로 이해하고 사는 것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생사화복은 물론이요 국가나 민족의 운명도 그 올바른 지식에 달려 있다.

현대 교회는 성경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올바른 가르침의 전통을 내버리고

현대의 지식과 과학과 신비주의로 해석하고 가르침으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요,

베들레헴 마굿간에 나실 때에도 그리스도이셨고, 목수로 사실 때도 그리스도이셨고,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도 ’ ‘그리스도이셨다.

이 신앙 고백 위에 신앙을 세우고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2.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은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8:31)

 

주님의 고난은 인간의 몸을 입으실 때부터 시작되었다.

마굿간에서 나시고, 30년 나사렛 목수생활, 3년의 공생애 사역 내내 많은 고난을 받으셨다.

그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

 

공생애 사역 시절 예수님에게 고난의 절정을 안겨 준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누구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였는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구약 교회의 대표자들이었다.

오늘로 치면, 장로는 성도의 대표요, 대제사장들은 목사의 대표요, 서기관들은 신학자들의 대표이었다.

성경을 가르치며 성경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대표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들을 충동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빌라도가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하는데도,

유대인들은 우기고 또 우겨서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강요하였다.

빌라도가 --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4-25) 하였다.

 

그 뿐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들은 조롱하고 모욕하였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27:41-42) 하였다.

 

주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어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는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

우리가 죄인일 때, 원수일 때,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확증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남김 없이 이루어진 곳이다. 충족된 곳이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장본인들이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었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현재 우리의 장로들 목사들 신학자들은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친 백성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현대의 교인들은 얼마나 다른가?

그들은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러 가는 곳마다 방해하고 핍박하고 괴롭힌 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구약 이스라엘과 그후의 기독교인들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같았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음은 멀었다.

하나님의 계명보다는 사람의 철학을 더 좋아하였고, 그 전통으로 계명을 죽였다.

 

중세 암흑시대가 그러하였고, 그것을 돌이킨 것이 종교개혁과 청교도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후 교회와 신약 백성들은 다시 카톨릭화 되어가고 사사시대를 닮아가고 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고 있다.

 

진리를 성경대로 믿지 않고 세상 따라 사는 불의와 불경건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진노가 임하여 하나님은 경고의 심판을 행하시는 데도,

현대 기독교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교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오직 이 땅에서의 물질의 복과 형통, 가정과 건강과 심리적 안정만을 구하고 있다.

위의 것을 찾지 않고 땅의 것을 찾고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지 않고 땅에다만 보물을 쌓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구하지 않고 먼저 구하는 것은 오직 내 나라와 내 야망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의 삶은 온데 간데 없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

성경에는 관심이 없고 기도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있다.

기도하더라도 오직 육신의 생각으로 세상의 것만을 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필요하고 아쉬울 때만 찾고 내 마음의 보좌에는 나와 세상만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러한 신앙과 삶의 형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나와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껍데기로만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기며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심하게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하셨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하셨다.

겉으로는 잘 믿는 척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하셨다.

회칠한 무덤과 같고,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셨다.

 

그들은 바르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따르지 않고 배척하면서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었고,

결국에는 십자가 처형을 실행에 옮겼고, 그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자초하였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행태가 교회 가운데 일어나고 있고,

현대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도하고 반복하고 있는데도,

실상을 보지 못하고, 그들이 노래하는 평안과 축복에 젖어들고 좋게 여기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설교)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너희가 마지막에는 어찌하려느냐?”(5:30-31)

 

선지자 목사들은 하나님의 순전한 진리를 선포해야 할 텐데, 축복과 평안의 거짓을 설교한다는 것이다.

제사장 목사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기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관심도 없는 주의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며 한 통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끼리는 좋은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섭고 놀라운 일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무섭고 놀라운 일이라고 하시면, 그것은 마지막에는, 무섭고 놀라운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때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반문하고 계신다

 

3.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영광의 주가 되셨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니”(8:31-32)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한 십자가 죽음으로 끝날 수가 없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셔야 했다.

그분은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만물을 통치하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이 부활의 주, 영광의 그리스도는 성경이 이미 예언하여 왔다.

그러나 순서가 있고 과정이 있고 질서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먼저요, 부활의 영광은 그 다음이다.


십자가의 고난 없는 곳에 부활의 영광은 없다.

광야의 고난 없이는 가나안의 축복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주님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변함 없는 진리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로 인한 고난 말고 선을 행하는 데도 오는 고난이 있다.

그 고난을 받으며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고난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난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그 자취를 따라 우리도 같은 길을 걷게 하신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고난을 거쳐 영광의 가나안에 이른다.

예수 믿고 복 받는다고만 가르치는 복음은 샤마니즘이고 기복신앙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신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속죄를 이루셨고,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성화를 이룬다.

부활의 영광이 보장되고 약속되었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

고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영광의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는 그 작은 자가, 그 약한 자가, 영광 중에는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게 하신다.

고난 중에 돌밭과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좋은 땅이 되면 1006030배의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성공이나 성취나 업적이 아니고, 성결과 성화와 성숙이다.

거룩함 끝에 축복과 영광이 있다.

달음박질과 야망이 출세와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멸망에 이르는 덫일 뿐이다.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고, 부활하여 영광에 이르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고, 고난으로 옛 사람을 죽이고, 부활하여 영광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이고, 이를 위해 성령을 주셨고, 성경을 주셨다

 

다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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