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의 둘째 간구(1) 청교도 아카데미
“나라이 임하옵시며”(마6:10).
하나님께 참되게 헌신하는 영혼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이 간구에 진심으로 가담한다. 이 말씀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것이니, 왜냐하면 왕궁을 가진 이는 바로 다름아닌 왕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시47:7)고 하였다. 그는 그의 보좌에 계신 왕이시다.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시47:8)라고 하였다. 그는 높고 강대한 제왕의 칭호를 가지셨다. 그는 그의 왕의 면류관을 쓰셨다. 그는 왕다운 특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법을 제정하시고, 죄사함을 인치실 권능을 가지셨는데, 이것들은 그의 왕권에 속해 있는 정수요 보배이다. 이와같이 주님은 왕이시다. 그가 그토록 크신 왕이라는 것은 그의 존재의 무한대성에 의하여 나타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4)라고 하였다. 그는 무엇이든지 뜻대로 행하시는 최고의 주권자이시다(시115:3).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왕이시다. 그는 내적인 영광을 가지셨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시93:1)라고 하였다. 다른 왕들도 보는 이들에게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왕다운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모든 장엄은 빌린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위엄을 입으셨다. 천사들이 그를 섬기고 땅 위의 모든 왕들이 이 큰 왕으로부터 받은 당면한 보유권에 의하여 그들의 왕권과 주권을 소지한다.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잠8:15)라고 하였다. 이 주 여호와께 모든 왕들은 답변하여야 하며 그리고 그의 법정으로부터는 상고란 없다.
적용 1: 교훈을 위하여
만일 하나님이 그토록 큰 왕이시라면 그리고 영원토록 왕으로 좌정하신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것은 시시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다스리는 것이며, 왕을 섬기는 것은 명예가 된다. 만일 천사들이 하늘 왕의 메시지를 가지고 신속히 날아 간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의 왕적인 봉사에 불림을 받는 것을 은총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단9:21). 데오도시우스는 황제가 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더 큰 명예로 생각하였다. 왕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명예스럽다. 만일 하나님이 지혜로 관쓰시고, 권능으로 무장하시고, 값진 것으로 총총히 빛나시는 그토록 영광스러운 왕이시라면 이것은 이 왕을 우리 왕으로 모신다는 것이 얼마나 현명함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적용 2: 권면을 위하여
만일 하나님이 권능과 위엄이 충만한 그토록 영광스러운 왕이시라면 우리는 그를 신뢰하자.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시9:10)라고 하였다. 그에게 당신의 영혼을 맡기라. 당신은 이 보석을 이 보다 더 안전한 손에 맡기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 교회와 국사를 맡기라. 그는 왕이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출15:3)라고 하였다. 그는 마른뼈들도 살게 하실수 있다(겔37:10).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업무들을 이 크신 왕께 맡기자. 만일 하나님이 그토록 큰 왕이시라면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렘5:22) 라고 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두려움은 위험을 보다 더 커보이게 하고 그래서 죄를 덜 짓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몸과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을 두려워 하자(눅12:5). 하나의 쐐기가 다른 쐐기를 몰아내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모든 천한 육감적인 두려움을 몰아낼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토록 영광스러운 왕이시라면 그는 그의 손에 생명과 사망의 권세를 가지셨다. 주님은 그를 대적하여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너무나도 혹독하실 것이다.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손이 힘이 있겠느냐”(겔22:14)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원수들을 마침내 그의 발 아래 굴복시킬 것이다(시110:1). 하나님이 자기의 손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토록 크신 왕일진대 우리는 그에게 대한 굴복을 배우자.
