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차별이 없느니라
(롬3:29-31)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29-30절에서 주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의 교리로부터 끌어낸 추론의 두 번째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사람들 사이의 모든 차별을 폐하셨다는 것이다. 구원에 관한 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를 받았건 아니 받았던 상관이 없다. 그는 모든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을 말하고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바로 그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모든 구분과 차별이 온전히 폐하여진 것이다. 엡2장에서 바울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고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힘 담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들이 된 것이다.
-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오직 한분인데도 이것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이 존재하고 이방인들을 위해서는 다른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틀림없이 한 분 하나님 밑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한 분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한 길을 제공하셨다고 역설한다. 또 하나님은 한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여러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지 않고 오직 한 방법만을 가지신다. 그것이 오직 한 길이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를 위한 구원 방법인 것이다. 바울의 두 번째 주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가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복음 전도 초기에 이 점을 기정화 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나를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똑같은 메시지가 전해진다는 것들이 거침돌이 되었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을 반복해야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아직 떠나지 않은 일종의 난제였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복음과 그 메시지, 기독교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구원의 복음과 회심의 필요성은 빈민굴이나 그와 유사한 곳에서나 필요할지 모르나,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선한 사람들만 위한 것이 아닐뿐더러 악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그로 인하여 누구든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복음은 또 다른 절박한 경우를 지니고 있다. 불교, 유교, 힌두교, 기독교가 소위 하나의 “세계 신앙 회의”(World Congress of Faiths)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한 상황이다. 현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과거에 너무 좁고 완고했었다. 서로를 비평하고 교제를 거절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란 사실을 알기에 이르렀고, 우리 모든 종교는 같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길로 동일한 정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다 함께 교제하기 위해 ‘세계 신앙 회의’를 열자. 비평은 그만 두고(이것이 현대적인 구호이다), 함께 모여 우리의 통찰력을 한곳으로 모으자. 우리는 모두 우리의 각각 다른 방법으로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자” 그런 주장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한 철저한 부인이다. 사도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므로 구원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을 취급하는 방법도 오직 하나 뿐이라”고 말한다. 세계 신앙 회의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로 출발한다. 그러나 세계 신앙 회의는 그것에서 멈추고 만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공공연하게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오직 유일한 길이다.
바울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안”에 있다고. 그분은 자신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가기 전에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그들은 복음을 부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뚜렷하게 ‘세우신’ 것에 대한 부정인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런 현현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발로 짓이기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직도 바울 사도가 이런 원리들을 연역해 내느라 수고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성령으로 인도하사 단순히 구원의 길만을 진술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주의 보혈을 극히 주의하게 하고 그것이 얼마나 중대하며, 그것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신 데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복음이 여러 개라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같은 것이 아닌 ‘천국 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 주님은 초림 당시 세례 요한과 같이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절하자 하나님은 은혜 복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이 은혜의 복음은 대 환난이 있기까지 전파되고 나서는 종말을 고한다. 다시 천국 복음이 되돌아 올 것이고(구체적인 시기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거절했던 천국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도 사람들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에 교회를 괴롭혔던 오류와 이단들은 성경보다 다른 무엇에 통제를 받는 사람들이 맺은 열매이다. 그것들은 이런 모양으로 현대 기독교인에게 다가온다. 우리 조상들은 너무 율법주의적이고 너무 완고하며 너무 세련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사랑에 관한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렇게 출발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또 오류를 범하는 두 번째 형태는 중대한 문제에 언제나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너무 유별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부정적이어서는 안 되죠. 당신들은 자신을 권위자로 내 세우는 것이요, 당신네들은 그 외에 모든 자들은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비평적이고 사랑이 결핍된 탓이요, 그리고 당신네들은 복음을 부정하고 있소. 우리가 실수하여 잘못을 범했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그렇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 외에는 어떤 것에도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처지가 절망적이다. 즉 민중들과 대중들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끌어들이고 너무 유별나게 굴지 말고 우리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자 그러면 아마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입장에 놓일 것이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오직 그의 피로 말미암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중차대하고 절대적인 교리라는 데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분명히 어떤 논쟁도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피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는 화목제물이시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모든 사람은 그 길로 가야한다. 오직 그분과 그분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분 없어도 하나님을 안다고 부르짖는 사람들과는 어떠한 교제도 불가능하다. 진리를 천명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자랑은 사라지고 구분과 차별은 폐하여졌다. 온 세계가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 앞에 정죄 아래 있다.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그의 사죄, 그의 부성을 알지 못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허무하게 죽지 않았고 우리의 조상들은 쓸데없이 고난 받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함 속에서 소위 ‘교제’라는 것을 나눔으로 신앙을 부인하거나, 진리를 위해 순교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인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의 눈을 열어 진리를 알게 하신다.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삼게 하시고, 열심히 그것을 주장하게 하시며, 그것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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