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23장 은혜의 왕 노릇 (2017수정,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7. 20. 14:28

23장 은혜의 왕 노릇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1)

 

21절은 어떻게 해서 20절의 죄가 더 심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인가를 설명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서 처음부터 이 지점까지의 모든 내용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인 요약이다. 복음의 총체를 하나의 크고 감동적인 서술로 묘사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바울의 목적은 죄가 더해짐에 따라 은혜는 더욱더 넘쳐 그 죄를 삼켜버린다는 것이다. 죄가 인류에게 행한 일이 어떻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행한 일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바울은 죄와 은혜를 의인화시킨다. 강조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저쪽에서 얻어진 것은 이쪽에서도 얻어진다는 것인데, 한 가지 차이는 죄쪽보다 은혜쪽이 휠씬 크다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영역에 속한 더욱더란 것을 강조하는데서 시선을 돌려서는 안 된다.

 

와 같이,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이 ~여기서 복음이 들어온다. 사도는 로마 교인들이 은혜의 왕 노릇의 성격들과 그 왕 노릇의 영광과 은혜의 왕 노릇 안에 있는 더욱더의 요소를 깨닫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에게 강력한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확신을 가지는 유일한 길은 먼저 논증을 파악하고 그 진리를 객관적으로 아는 길이다. 사도는 그의 칭의교리를 강하게 부각시켰고, 만일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는 끝내 안전하며 확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한다. 그 모든 것이 칭의 안에 있다. 그와 같이 그는 한꺼번에 은혜의 영광과 은혜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속에 이 두 요점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 얼마나 장엄한 진술인가! 저는 같은 본문을 되풀이 말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물론 그렇다. 그것은 제가 강단에서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다.

 

- 본문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은혜가 왕 노릇 함의 영광과 승리를 말하고 있다. 사도의 확증은 은혜가 죄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은혜는 죄의 유일한 적수이다. 율법은 죄에 대한 대안도 아니며 그것을 목적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 아래 있든가 은혜 아래있든가 이다.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

구속의 역사는 죄에 대해 은혜의 승리로 끝나는 역사이다. 모든 성경은 이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주로 두 세력 간의 투쟁의 역사이다. 인간이 타락한 순간부터 죄가 왕 노릇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즉시 하나님의 은혜가 그 투쟁 속에 들어온다. 은혜만이 죄를 침노하여 땅을 빼앗기에 넉넉한 오직 유일한 세력이다. 성경을 보면 내내 죄가 승리하려고 하고 은혜가 패퇴한 것 같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늘 다시 살고 승리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사도는 말한다. 한 인간이 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 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고통은 단지 그들이 음주와 도박, 춤 등 나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진정한 비극은 그가 죄의 노예이며, 스스로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과 같이 우리도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게 될 것이며 우리가 그런 긍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죄의 왕 노릇과 죄의 학정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혜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나 애씀이나 행동을 보조하기 위해서 따라다니는 것처럼 들어온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혜란 제공된 무엇이 아니다. 은혜란 인간 이성과 행동과 열심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에 관한 진리가 그러하다면 확신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만일 구원의 문제가 인간에게 달려 있다면 실패밖에는 올 것이 없다. 인류가 죄 있는 것에 관해 어떤 선택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죄는 왕 노릇 하고 그것은 우리를 죄짓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죄가 왕 노릇 하였던 같이은혜도 또한 왕 노릇 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단순히 우리에게 제공된 것이 아니다. 은혜는 역사한다. 죄가 우리의 생명 안에서 하나의 세력이었던 것같이 은혜도 우리의 생명 속에서 한 세력이 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은혜는 역사하되 왕으로 역사한다. 왕으로서 다스린다. 그것은 죄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처럼 은혜도 정확히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인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은혜의 능력이다. 은혜의 능력은 모든 것을 통제하며 어떤 도움도 필요 없다. 사도의 전체 의도는 은혜가 최상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어휘는 원수들을 정복하는 것을 암시해준다. 은혜는 왕 노릇 하되 통치적인 세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우리를 통제하고 통제 아래서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를 지켜주고 견뎌내게 하는 것은 은혜이다. 은혜의 세력은 전능한 힘이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에서 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원의 서정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은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왕 노릇 하고 조종한다. 우리 구원의 단계 단계마다 은혜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통제받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한 행위를 그 자리에 갖다 놓아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어떤 것을 은혜와 함께 놓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벧전1:20 창세로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된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은혜의 왕국이 설립되고 개국된 것은 창세 전이었다는 것이다. 은혜는 시작되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이에 열린 영원한 회의에서 그 권좌를 받은 것이다. 죄의 문제가 야기되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은혜가 즉위하여 권좌를 차지한다는 것은 신적인 결정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언약 즉 구속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은혜의 왕국의 시작이다. 그것은 위대한 취임이었다. 그것은 성삼위 사역의 구분을 포함한다. 아버지는 영광스런 계획, 아들이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자발적 순종, 그것을 죄인들의 필요에 적응시키기 위한 성령의 사역 등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 은혜의 통치의 특징은 무엇인가?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려 함이라그것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의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러므로 의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은혜는 약하고 무기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공의롭고 거룩하고 의로우시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영원토록 그대로 계시면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해낸 일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졌다.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는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오셨다. 인성을 입으셨다. 그는 율법에 복종하셨고 높이셨다. 그리고 일점일획까지 다 이루셨다. 그런 다음 십자가상에서 율법이 죄에 대해 내리는 심판을 받으셨다. 율법은 옹호되었고 높여졌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의 분을 퍼부으셨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정당하시고 의로웠다. 더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에게 전가시켰다. 그것이 은혜가 왕 노릇 하는 방법이다.

 

은혜는 언제나 의 안에서 왕 노릇 한다. 그것은 율법과 공의를 높여주고 만족시켜 주고 완성시켜 준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 은혜와 의가 분리되지 않아야 함은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이 그것들을 분리하는 순간 해괴한 결과를 가져온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4:) 은혜의 보좌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 보좌는 율법이 시행되고 공의가 베풀어지고 권력이 행사되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보좌는 은혜의 보좌이다. 은혜는 보좌에 첨가된 요소이다. 우리는 언제나 두 면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과 확증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가야한다. 이 두 국면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나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은혜의 보좌이며 또한 의의 보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아들을 내어 주실 때 그리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을 때 하나님의 독생자 안에서 하신 일 때문에 그것은 은혜의 보좌이며 역시 의의 보좌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것에 비추어서 생각할 때나 기도할 때나 생활할 때, 이 복된 확신을 가지기를 허락하셨다. -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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