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조엘 비키, `칼빈주의`, 2부, 10장, 오직 성경, 은혜, 믿음, 그리스도, 영광 (강의안)

강대식 2017. 6. 15. 09:59

10장 성경, 은혜, 믿음, 그리스도 그리고 영광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중세 시대에 존 위클리프나 존 후스 같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적대적인 교회 인사들의 도전을 받을 때마다 후스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보라. 그러면 내가 회개하고 내 입장을 철회하겠다”. 후스는 오직 성경에 대한 헌신으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고, 이러한 원리로 인해 그는 교황주의(교황의 권위가 가장 크다는 원리)와 사제주의(최상의 권위가 교회의 전통과 성직자 그룹에 있다는 원리)를 공격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몇 가지 방식으로 성경에 대한 후스의 주장을 발전시켰다.

 

1) 권위

종교 개혁자들은 모든 것을 오직 성경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경이 교회의 법칙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이차적이거나 파생적이지 않다.

존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만큼 권위적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성경을 의지하며 성경의 약속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전체적으로 이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실상 다른 모든 종류의 권위들 즉 교황적 권위나 교리적 권위나 인간적 권위들은 반드시 성경에 종속되어져야 한다.

 

2) 불오성과 무오성

개혁자들은 성경의 철저한 불오성에 대해 가르쳤다. 성경의 모든 문장과 단어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갗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라는 말씀을 전심으로 인정했다.

또한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믿었다. 마틴 루터, “나는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다는 것을 견지하는 법을 배웠다.” ‘오직, 전적으로 성경(sola. tota Scriptura)’이라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본래 개혁주의적이다. 이것이 칼빈주의자로 하여금 오직 성경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3) 자해석과 자증성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경과 성령의 조화를 강조했다. 울리히 쯔빙글리는 교회로 하여금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성경의 참된 해석자가 성령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해석의 열쇠는 단순히 베드로나 소위 베드로를 계승한다는 로마교회의 계승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전통이 해석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특정한 성경 본문이 연구의 결과 그 본질에 있어서 명백하게 우화적이 아니라면, 성경의 참된 영적 의미는 자연적이며 문자적이다.

이와 동일하게 칼빈이 중점적으로 강조했던 것이 바로 성경의 자증성이라는 특징이다. , 성경의 증거가 신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말미암아 확증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곧 성령께서 내적으로 가르침을 주신 사람들은 진정으로 성경을 신뢰한다. 또한 성경이 스스로 확증하므로 성경을 감히 다른 증거와 이론에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마땅하고도 온전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4) 자유

개혁자들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계급으로부터 성경을 해방시켰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처럼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쯔빙글리에 의해 추천된 주해 설교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칼빈의 주석같이 문법적이고도 역사적인 주해를 통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의 지성을 인도해 주는 신앙의 법칙이요 매일 우리의 의무를 지도해주는 행위의 법칙이라고 가르쳤다. 성경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5) 능력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그분의 진리와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교훈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히 성경을 신뢰할 수 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기를 고대할 수 있다. 이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오직 이 한 권의 책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할 수 있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고 종교개혁의 후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과연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고 사랑하며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기도하고 있는가? 성경은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폭풍우와 파도를 극복하는 나침반이 되는가? 성경은 우리 자신을 보는 거울(1:22-27)이며, 우리의 행위의 규례이며(6:16),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119:9) 하는 율례이며, 우리를 뜨겁게 하는 불이며(24:32), 우리를 먹이는 양식이며(23:12), 우리가 싸우는 검이며(6:l7),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해결해 주는 모사이며(119:24),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는 기업(119:111,1l2)인가?

 

존 플라벨이 말했듯이, 우리는 과연 성경으로부터 가장 최고의 삶과 가장 고상한 고난과 가장 유익한 죽음의 방법을 배우고 있는가? 정말 오직 성경만이 루터와 칼빈처럼 우리의 양심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우리의 개인적인 슬로건이 되고 있는가?

 

2. 오직 은혜(SOLA GRATIA)

 

인간이 자신의 죄사함과 구원을 처음으로 주도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원의 전체 사역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sola gratia)에 기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주도하시고 완성시키는 것인가? 에라스무스의디아트리베에 대한 대답으로 루터는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에서 분명하게 주권적인 은혜를 지지한다.

 

루터는 죄인이 구원의 방법을 제공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취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와 순례 여행, 고행, 금식, 연옥과 성모 마리아 숭배 체계를 공격했다. 로마 가톨릭의 행위에 기초한 체계를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이 이 논쟁의 뿌리를 쳐서 알리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적인 은혜와 자유의지의 싸움이다. 영어로 은혜라는 단어는 흠정역 성경에서 169, 그러고 파생어까지 포함한다면 204번이나 나온다. 은혜는 가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과분한 호의. 또는 은총으로 정의된다. 19세기 칼빈주의 침례교도인 윌리엄 뉴먼, “은혜란 -- 무가치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이다”.

