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7 주일설교
본문: 고후 4:7-11
제목: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1. 그리스도인은 ‘이 보배’,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가진 자들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베드로는 우리의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하였다.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보배인가?
앞 절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을 형상으로 보여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이 세상 신, 사탄은 어떻게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쳐주는 복음의 광채가 마음에 비치지 못하게 하여 믿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우리의 믿음도 결심도 능력도 아니다.
오직 어둔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날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을 창조하셨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는 어둠에 빛을 비추셔서 빛과 어둠을 구별하셨다.
마찬가지로 어둠 속,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에게 빛을 비추셔서
어둠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첫날에 창조하신 빛보다 우리 마음에 비춰주신 이 빛이 더 탁월하고 위대하다.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고 새 사람을 입혀 주시고 영생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비쳐 주신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이었다.
그 빛을,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라 하였다.
‘성령의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빛을 말한다.
이 영적 조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 장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이 직접 영혼에 비추어 주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 있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게 하신 분은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영적이고 신적인 빛을 베드로의 영혼에 곧바로 비쳐 주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영적이고 신적인 빛을 우리 마음 가운데 비쳐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아는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가장 귀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흙이요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가시떨기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것은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큰 능력을 가져야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질수록 주의 일에 방해만 될 뿐이고 어지럽게만 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고난으로 연단하신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66:10-12)
불 같은 시련도, 홍수 같은 고난도 통과한 연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풍부한 곳에 들이신다.
은을 단련하는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하신다.
그물에 걸리게도 하시고, 어려운 짐을 허리에 매어 두기도 하시고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도 하신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짓게도 하신다.(시129:3)
도살 당하는 양 같이 여김을 받게도 하신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도 하신다.(시44:22)
어리석고 타락한 교회와 목자들은 사랑과 축복과 형통을 노래하고 자랑한다.
금방 성공하고 부자가 될 것처럼 간증하고 유혹하지만 멸망에 이를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광야의 연단을 거쳐 가나안에 이르게 하셨다.
그 위험하고 광대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 세워진 하나님의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브라함, 욥, 요셉, 다윗의 고난의 세월들과 경험들을 보라,
과연 우리 질그릇들이 연단 없이 그 옛 사람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주시는 축복과 형통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그 다윗도 살인과 간음죄로 몰락하는 것을 보지 않는가?
그러나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하셨다.(롬8:35-36)
고난이 내게 유익이었음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날이 오게 된다.
2. 어떤 고난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답답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우리의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질그릇 안에 심히 큰 능력으로 계시기에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 활로가 보이지 않더라도
답답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
믿지 않는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의 박해도 목적을 달성하시면 끝나게 하시고
그들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신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고 만다.
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이다.
의인은 고난이 많은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시34:19)
왜 이리 고난이 긴가? 하고 한탄이 나올 수 있다.
시편 기자도 탄식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낙심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
내 영혼에게 우리도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다짐해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11)
큰 일을 행하심으로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고 찬송과 영광을 돌릴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도다"(시53:6)
우리가 말씀을 따라 선을 행하다가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신다.(갈6:9)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신다.(고후4:17)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확신을 우리도 읊조리며 본받자.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나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 말씀을 읊조리며 위로와 소망을 회복하곤 한다.
읊조리는 것은, 뜻을 생각하며 감정이나 억양을 넣어 낮은 목소리로 읽거나 외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과, 갈 6:9, 고후 4:17은 나의 묵상 단골 메뉴이다.
3.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11)
이제 우리는 대단원의 막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고난과 연단을 허락하시는 선하신 뜻을 말씀하고 있다.
고난과 연단의 목적은 오직 우리 안에 계신 보배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우리 질그릇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내 질그릇이 깨어지지 않으면, 그 안에 담긴 예수의 생명은 나타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예수의 죽음, 곧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생명은 우리 몸에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질그릇의 혈기와 고집과 원수 탓으로 세월을 보내고 만다.
고난에는 장사가 없고, 하나님을 이길 사람은 없어서,
고난 끝에 결국 두 손 들고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전쟁과 포로생활은 끝이 나고 천국과 평안이 마음 속에 관계 속에 찾아 든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를 위해 죽음에 념겨지면,
죽고 썩어질 육체에 신기하게도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된다.
내가 예수를 위해 죽으면, 내가 예수의 죽음, 십자가를, 짊어지면,
그 기세등등하던 원수도 긴장을 풀고 예수의 생명에 놀라고 머리를 숙인다.
왜, 주님이 주님을 본받아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나를 따르는 자가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수를 굴복시키는 것은 미움이나 칼질이 아니고,
오직 나를 죽음에 넘기우고 예수의 생명으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수는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기 위해 붙여준 도구요 희생 양이다.
다윗을 괴롭히던 사울도 다윗을 세울 때가 되니까 용도 폐기하고 만다.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도, 교만한 나발도, 힘을 과시하던 요압도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기 위해 불러온 앗수르도, 바벨론도,
임무가 끝난 후에는 악행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셨다.
함께 살아야 할 원수는 사명이 끝나면 돌이키고 회심케 해서,
새 사람 만들어 함께 천국을 살게 하신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고난을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다.
바울은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내가 고난으로 인하여 약한 그 때가 곧 강할 때라는 역설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배운 자기의 모든 학술과 용맹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할 때에
하나님은 그 훌륭한 모세를 쓰지 않으셨다.
언제 쓰셨는가? 그 용맹과 힘과 자기 지혜가 다 물빠지듯이 빠지고 무력화 되었을 때,
(그렇게 되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이 걸렸다.) 모세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80세 때,
하나님은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모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고,
화를 당한 연수만큼 40년 동안,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그를 쓰셨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질 때,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질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됨을 믿고 이 말씀을 읊조리며 고난을 통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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