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12~21절의 개관적인 분해
- 이 대목의 구조를 개관적으로 분해해 보아야한다. 전체 대목의 뼈대나 구조를 마음 속에 이해하고 있으면 특정 진술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좋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넓은 안목, 조감적인 관찰은 각각의 세부적인 난제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진수가 되는 것이다.
이 문단의 가장 중요한 논증, 주요 핵심은,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아담에 연관되어 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아담과의 관계가 본질적인 원리 면에서 현재의 우리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여기서의 대 원리이다. 우리는 그 점을 확고히 붙잡아야 하며 우리 마음 가운데 맨 앞자리에 그것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 12절에서 ‘이와 같이’(and so)라는 말로 비교가 시작되어 하나의 삽입문(13~17절)을 넣어 계속해 나간다.
15~17절은 13~17절의 주요 괄호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삽입문이다.
18~19절에서 바울은 결국 12절에서 시작을 했으나 삽입문으로 중단된 비교를 분명하게 결말짓고 있다. ‘그런즉’은 12절의 진술을 다시 거론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19절에서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 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래서 모든 것을 끝마친 것이다.
20절과 21절에서 더 깊은 요점이 도입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일종의 추신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율법이 들어옴으로 은혜의 우월성이 훨씬 더 영광스럽게 비췰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의 본질을 알고 이해하고, 죄가 인류에게 어떠한 것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알게 되고 죄가 모든 각인에게 예외없이 미쳤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넘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더 경탄하게 될 것이다.
- 12절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전체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에 속한다. 세상은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혀 있다.
첫째는, 죄의 보편성이다. 인류는 대부분 올바른 일보다는 그릇된 일을 하기 좋아한다. 세상 사람은 “물론 나는 온전한 성자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사망의 보편성이다. 모든 사람들은 죽으러 태어났다. 여러분이 첫 호흡을 시작할 순간 그것은 종말로 인도하는 호흡의 첫 단계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히9:27).
죄의 보편성과 사망의 보편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① 비성경적인 답변은 진화론으로 인간은 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진화하는 존재이며 지금도 동물에서 진화하고 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화하고 있다. 결국 진화하여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 관점에는 죄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통은 악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선과 더 좋은 자질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사망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은 죽음이란 현실적인 것이지만 생명 순환과정의 한 부분일 뿐이다.
② 죄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12절에서 발견된다. 사도는 “죄”를 의인화하고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가 왕 노릇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죄가 어떤 자질이 모자란 것이 아니며 소극적인 국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일을 만드는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가 들어와서 다스리고 통치하고 왕 노릇 하여 엄청난 행동성을 하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여기서 비성경적인 관점과 상충됨을 본다. 죄의 의인화는 성경적 교훈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죄가 마귀의 인격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죄는 우습게 생각하고 조롱할 존재가 아니다.
- 사도는 죄를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 부단히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불순종과 범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하는 태도이며 혐오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죄의 정확한 국면은 다음과 같다. -
① 죄란 새 통치 원리가 사람의 삶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것과 우리가 부패하여졌으며 우리의 습관이나 실제 행동들은 이 통치 원리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죄가 행한 일을 묘사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동사는 ‘침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세상에 침입하여 들어왔다. 인간의 생명 속에 덮치고 들어왔다. 죄는 침입자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그것을 낙원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 그때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것이다.
사도는 이 엄청난 구절에서 우리를 타락의 교리와 만나도록 이끌어 간다. 인간은 원의(原義)를 가지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을 하고 만 것이다. 죄가 들어와서 범죄를 유발하는 반역과 부패한 생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했다. 죄의 보편성은 타락의 교리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설명된다.
③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여기서 죄의 보편성에 대한 해설을 대하게 된다. 사도는 사망이라고 할 때 1차적으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육신적인 죽음이며 필연적으로 영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사망을 가져온 것은 죄이다. 죄는 죽음이란 재난의 원인이다. 죽음은 죄의 벌로써 온 것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고전15:56) 라고 말한다.
④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이르렀다’는 것은 모든 각 개인에게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의 사실은 보편적인 것이 되었으며 우리 모두 죽으러 태어나게 된 것이다.
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인간성이 그래서가 아니다.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거나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나 인간성을 대표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한 사람’ 한 개인을 말하고 있다. 실로 이 대목의 전체 요점은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한 사람이 아니라 새 인간성에 관한 일반적 사상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12~19절에서 12번이나 ‘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는 인간성이 아니라 한 인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라고 하는 첫 사람 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 1~3장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임을 바울이 믿고 있고 우리 주님도 역시 그것을 믿으셨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여기의 교훈-성경 전체의 교훈-은 죄와 죽음이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간 생명과 인류의 노정 가운데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사실대로 아담이 있었다는 것과 바울이 그에 대해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죄 받을 필요가 있으며 속죄의 필요성이 있는가? 왜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 했는가? 문자 그대로의 아담을 부정하면 모든 기독교의 존재 이유와 기독교 메시지는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하나의 위대한 테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과 인간 세상이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얘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성경은 역시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이 바로 될 수 있는가를 말한다. 아담? 그리스도? “아담 안에서 그러한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전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이 나의 모습이라고 고집하며 거기에 머무는 한
영적인 침체를 벗어날 수 없고, 새로워질 수 없다. 성령을 소멸하게 되고, 성경을 부인하게 되고,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이루신 일을 부정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생명으로 은혜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털어버리고 일어서야 한다.
연약함을 붙들고 합리화하고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담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의 영광을, 소망으로 붙들고 즐거워하며 일어서야 한다. 구원은 ‘아담 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그분의 생명과 영광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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