적용 3: 위로를 위하여
하늘의 왕의 신하인 사람들에게 여기 위로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구조와 위로를 위하여 모든 왕권적 권세를 발휘하실 것이다. 하늘의 왕은 그들의 소송을 변호하실 것이다.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수하여”(렘51:36)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 주위에 보이지 않는 호위병을 배치하신다. “내가 그 사면에 불 성곽이 되며”(슥2:5)라고 하였다. 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그들에게 구출을 일으키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대상11:14)고 하였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구원하실수 있다. 심지어는 나팔을 부는 것과 햇불의 태움 같은 업신 여길 만한 수단에 의해서도 하신다(삿7:20). 그가 바다를 이스라엘에게는 장벽이 되게 하셨고 그래서 물이 그들을 익사하지 않게 막아주는 수단이 되었을 때처럼 상반되는 수단에 의해서도 하신다. 물고기의 뱃속은 요나가 타고 해변까지 안전히 항해하였던 배가 되었었다.
적용 4: 경고를 위하여
만일 하나님이 왕이시라면 그는 그의 왕국의 원수들인 자들에게 그의 최대한의 힘을 대항시키실 것이다.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시97:3)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원수들에게 스스로 대항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그의 속성들, 즉 그의 권능과 공의를 대항시키실 것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시90:11)라고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피조물들을 대항시키실 것이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삿5:20)라고 하였다.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페르샤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대항하여 싸웠을 때 큰 바람이 일어나서 페르샤인들의 화살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반대로 날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모든 피조물은 죄인과 다툰다. 하나님은 사람들 스스로 끼리 대항시키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양심을 대항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몸의 질병을 대항시키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대하21:18)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친구를 대항시키실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단을 그들에게 대항시키실 것이다.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시109:6)라고 하였다. 사단은 그 죄인 가까이서 무엇을 하는가? 그는 죄인이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적용 5 : 격려를 위하여
만일 하나님이 그런 절대 군주시라면 그리고 그런 영광과 위엄으로 관 쓰셨다면 우리는 모두 그를 섬기는 일에 참여하여 그의 진리와 예배를 옹호하자. 최악의 시기에 하나님을 모실 용기를 내자. 그는 만왕의 왕이시니 그의 모든종들에게 보상해 주실수 있다. 우리는 그를 위해서는 실패자가 될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에 의해서는 결코 실패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말씀하실 때 무슨 왕국을 의미하는가?
그는 정치적인 또는 지상적인 왕국을 의미하시지 않는다. 사도들은 실로 그리스도의 현세적인 통치를 희망하였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18:36).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왕국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라고 하였으니, 즉 그의 섭리의 왕국이다(시103:19).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말할때 이 왕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왕국은 이미 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의 섭리의 왕국을 행사하신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7)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말할때 무슨 왕국을 의미하는 것인가? 분명코 이중적인 왕국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양심 속에서 행사하시는 은혜의 왕국, 이것은 하나님의 작은 왕국이다.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우리의 마음속에 세워지고 확대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영광의 왕국이 촉진되기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우리가 그리로 옮기움을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 은혜의 왕국은 씨 상태의 영광이고, 영광의 왕국은 꽃이 핀 은혜이다. 이들 은혜와 영광의 두 왕국 사이에는 너무나 불가분리적인 관계가 있어서 그 한 왕국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다른 왕국으로 통행할수 없다. 많은 사람이 영광의 왕국을 흠모하지만 그러면서도 은혜를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결합시켜 놓으신 이 두 왕국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은혜의 왕국은 영광에 왕국에 인도한다.
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이 간구에 함축되어 있는 첫째 사항은 우리가 암흑의 왕국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암흑의 왕국으로부터 인도해냄을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 자연의 상태는 죄가 지배한다고 말하는 암흑의 왕국이다(롬6:12). 이것은 “흑암의 권세”(골1:13)라고 불리운다. 타락전의 인간은 완전한 지식으로 조명을 받았었지만 그러나 이 빛은 지금은 이지러졌으며 그리고 그는 암흑의 왕국에 바져 버렸다. 몇가지 방법으로 자연인은 암흑의 왕국안에 있는가? 그는 무지의 암흑아래 있다. “저희 총명이 어두어지고”(엡4:18)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본래 세상 물정에는 깊은 이해력을 가질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일에는 무지할 수가 있다. 자연인은 또한 오염의 암흑아래 있다. 그런고로 죄많은 행동은 “어두움의일”(롬13:12)이라고 불리운다. 자연인은 비참의 암흑아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복수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암흑의 슬픔이란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눈멀었으되 그러나 그들은 본다고 생각한다. 애굽의 어두움은 “더듬을 만한”(출10;21) 그런 짙은 암흑이었다.
