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전능자의 은혜로 보증된 구원
(롬4:13-17)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제기하고 있던 반대, 즉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구약의 교훈을 묵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반대 의견을 다루고 있다.
-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 그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의 중개를 통해서가 아니고 믿음의 의를 통해서라는 명확한 진술이 있다. 그 사실은 아브라함의 사적을 다룬 창세기의 여러 장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그 역사적 사실은 너희 유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약속이 할례 받기 전에 주어졌기 때문에 율법을 인하여 그 약속이 맺어지지 않고 ‘믿음의 의’로 말미암았던 것이다.
-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14) 만일 그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것이고 우리에게 이르렀다면 믿음은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항상 우리의 행동, 행위에 관해 명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율법을 제기하는 순간 여러분은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며 믿음은 사라지고 추방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것이다. 하반절에서 그 언약 역시 쓸모없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율법을 살펴 지킨다는 조건으로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맺으셨다면 그 언약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맺어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주신 것을 왼손으로 도로 빼앗는 격이 되고 그것은 언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고 말한다. 율법은 정죄를 가져오기 때문에 진노를 이룬다. 진노는 축복의 약속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진노는 심판과 고난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 7장에서 율법 그 자체는 거룩하고 흠이 없고 선한 것이지만 내가 육체에 속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다고 말한다. 율법은 나의 마음에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인식시켜 준다. 그러면 나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고 말한다. 죄와 허물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율법이 하는 일은 그 죄를 규정하고 죄를 범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율법의 의도는 우리의 죄책을 더욱더 확신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우리들 모두를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절망하게 한다.
- 16,17절에서는 13-15절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을 이곳에서는 긍정적인 면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주제에 관한 모든 위대한 논증을 매듭짓는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16)
구원(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기다리는 모든 것인)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은혜로 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값을 요구하지 않는 호의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되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될 수 없다. 공로와 행위는 언제나 율법에 속하며 믿음은 은혜와 상관되어 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라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11:6). 만일 여러분들이 은혜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행위에 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용어들을 혼합해서 자기모순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 둘은 결코 함께 취급될 수 없다.
이로부터 바울은 확실한 추론을 끌어낸다.
첫째, 믿음의 원리는 은혜로 인도하고,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확증해 주는 것 중의 하나이다. 구원에 있어서의 영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만일 믿음 외에 어떤 것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깎아 내는 것이며,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바울은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은혜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믿음으로 되어야 한다.
둘째, 구원의 언약의 포괄적인 성격(유대인이나 이방인,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다 포함됨)을 보증하는 것은 오직 믿음의 길 밖에 없다고 말한다. 만일 구원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만 구원이 될 것이고 율법을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전혀 소망이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축복을 가져오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그 약속을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 우리를 위해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구원의 원리는 믿음과 은혜 하나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복음을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종교성이 있다는 것이 전혀 쓸모가 없다. 도덕성도 계산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아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오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복음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 원리로 인해서 그 언약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는’ 것이다.
셋째, 거기서만 머물지 않는다. 이 은혜와 믿음의 길만이 우리 모두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행위나 율법이나 사람 안에 있는 어느 것으로도 되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었다. 네가 율법을 지킨다면 너는 여기서 살게 될 것이고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동산 안에서 조차 그의 성품 안에 죄가 없는 사람인데도 타락을 했다. 만일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우리 안에 있는 무엇에 달려 있다면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구원이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님을 감사드린다. 내가 그를 붙잡아서가 아니라 그가 나를 전능한 힘으로 붙잡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하노라”(빌1:6)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17) 이 절에서 계속 강조하며 색인하듯이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 구원의 기초이며 소망과 확신의 기초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민족의 아비이다. 아브라함은 99세요 사라는 90세로 아기를 낳지 못한 부부였기 때문에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으며 이삭이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과 모든 후손들의 아비였던 것이다. 그 점이 ‘하나님 앞에서’라고 한 의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후손들의 조상이요 장차 올 수많은 종족들의 조상으로 보셨다. 또한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정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고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17) 바울은 우리에게 대답해 준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생산할 수 있도록 살리신 것이며, 그 후에 이삭의 번제 사건 속에서 똑같은 일을 행하셨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아브라함이 실제로 칼을 들어서 이삭을 제사하기 위해서 죽이려 할 순간에도 머뭇거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손인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저주를 받고 나무에 매달리고 못 박혀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그를 통하여 생명과 영생을 밝히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려 내신다‘ 그는 전능자이시다.
둘째,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다” 아무것도 없으나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부르다’는 종종 ‘이름을 붙이다’는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하나님은 이 노인 아브라함이 사라와 함께 별들 아래서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후손을 있게 하셨고 그들 후손에게 이름을 지어 주셨던 것이다. 여러분의 이름도 제 이름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들을 아시고 그들이 존재하기 전에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과 마지막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
- 그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이루셨다. 아직 저와 여러분은 땅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차별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을 아신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영화롭게 된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엡2:6)고 말한다. 이 순간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거기에 있는 여러분을 아신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대헌장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힘이나 생명이 없는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실 힘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와 불신앙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전능하신 분 외에는 성도의 견인을 보증할 자가 없다. 사람은 똑같이 소망이 있는 것이며 어떤 것도 이 구원의 과정을 막지 못하며 어떤 것도 그것을 좌절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신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것이다. 그것은 행위나 율법이나 할례나 또는 사람 안에 있는 무엇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며 모두 은혜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성경강해·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16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3.07 |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15장, 믿음의 본질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3.02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13장, 오직 믿음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2.22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12장,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심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2.22 |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11장,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0) | 2017.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