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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21장 율법의 기능 (2017수정,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7. 13. 14:55

21장 율법의 기능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0-21)

 

20절의 시작이 더구나’(흠정역) 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전까지 말한 것에 첨가된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는 12~13절에서 율법을 언급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제 다시 율법으로 돌아와 논증 과정에서 말해온 것과 율법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에 관한 교훈을 이해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신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 “(더구나)율법이 들어온(가입한) 것은 가입했다는 말의 의미는 율법이~을 따라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이미 들어온 죄를 따라서 들어온 것이다. 율법 자체는 죄와 구원처럼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첨가된 것이요 하나의 특별한 기능을 위해서 때가 차매 들어온 것이다.

율법이 따라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연원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죄와 그 후 모든 사람들의 죄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율법은 이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증가케 하기 위해혹은 늘리기 위한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도로서 의도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그렇다면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란 말은 율법이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죄를 더 많이 짓게 하기 위해서 고의로 들어온 것이라는 의미인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이 죄를 짓게 충동질할 어떤 것도 하지 않으신다. 그런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다.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율법의 임무(목적)는 무엇인가? 율법은 주로 세 가지 방식으로 죄를 증가시킬 목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첫째, 율법은 죄의 지식을 증가시킨다.

자신에 대해 죄를 규정짓기 때문에 율법이 죄 지식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죄를 짓는다. 율법의 임무는 죄를 법전화시켜 주고 죄를 규정지어준다.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4:15)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5:13)

율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죄의 진정한 본질을 그 깊이대로 이해하고 알도록 도와준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우리 안에 양심을 가지고 있어 그릇된 일을 했을 때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죄의 본질에 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들어가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라(7:13) 율법이 나에게 죄의 깊이와 죄의 어리석음, 죄의 참된 본질, 죄의 심히 죄됨을 가르쳐준다. 한 사람도 율법을 떠나서는 야욕, 정욕 바울이 탐심이라고 한 것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율법이 없이는 이것을 알 도리가 없다. 율법이 우리를 가르쳐 우리를 비춰 주었을 때 우리는 우리 모두 위에 폭군 노릇을 하는 이 가공할 죄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율법만이 우리에게 죄가 단지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 성품을 왜곡시켰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율법은 죄의 무시무시한 속임수를 가르쳐 준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7;11) 본질상 사람은 죄의 속임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죄의식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죄는 아주 가볍게 그리고 느슨하게 취급하게 된다. 이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율법을 설교하는 중요성을 알게 한다. 성경은 죄의 깊이와 어리석음 그리고 죄의 심한 속임수를 가르친다. 이를 확실히 알았던 시대에 영적 부흥이 있었다. 사람들이 불의와 죄의 깊이를 깨달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다.

 

둘째, 이상의 첫째 임무 때문에 율법은 죄에 대한 자각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자기의 그릇된 것의 그릇됨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가 더 큰 지식을 배우게 되었을 때이다. 율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더 깊이 깨달아 후회하게 한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와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 자신을 대적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내 죄과가 주 앞에 있사옵나이다 실제로는 간음 살인을 저질렀지만 다윗은 죄의 진정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율법에 관해 무엇인가 알게 되면 역시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선한 도덕적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죄인이며, 죄인으로 살아왔다는 지적에 분개한다.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들은 자기의 선을 하나님 때문에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해 하는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 의해 모욕을 받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선한 도덕적인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피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대한 교훈을 빼버린 설교는 심각하게 잘못돼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하나님과 대면시켜 주어야 한다.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면전으로 데려가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관계, 우리의 태도이다. 이웃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그 다음이다. 그것은 두 번째 계명이다. 그것은 첫째 계명에 뒤따라온다. 행위가 처음 오지 않는다.

이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은 율법 밖에는 없다. 우리의 근본적인 실패를 깨닫게 해주고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스러운가를 알게 한다. 율법은 심히 죄됨과 전적 무능을 깨닫게 한다.(7:9)

셋째, 율법은 실제적으로 죄를 짓게 하고 죄 속으로 밀어 넣게 한다.

죄가 우리들에게 해온 일과 죄가 우리의 본성을 악용해 왔고 그렇게 우리의 심정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는 바로 그 율법이 우리들 안에서 그 일들을 더욱 많이 하도록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7:5,8,11) 저는 도덕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죄에 대한 지식은 어떤 사람이 죄짓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그 죄에 대한 지식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가 더 쉽다. 율법은 의롭고 선하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율법에 무언가 나쁜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즉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라”(7:13)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이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율법 뿐이다.

 

넷째,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3:22-24). 율법은 우리 복되신 주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 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 2, 3백년 전의 위대한 설교자들은 율법작업이라 불렀던 일을 위해서 긴 시간을 소비했다. 오늘날은 율법에 관해 많은 것을 듣지 못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거기에 기인된 것 같다. 우리 설교가 너무 피상적이다. 구원의 영광을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의 깊이에 관해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기 때문이다.

만일 20절의 앞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절의 하반절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스러움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짓된 선지자처럼 되지 말자.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1, 8:11) 죄인에게 예수께 오라는 것으로 충분치 못하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자. 율법의 사역을 떠나서는 은혜의 본질과 능력을 깨달을 수 없다. 그는 먼저 죄가 넘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사도가 말하는 바대로 죄를 더하게 한다. 그 다음에 그의 은혜를 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헤아릴 수 없는 그 은혜를 더욱더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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