적용 1
자연적인 상태가 어떠한지 보라. 그것은 “암흑의 왕국”이며 그리고 그것은 매혹시키는 암흑이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에디오피아의 아틀란티스가 태양을 저주하는 것과 같다(요3:19). 죄의 암흑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유6절)인도된다. 그대가 암흑의 왕국에 속해 있는 동안 그대가 자연적인 상태에서 죽는다면 암흑의 어두움이 그대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유13절) 것이라고 하였다.
적용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암흑의 왕국으로부터 인도해 내어 주시기를 기도하자.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은 우리가 암흑의 왕국으로부터 이끌려 나오기가지 우리 마음 가운데로 들어올수 없다(골1:13). 그대에게 빛을 비쳐줄 한 불꽃도 가지고 있지 못한 어두운, 저주받은 상태를 알아 차려라! 그대를 밝히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가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고 하였으니, 그는 빛을 그대에게 비취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보도록 그대의 눈을 열어주실 것이다(엡5:14). 그것이 “나라이 임하옵시며”에 함축된 첫째 기도사항이다. 우리는 암흑의 왕국으로부터 인도해냄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Ⅱ. “나라이 임하옵시며”에 함축된 둘째 사항은 우리는 마귀의 왕국에 대항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의 왕국이 세상에서 분쇄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반항하여 대립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사단의 왕국에 대항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데라”(계2:13)고 하였다. 그의 보좌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세워져 있다. 그는 사람들의 지갑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노린다. 사단의 왕국은 불경건의 왕국이다. 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의 왕국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그는 “더러운 귀신”(눅11;24)이라고 불리운다. 사단의 왕국은 노예화의 왕국이다. 그는 그의 모든 신민들을 노예로 만든다. 사단은 찬탈자이며, 폭군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악한 폭군이다. 다른 폭군들은 몸만을 다스리지만 사단의 왕국은 영혼을 다스린다. 그는 우리가 말을 타듯 어떤 사람들을 타고 다닌다. 다른 폭군들은 노예들을 갤리선에서 사역시키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휴식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러나 사단은 그의 노예들에게 양식대신 독약을 주며 그리고 해로운 육욕으로 연명하도록 해주는 무자비한 폭군이다(딤전6:9). 마귀가 유다에게 들어갔을 때 그가 그리스도를 팔고 스스로 목을 매기까지 그를 절대로 쉬지 못하게 하였다.
적용 1
우리는 세상에 세워진 사단의 왕국이 전복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자. 비록 마귀의 왕국이 그토록 악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받고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슬프다. 얼마나 많은 영혼의 수확을 사단은 거두고 있는지, 그런데 하나님은 몇 개의 이삭을 줍기뿐이다. 사람들은 사단에게는 자신해서 섬기는 노예들이다. 그들은 사단을 위하여 싸우다 죽으려 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 임금”이라 일컬어질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신”이라고도 얼컬어지는 것은(요12:31,고후4:4) 그가 인간들의 영혼을 얼마나 큰 권력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Ⅲ.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 속에 세워지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 가운데로 오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 의와”(롬14:17)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하였다. 왜 은혜는 왕국이라 일컬어지는가? 왜냐하면 은혜가 올 때 왕권 정치가 영혼 안에서 수립되기 때문이다. 은혜는 의지와 정서를 다스려서 전인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 이것은 영혼속에서 왕노릇하며, 주권을 행사하며, 반항적인 육욕을 억제하며, 그리고 영혼을 영적인 단정함 가운데 지켜준다.
