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흘러넘치는 은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헤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0-21)
이 두 절 말씀은 1:16에서 이 지점까지 줄곧 말해왔던 모든 것의 요약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한 구원의 방도에 대한 놀라운 요약이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만 머무르지 않고 사도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한다.
“더욱 넘치다” ‘abound’(풍부하다 -흠정역)로 되어 있으나 사도는 그 말에다 ‘super’의 접두사를 붙었다. 사도는 비교급을 사용하지 않고 최상급을 사용했다. 더 좋은 표현인 ‘흘러넘쳤다’(overflowed)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흘러넘치는 개념을 전달해 준다. 마치 홍수가 밀어닥치는 모양을 연상한다. 얼마나 풍성하고 남아돌든지 모든 것을 싸잡아 삼켜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치는 원리는 정확히 죄가 일한 정도에만 대처하여 역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은혜의 쪽에서 상대를 삼켜 버리고 훨씬 위로 초월하여 흘러넘치는 것이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이 진리를 고수해야 하며 명심해 두어야 한다.
‘사망’과 ‘영생’ 은혜는 단지 사망을 없애주는 데서만 끝나지 않고 그것은 생명을 준다. 그것은 대칭을 이루는 것만이 아닌 적극적인 것이다.
“더욱더” 그 차이는 ‘더욱더’란 진술에 나타나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5:9)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10)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이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5:15)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5:17)
그 다음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는 1:16의 서론에서 선언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운 그 넘침의 특징 때문이다. 그는 이 ‘더욱’이란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함으로 위대함의 국면을 나타내가고 있다.
만일 ‘더욱더’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구원관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칭의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구원의 원천이요, 샘이다. 모든 축복은 그로부터 흘러나온다. 또한 같은 정도로 우리는 ‘더욱’과 ‘흘러넘침’의 원리를 붙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법을 진정으로 배우고,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요동케 못할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확신이 있어야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할” 수 있는 소망을 갖는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신칭의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확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실천적이어야 하는 것이기에 성경은 강의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설교되어야 하고 그 메시지는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구원을 기뻐하고 있는가? 그 생각으로 가슴 벅차 있는가? 진리를 체험으로 깨달았는가? 죄에 대항하는 은혜의 진리를 즐거워하고 있는가?
사도의 관심과 열망은 그러하다. 모든 세기의 위대한 성도들은 언제나 이 진리를 붙잡고 있었다.
마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알기까지는 아주 비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시대 이신칭의의 발견은 교회의 찬송까지도 변화시켰다. 그 전에는 굴레에 매여 어떠한 승리나 개선도 없이 비통해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왔을 때 그들은 스스로 노래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자랑하고 즐거워하였다.
존 번연은 자서전의 이름을 “죄인 중 괴수를 향한 넘치는 은혜”라고 하였다. 그는 베드로가 말한 “넉넉한 들어감”(벧후1:11)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이 더욱을 이해하면 풍부함! 넘침! 솟아남! 영원토록 솟아남!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안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노래하기 시작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흑암만을 바라보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노래하게 될 것이다.
참된 구원의 개념, 죄악의 깊이와, 은혜와 자비와 긍휼의 높이를 알게 되는 것은 이 두 면을 함께 고려할 때이다. 사도는 죄가 한 일을 보라고 말한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두 신분 가운데 어느 한 편에 들어 있다. ‘죄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죄의 다스림과 지배를 받고 살든지, 은혜의 왕 노릇을 받고 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해 있다. 죄가 자기에게 해놓은 일, 아니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 한 일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어떤 사람도 은혜의 영광과 위대함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율법에 대한 함당한 설교가 없다면 은혜와 구원에 대한 진정한 개념도 없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안타깝게도 복음적인 교단이라고 하는 곳에서까지도- 가장 크게 결하고 있는 부분이 찬양과 영광이다. 우리는 율법의 작업을 게을리 했고, 성급하게 ‘결신’으로 사람들을 몰아 세우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위안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굉장한 고통을 겪고 난 뒤이다. 하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맛보는 사람은 지옥에 뻗친 그림자를 맛보았던 죄인이다. 그것은 성경을 꿰뚫고 흐르는 원리이다. 눅 7장에서 눈물과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인은, 바리새인인 시몬보다 주님을 훨씬 더 사랑하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여자는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으로 설명하셨다. 바리새인은 은혜의 ‘풍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참 기쁨이 없고 하나님께 진정한 찬양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죄됨을 알지 못하는 데 기인하는 것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였다”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인류는 “죄의 왕 노릇 아래”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 모든 이들의 고통은 우리가 죄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세상은 죄의 ‘통치’ 아래 있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우리는 죄의 통치와 죄의 폭군 밑에 노예가 된 것이다. 사람이 타락한 이래 자유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것이 현대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1-2). 세상 사람들의 비극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죄는 인간의 정욕에 의해 왕 노릇하고, 인간을 정욕과 음란의 피조물로 취급한다. 죄가 왕 노릇할 때 사망도 왕 노릇한다.
한 생명이 죄에 의해 다스림을 받을 때에 비극은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의 절망이여! 살아있는 사망이다. 우리의 심령이 비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할 때 긍휼로 가득 차야 된다.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자유와 구원은 은혜가 개인들의 심령 속에서 왕노릇하기 시작할 때, 은혜가 대 부흥시기에 왕 노릇하기 시작할 때 뿐이다. 물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때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행하신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 선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한 것 뿐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더욱 넘쳐 흐르고’ 우리를 자유케 한 하나님의 은혜의 넉넉함의 성질을 깨달음으로써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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