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3장 하나님께 나아감(은혜에 서 있음)(2017수정,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3. 23. 13:33

3장 하나님께 나아감(은혜에 서 있음)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두 번째 결과와 그 귀결을 살펴본다.

-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들어감을 얻지 못한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영단번에 일어난 일임을 강조한다. 성화는 진행과정이지만 칭의는 하나의 사건이고 한꺼번에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죄짓지 아니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간주해 주신다고 선언하시는 한 사건이다. 우리는 죄사함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진다. 그것이 바로 칭의이다. 이 선언을 하시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는 은혜 밖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 안에 있다.

 

들어감’(나아감 access) - 신약전체에서 3번만 쓰였다.(3:12, 2:18) ‘소개함이란 뜻으로 궁정에 알현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쓰는 말뜻과 같다. 우리는 전혀 소개장을 가지지 못했고 나아감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개장을 얻었으며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알현할 때는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알현권과 들어갈 권리는 오직 완전히 그 안에만 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의로 우리에게 옷 입혀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이 특별한 신분에 부속된 모든 유익들을 얻었고 받았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도해 들여서, 우리가 전에 받을 수 없었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은사들과 축복들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6:14) 우리는 지금은 은혜 아래있다. 전에는 법 아래있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율법적인 견지에서 보셨다. 이제는 더 이상 법 아래있지 않고 은혜 아래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왔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은혜의 견지에서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스럽게 보시며, 우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우리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모두 은혜에 속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경이로운 일인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전체 관계가 달라지고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궁궐 밖 한 길에서 떨고 지내던 어느 사람이 갑자기 기상천외의 방법으로 초청을 받고 예복까지 받게 되어, 궁궐의 푸짐한 연회(부와 복락)가 베풀어진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사도가 그 점을 우리가 서 있는 은혜라고 칭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빚진 자라는 것을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반역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서 심판과 보복 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은 모두 은혜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서 있는 은혜 안에 있으며, 우리가 서있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이며, 총애라고는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보여준 호의이다. 법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엄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에게 베풀어진 호의이다. 그것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 때문이다. 우리 측에선 전적으로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 편에서는 전적으로 무상이다. 우리의 됨됨이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은혜에 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고되고 어려운가? 그것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제공되었다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늘나라 왕의 자녀들로 살고 있는가? 은혜와 능력이 그렇게 커서 누구든 그것을 다 못 구할 분에게 속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는가? 오히려 궁핍한 자로 영적 빈곤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아주 악하고 죄스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6:35). 허드슨 테일러는 기도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의 전체 체험이 변혁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요 그의 영광과 은혜의 모든 부는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주님이 부단히 강조하신 것이 이 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12:7). 주님의 논증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위해 그렇게 하시는데 우리를 위한 그의 보살핌은 얼마나 더하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의 매일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성경에서 거듭 실증된 것이고, 모든 세대를 걸친 셀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계속되는 역사 가운데서 입증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빌립보서 4장의 진술에서 반복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0-13).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서 있는 은혜인 것과 이신칭의가 가져온 결과이다. 이제 우리는 외인이나 가난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을 정말 이해하였고 그것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길은 우리가 기도할 때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철저히 확신하는가? 우리는 한 길에서 서성되는 걸인이 아니다. 연회석에 있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라. 우리는 왕의 아들로 말미암아 소개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3:12). 그 담대함은 확신과 확실성을 가진 담대함인 것이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이것들을 스스로에게 회상시켜 줘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왜 바울은 그것을 서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그 말에 주어진 온전한 무게와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서 있는 것은 사전에 견고히 서다.’ ‘온전히 서다로 되어 있다. 사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이 은혜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견고히 자리를 잡고 그 안에 든든히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온통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 말은 견고함과 안전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은혜 안에 서 있다. 여기서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바울 사도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8장 마지막에 그가 말하는 방식을 보라.

나는 확신하노니 절대로 확신 한다 -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6:13)

여러분은 담대함으로 여러분의 머리를 쳐들어야 한다. 여러분은 은혜 안에 서 있다. 이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두 가지 방면에서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이 자리 안에 있음과 우리가 그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다. 확신을 가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임무이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 개신교 신앙의 영광이요 강조점이다. 로마 카톨릭은 이를 부정한다. 그래야 교회와 사제를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은혜 안에 서 있다는 이 위대하고 복된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확신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이보다 놀라운 것은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 그 안에 견고히 서 있게 된다는 것, 우리가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이것을 선언해야 한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은혜의 넘치는 부요함을 결코 잊지 말라. 극빈자처럼 살지 말라.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