왜 이 은헤의 왕국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시기 위하여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왜냐하면 은혜의 왕국이 임하기까지는 우리는 은혜의 언약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은혜 언약의 상속자들인가? 그들 마음 속에 은혜의 왕국을 가지고 있는 그런 자들뿐이다. “또 새 영을 너희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36:26)라고 하였다. 여기 은혜의 왕국은 영혼안에 세워진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28)이다.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속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장 순수한 제물도 더렵혀진다.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속에 있기까지는 성찬식이 우리를 깨끗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그것들을 오염시킨다. 심지어는 은혜받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죄가 된다(잠15:8). 죄인의 일은 사망의일이며 글리고 저들 죽은 일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다.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임하시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으니, 왜냐하면 이 왕국이 우리 마음 가운데로 임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 눈앞에 가증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슥11:8)라고 하였다. 부패한 마음의 불결이란 얼마나 큰가, 은혜가 없는 마음은 지옥보다 더 검어 보인다. 은혜없는 사람은 너무나 추악하기 때문에 한번 그가 자기 자신의 부정과 타락상을 보면 그가 하는 첫째일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것이다.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겔20:43)고 하였다. 은혜의 왕국이 우리에게 임하기전에는 우리는 영적으로 사생아, 즉 옛 뱀의 서자 종족이다(요8:44). 사생자가 된다는 것은 최대의 불명예이다.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2)고 하였다. 은혜의 왕국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세워지기 전에는 사단의 왕국이 그 속에 세워진다. 그들은 “사단의 권세”(행26:18)아래 있다고 말한다. 사단은 의지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는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사로잡는다고 한다(딤후2:26). 죄인의 마음은 마귀의 맨션 저택이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마12:44)고 하였다. 이것은 마귀의 일하는 작업장이다. 그는 사람들을 소유한다. 은혜의 왕국이 임하기까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되어 있다. “누구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시90:11)라고 하였다. 만일 단 하나의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사람의 양심속에 들어갈 때 이생에서도 그것이 그토록 무섭다면 하나님이 그의 모든 노여움을 다 분기시키실 때에야 그 어떠하겠는가? 지옥의 고통은 불붙는 연못에 비유된다(계20:15). 다른 불은 이것에 비교하면 가식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리고 이 불 연못은 영원히 탄다(막9:44)
은혜의 왕국이 임하기까지는 사람들은 죽을 때 위로받지 못한다. 그의 양팔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사람만이 기쁨을 가지고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수 있다. 그리스도가 없이 죽는 사람에 대하여 필자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26:24)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속에 세워진 줄 어떻게 알수 있을까?
이것을 검토하는 것이 우리에게 관계되니,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이것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것을 탐구함에 주의를 요하니, 왜냐하면 무엇인가 은혜처럼 보이나 실상은 아닌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고 하였다. 많은 사람이 자기들 마음속에 은혜의 왕국이 들어와 있노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망상, 즉 황금의 몽상일 때가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헛된 희망을 가지고 지옥으로 내려가는가? (어거스틴).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나 생생하게 그렸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새들도 속았다. 은혜 주변에는 많은 속임수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은헤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고로 그들의 마음속에 은혜의 왕국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복음의 은나팔이 울리는 곳에 살며, 그들은 성찬식과 함께 하늘 나라로 올리워간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분명코 나는 하늘 나라에 갈 것이다(삿17:13). 유대인들은 “(우리는)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7:4)고 외쳤다. 우리는 계시가 우리에게 위임되었다는, 우리는 말씀과 성례를 가지고 있다는 이 점에서 영광을 삼기 쉽다. 오호라! 이것은 오류인 것을. 우리는 은혜의 수단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은혜의 왕국은 우리 마음속에 세워지지 않을수 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성령의 보통 사역을 경험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은혜의 왕국이 세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는 사람들이 교화받는 후에도 타락할수 있다는 한 경우를 추정한다(히4:4, 5,6). 위선자들의 조명은 실질적이 아니며, 이것은 거룩의 인상을 뒤에 남기지 않는다. 이것은 잘 듣지 않는 빈약한 약과 같다. 마음은 교화되어 있지만 심령은 새로워지지 않았다. 