 

에베소서 24,5절이 선언하듯이, 긍휼과 위대하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하고 살리고 자유케 하며 해방시키신다. 그들이 비록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럽지 않고 혐오스럽기까지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어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신실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이고도 주권적인 은혜가 의미하는 바는, 하늘과 땅의 가장 높으신 하나님, 주권적이고도 구원의 삼위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징계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변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특별히 강조하는 신약성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이다. 바울은 이 은혜를 가리켜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하나님의 왕국의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은혜라고 말한다(1:16). 이 은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 사이에 화평을 수립해 준다(5:2). 또한 이 은혜는 죄의 권세보다 훨씬 더 강해서 죄의 지배로부터 참된 자유와 영속하는 해방을 가져다 준다(5:20,21, 6:14), 하나님의 신적 은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많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나누어 준다(12:6). 이 은혜가 궁극적으로 사망을 정복할 것이며, 은혜를 받는 모든 자들을 영생으로 이끌 것이다(5:20,21). 왜냐하면 이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인간의 아무런 공로 없이 그들을 구원하기로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11:5,6).

 

은혜는 우리를 부르고(1:15), 우리를 중생시키며(3:5), 우리를 의롭다 하며(3:24), 거룩케 하며(13:20,21), 우리를 보호한다(벧전1:3-5).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치기 위해, 고난과 영적 전투의 때에 강해지기 위해 은혜가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구원적 관계를 소유할 수 있다. 오직 은혜로만 우리는 회심과 거룩과 봉사와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2:8-10, 벧후3:18, 2:12,13, 고후1:12 참고).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원리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신적인 공급이다. 그것은 선택과 부르심과 거듭남을 통하여 표현되는 하나님의 대권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고난받으며 심지어 죽을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안에서 영원히 보존되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주권적인 은혜가 없이는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바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철저하게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죄인이 무덤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와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무조건적인 은혜가 선포되어야만 한다. 인간적인 결정들과 대중들의 조작, 그리고 인위적으로 강단에 초청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회심자를 낳을 수 없다. 오직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옛 복음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사로잡고 변화시킬 수 있다. ‘놀라우신 주 은혜(Amazing Grace)’를 노래하는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정말 진심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입에 발린 말로만 주권적인 은혜를 노래한다. 그리고는 실제로는 은혜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풍성한가!

 

3. 오직 믿음(SOLA FIDE)

 

루터는 고통스러운 분투의 결과, 로마서 1:17 말씀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을 때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그때 나는 순전히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즉시 나는 마치 내 앞에 열린 문을 통과해서 천국으로 들어간 것 같은 확신을 느꼈다.” 결국 루터는 그 믿음이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수단임을 이해했다.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고 알려 준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대해 설명할 때, 단 한 번도 믿음 때문에얻는 칭의라고 한 적이 없다. 그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 제사적인 보혈로 인하여,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은혜롭게 전가되는 하나님의 의라고 설명했다. 칼빈, “칭의는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되어 있다.”

거듭남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손을 죄인들에게 수여하신다. 칭의에 공헌할 여지가 있는 손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가되는 의를 받는 손이라는 의미이다. 믿음의 손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받을 뿐이다. 칼빈,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안으로 이끌어 줄 뿐 다른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지 않는다”.

 

믿음과 은혜는 서로 경쟁 상대가 아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가 존중을 받기 때문에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오직 은혜오직 믿음을 통하여 확증되는 것이다. 루터,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고 마치 반지가 보석을 끌어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껴안는다.” 카톨릭은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 주심으로써 청의가 성취된다고 하여 칭의를 성화와 혼합해 버린다. 루터, “믿음이 내게 그리스도를 준다. 그렇다면 내게 주신 믿음으로부터 역사하는 사랑을 내 이웃에게도 주고 있는가?”

 

4.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과 은혜와 믿음이 모두 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다고 확증한다. 벤자민 워필드, “믿음이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그 대상(예수 그리스도)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믿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은 믿음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전능하신 구주에게만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 중심성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중심이자 경계선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리스도 그분과, 또한 그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행하신 일이 성경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심적인 내용임을 뜻한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1)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도덕적 탁월하심과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찬미를 불러 일으키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1:3).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영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보드무겁다라는 어근을 지닌 단어의 파생어이다. 금화의 가치는 무게로 매겨진다. 헬라어 독사견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것에 값을 매기는 우리의 생각을 뜻한다. 히브리 사상은 영광을 하나님 안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그분의 본질적인 가치나 값이라고 평가한다. 헬라 사상은 그들이 보는 하나님 말씀과 역사하심에 있는 가치나 값에 대한 지성적이고도 도덕적인 반응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모두에서 영광이란 단어는 탁월함과 찬미의 표현과 이 표현에 대한 존경과 경배를 의미한다.

 

2)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창조자이자 구속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은 자신의 삶과 저술과 심지어 죽음을 통해서까지 이 진리를 구체화시켰다.

칼빈의 육체는 여러 질병으로 황폐해졌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칼빈에게 친구들은 일을 좀 그만하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내가 만약 일을 그만한다면 주님이 나에게 게으르다고 하시지 않겠는가?” 칼빈이야말로 주여, 내 심장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라는 모토대로 살아간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을 헌신한다. 그들은 삶의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선한 것임을 고백한다. 성경을 기초로, 그리고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선을 위하여 합력하여 역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8:28).

 

3) 인간의 제일되는 기쁨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매우 간결하게 표현한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을 좋아하고 있는가? 에드워즈, “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해질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이 텅 비고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