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18장 보편 구원론 비판 (2017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6. 28. 14:51

18장 보편구원론 비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5:15)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5:18)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많은 사람 많은 사람이란 낱말을 살펴보면, 15‘the many’, 18‘all man’, 19‘the many’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그 평행이 숫자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적용되는가?

 

-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분명히 많은 사람과 모든 사람은 이쪽에서 그것을 의미했으면 저쪽에서도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만일 많은 사람이 한 곳에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면 다른 곳에서도 모든 사람을 의미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추하기를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 누구나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이 관점이 보편구원론이다.

 

- 그것이 성경을 취급하고 적용하는 진정한 방법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첫째, 성경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순전한 문자주의이며 비이지적인 것이다. 모든 진술들은 전체 문맥에서 취급해야 한다. 문맥에서 그 말을 살펴보면 성경에서 사용된 모든이나 세상’ ‘많은등이 모든 각 사람을 뜻하지 않을 수가 허다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3:26에서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 가더이다 유대인들은 과장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큰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17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꿈을 꾸리라여러분은 말세에 사는 모든 개인들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가?

 

둘째, ‘모든이란 단어는 성경 자체가 분명하게 하는 조건들로 인하여 한계 지어진다. 사도는 17절에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만 해당된다고 한정하고 있다.

21-22절에서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하고 있다. 전부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만 해당 된다.

13:39에서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믿는 자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

 

셋째, 더욱더 명백한 일은 성경은 시종일관 인류를 구원 받은 자와 버려진 자로 근본적으로 구분한다. 구약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다른 모든 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분리해 내셨다.

신약에 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6,18)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2)

알곡죽정이’. ‘생명의 부활심판의 부활’. ‘염소’.

 

-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어느 특정한 일개의 진술 위에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전체다. 그것은 어디서나 일관하고 있다. 만인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 어느 한 곳도 없다.

사도가 대조하고 있는 것은 숫자에 관심이 없으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담과 관련된 본질과 그리스도와 관련된 본질이다. 그는 후자에 속한 것들이 더욱더 경이롭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의 확실성과 영광을 묘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나는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시 나는것이 아니다. 아담의 자손이 있는 반면, 그리스도의 후손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후손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많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넘치는 풍성을 보여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관찰하며 우리 자신을 그것에 철저히 굴복시키는 일이다.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하는 한계선이다.

 

죄에 빠진 인간의 진정한 고통은 그가 언제나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죄는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는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항하여 자신의 지혜로 견주어 보며 난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18:3)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의 작은 마음을 숙이고 말해야 한다.

물론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나의 본성이 그것과 반대되어 있다. 할 일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씀하셨던 분에게 자신을 복종시킨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한 마음이다. 난 그분이 구원 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를 믿는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은 옳고 공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안다. 난 이해할 수 없다”.

 

갈수록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을 불평하는 무서운 죄를 아주 무의식적으로 짓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나 취할 입장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발견된다고 해서 고심하지 말라.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라.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가려고 하지는 말라. 여러분 자신을 그 앞에 낮추라.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18:25, 145:17)라고 말하라.

 

언젠가 우리는 영광 안에서 지금 우리들을 당황케 하는 이런 일들 중 어느 것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들이 성경 교훈 가운데 난제에 부딪히게 될 때 갑자기 세상적인 방법으로 돌아가 철학이 늘 물어왔던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을 볼 때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은혜 아래로 와서 계시의 영역으로 들어온 뒤에 갑자기 이성과 인간적 이해의 영역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여간 서글프지 않다. 이 시점에서 진정한 이해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최종적인 종합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와 성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지시하고 있다.

 

사도의 교훈은 명백하다. 성경에는 보편구원론적인 교훈은 없다. 그것은 옛 사람의 철학적 사고방식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전함에 계속 있도록 하시길 원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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