온통 머리뿐이요 발은 없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에 행하지 않는다. 무엇이 가책으로 하여금 실패로 끝나게 하는가? 어디에서 그것들은 실패하는가? 그것들은 충분히 깊지 못하다. 죄인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버림받은 자기 자신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흙의 깊이가 부족했던 씨는 시들어 버렸다(마13:5). 이런 가책은 성숙하기 전에 불려 날아가는 꽃과 같다.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굴욕을 당하였고 그래서 그들의 죄로 인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그러므로 은혜의 왕국의 소망이 그들의 마음속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은혜의 표시는 못된다. 사울도 울었고 아합도 스스로를 낮추었었다. 왜 굴욕감은 은혜가 아닌가? 어떤 점에서 이것은 은혜에 못미치는가? 악인의 눈물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고생에 의해 억지로 나오니, 마치 증류 때 방울져 떨어지는 물이 불로 인하여 억지로 나오는 것과 같다(창4:13). 사람은 큰 죄를 버리는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마음의 죄에 대하여 꺼려 하지 않는다. 즉 교만, 색욕적인 생각들과 같은 죄의 맨 처음 동기말이다. 아아, 그러므로 만일 그토록 많은 기만이 있고 그리고 사람들은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마음 속에 실상은 오지 않았는데 임하였다고 생각하기 쉽다면 얼마나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이것을 정말로 소유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가려내기 위하여 면밀하고 비판적일 필요가 있을가!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우리속에 세워진 줄을 어떻게 명확히 알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라고 일컬어 지는 바 영혼 속에 이루어진 변형 또는 변화를 받음으로써이다. 기능들은 새롭지가 않지만 그러나 거기 새로운 성질이 있다. 마치 기타의 줄들은 동일하지만 곡조가 바뀐것과 같다. 은헤의 왕국이 세워질 때 마음에는 빛이 있고, 정서에는 질서가 있고, 의지에는 유연성이 있고, 양심에는 민감함이 있다. 우리가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속에서 세워진 줄 알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도 끄지 않으실 꺼져가는 등불같은, 하나님을 향한 거짓없는 소원을 가짐으로써이다. 이 맥박의 고동에 의하여 우리는 생명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느1:11)라고 하였다. 거짓없는 소원이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증명해 준다. 거짓없는 소원은 천진 난만하다. 참다운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 자신 때문으로도, 그의 보상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거룩하심 때문으로도 그리스도를 바란다. 거짓없는 소원은 점진적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적은 정도의 은혜에라도 감사해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리 큰 은혜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을 좀더 많이 갈망한다. 분명히 하나님께 향한 이 거짓없는 소원은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였다는 축복된 표시이다. 이 맥박의 고동은 생명을 나타낸다. 선한 소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어거스틴). 우리는 왕자다운 믿음의 은혜를 가짐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은혜의 왕국이 임한줄 알수 있다. 믿음은 우리를 자연의 돌감람나무로부터 잘라내어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여 준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10:38)고 하였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건전하다는 것, 이 믿음은 하나님의 공작으로 된 믿음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참다운 믿음은 말씀의 봉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10:17)라고 하였다.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이루어졌는지 검토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으로서 우리를 낮추셨는가? 그는 우리의 묵혀 둔 땅을 개간하시고 그리고 나서 믿음의 씨앗을 심으셨는가? 좋은 표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믿음을 어떻게 얻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 자신을 의심해 보라. 마치 사람들이 어떻게 물건을 얻었는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이 물건들을 훔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는 것과 같다. 참된 믿음은 처음에는 겨자씨 한알처럼 작다. 이것은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꺼져가는 등불이니, 소원으로 연기 나지만 그러나 위로로 불타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 작아서 그리스도인은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좀체로 분간하지 못한다. 참된 믿음은 역사함에 오래 걸린다. 이것은 순식간에 오지 않는다. 이것은 많은 마음의 탐색과 많은 기도와 눈물을 요한다. 영적인 전투가 있는 것이다. 믿음의 자녀가 출생하기 전에 영혼은 굴욕의 많은 쓰라린 고통을 당한다. 참된 믿음은 성결과 연결되어 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9)라고 하였다. 참된 믿음은 담보가 없이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믿음은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약속을 그의 계약으로 주셨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시37:3)라고 하였다. 참된 믿음은 소출이 많다. 그것은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라헬의 아름다움과 레아의 다산을 겸유한다. 믿음은 선한 행위로 가득하다(루터). 우리는 사랑의 은혜를 가짐으로써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 가운데로 임한 것을 알수 있다.
우리는 종교의 직무들을 영화시킴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은혜의 왕국이 임한줄을 알수 있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고 하였다. 직무의 신령화는 세가지 사항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 직무를 신령화 시킨다.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7:35)고 하였다. 헌신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제물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바친다. 목표가 정직하다. 마음이 곧고 바른 사람은 세가지 직무상의 목표를 가진다. 그가 보다 더 하나님과 닮아 가려 하는 것. 그는 하나님께 보다 많은 교제를 가지려 하는 것. 그는 하나님께 보다 더 영광을 돌리려 하는 것(벧전4:11). 우리는 모든 알려진 죄에 대한 반감과 적대심에 의하여 우리에게 은혜의 왕국이 임한 것을 알수 있다.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119:104) 라고 하였다. 은혜로운 영혼은 죄를 내어 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죄를 미워한다. 우리는 순종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우리속에 은혜의 왕국이 임한 것을 알수 있다.
나는 은혜의 왕국이 아직 나의 마음 속에 임하지 않았을까 두렵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아래 있거나 또는 은혜가 휴지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판단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다만 분별력의 영을 받은 다른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은혜의 왕국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임하지 않았다고 생각 하는지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대 의사를 들오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의 왕국을 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이것을 모를수도 있다. 컵이 베냐민의 자루속에 있었지만 그는 이것이 거기에 있었는지 몰랐다. 이와같이 그대는 은혜가 그대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은혜가 없다고 울수 있다. 은혜가 숨겨져 있다고 은혜를 잃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은혜의 왕국이 마음속에 임하기전에 이것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된다. 율법의 쟁기가 충분히 깊히 들어가지 못했을까 두렵다. 나는 충분히 낮아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은혜를 가지지 못하였다. 금이 용광로 속에서 충분히 오랫동안 있은 후에야 불순물이 정화된다. 이와같이 죄의 사랑이 일소된 후에야 영혼은 비록 하나님께 만족은 못드려도 하나님께 받으심직할 만큼 충분히 겸손해 진다. 만일 그대가 충분히 겸손해 졌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나는 허약의 영을 받아 가지고 있으며, 나는 약하고 무력하며, 그리고 모든 거룩한 행동에 맞지 않는다. 강력한 은혜 뿐만 아니라 약한 은혜도 그리스도께 대한 자격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약한 믿음의 손도 그리스도의 공로의 자선금을 받을 것이다. 약한 믿음도 성장이 가능하다. 가장 강한 은혜뿐만 아니라 가장 약한 은혜도 꾸준히 인내할 것이다. 나는 많은 교만, 세속적인 것, 그리고 정욕을 발견한다. 아무리 선한 성도도 남아 있는 부패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여, 만일 그대가 이것 한가지, 즉 그대의 영혼의 구성과 기질이 거룩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수 없거든 그대 자신을 거스려 논박하지 말라. 그대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호흡하며 그를 즐거워하는가? 그대의 영혼의 상태는 천국적인가? 그대는 다윗처럼 “내가 깰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하나이다”(시139:18)라고 말할수 있는가?만일 그대에게 이와 같다면 은혜의 왕국이 영혼안에 임하였다는 것을 그대 스스로 확신하라.
적용 1: 권면을 위하여
이 은혜의 왕국이 당신의 마음속에 세워졌음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라. 은혜의 왕국은 인격을 돋보이게 하며 하나님과 천사들의 눈에 그를 아름답게 한다. 이것은 왕의 딸을 내적으로 지극히 영광스럽게 만든다(시45:13). 마음에 새겨진 은혜의 왕국은 우리의 영적 방어이다. 은혜는 “빛의 갑옷”(롬13:12)이라고 불리운다. 마음의 세워진 은혜의 왕국은 그것과 함께 평화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하였다. 은혜의 왕국은 영혼을 윤택하게 한다. 은혜의 왕국이 임할때에는 이것이 마음을 고정시키고 확립시킨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시57:7)라고 하였다. 이 왕국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이것을 위하여 수고하라. 우리는 수고가 없이는 세상을 얻지 못한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잠2:4)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은헤의 왕국을 우리 마음 가운데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가자. 그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5:10)이라고 일컬어진다. 나는 이 은혜의 왕국을 원하오며 나는 겸손하면서도 믿는 마음을 원하옵니다라고 주님께 아뢰라. 오오! 나를 은혜로 풍성케 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추근대는 청원자가 되라. 설교된 말씀에 가까이 하라. 설교된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막대기이다. 이것은 마음속에 은혜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그가 사용하시는 큰 도구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10:17)라고 하였다. 비록 하나님은 그의 성령에 의하여 직접 은혜를 역사하실수도 있지만, 그는 설교된 말씀에 의하여 역사하는 편을 택하신다. 이것이 마음속에 은혜의 왕국을 세우는 일상적인 수단이다.
Ⅳ.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증대되도록, 이것이 더 많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기도한다.
왜 우리는 은혜의 왕국이 영혼속에 이미 임하였는데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가?은혜가 증대되기 위함이며 그리고 이 왕국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한층 더 번성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천사들 가운데서 살게되기 까지 우리는 이 기도로 기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제 은혜의 왕국은 영혼안에서 증대 되는가? 언제 이것은 번성하는 왕국이 되는가? 그리스도인이 더 깊은 정도의 은혜를 받으면 등불에는 보다 많은 기름이 있게 되고, 그의 지식은 명확해 지고, 그의 사랑은 더욱 불타오른다. 은혜는 등급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래서 지평선의 태양처럼 보다 높이 오를수 있다. 은혜의 왕국이 번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살줄 알게 되었을 때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하였다. 그것이 번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열심히 충만할 때이다(민25:13). 은혜의 왕국이 증대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일반적인 소명에서 경건한 것만큼 그의 특별 소명에서 부지런할 때이다. 그리스도인이 유쾌하게 그들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은혜가 증대되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한 예절을 지키는 것은 은혜의 증대를 나타낸다. 은혜의 왕국이 사람 자신의 마음 속에서 증대되는 것은 그가 이 왕국을 다른 사람들 안에도 세우기 위한 수단이 되려고 노력할 때이다. “너희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라고 하였다.
은혜의 왕국이 증대되어야 할 무슨 필요라도 있는가? 교회에서 지속적인 목회활동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구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헤의 왕국을 증대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7,12)고 하였다. 만일 은혜의 왕국이 증대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쇠퇴할 것이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고 하였다. 은혜를 증대되게 하는 것은 기독교에도 적합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나무들이라고 일컬어진다(사61:3). 은혜의 왕국이 증대되듯이 그리스도인의 위로도 증대된다. 성장이 없음을 슬퍼하며 은혜의 왕국이 증대됨을 발견하루 없다고 한탄하는 자들은 어떻게 위로받을수 있을까? 은혜 가운데서 우리의 쇠퇴를 보고 슬퍼하는 것은 은혜의 생명뿐만 아니라 성장을 입증한다. 우리의 불완전을 보는 것은 은혜안에서 진일보이다. 성령이 마음속에서 비취면 비췰수록 그만큼 더 많은 악을 마음은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은혜가 점점 적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빛이 점점 더 커질지도 모르는데도 이것을 전보다 더 악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은혜에서 증대되면서도 이것을 알아채지 못할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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