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상권), 8장 영적 의욕의 시금석 (김영희 강의안)

강대식 2017. 9. 28. 12:41

8 장 영적 의욕(desire)의 시금석

 

앞장에서는 6절을 대략적인 의미로 다루었으나 좀 더 실제적인 방법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 복이 팔복의 열쇠 중의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복의 하나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이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은 기독교의 구원의 본질이 제시되어 있고, 본문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음을 가르치는 구원론의 완벽한 진술이다.

 

- 이 복이 특이한 가치를 가지는 까닭은, 이것은 교리를 시험하는 시금석인 동시에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시험하는 실제적인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교리의 시금석으로 구원론에 대한 두 개의 가장 흔한 반대론으로 첫째,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반대하여 말하기를 하지만 이 말은 구원을 너무 쉽게 얻는 것이 되게 한다라고 말한다. 둘째, 그들에게 본문의 의의 성격을 말하면 그들은 반대하기를 구원을 너무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반대론이 같은 사람들 속에서 발견될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있어 의는 어느 정도의 예절 바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는 궁극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표준이다. 절대 완전한 의가 요구된다. 의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는 순간, 이 의는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며, 이것을 전적으로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아야 할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해 주며 구원을 거저 주시는 선물로 주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에 그들은 의로운 것이다.

 

실제생활의 시금석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계시해 주는 진술들의 하나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배부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채움을 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채움 받기를 소망하고 있다. 우리는 채움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채움을 누리고 있다.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문제도 역시 해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그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어 주셨음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고 역사하셔서 그리스도를 점점 닮게 하시는 강한 능력을 안다. 그러므로 점이나 주름이나 허물 같은 것이 없는 저 궁극적인 완성의 최종상태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채움의 의미이다.


우리는 채워졌는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체험을 즐기고 있는가? 주 안에서 항상 즐거워하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시금석들이다. 우리가 참으로 이런 것들을 즐기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실의 단 한 가지 원인은 우리가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채워질 것이다.

 

-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그 해답을 찾는 방법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채워진 위대하고 영광스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라.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를 장식해온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를 읽어라. 그들은 이 충만함을 누린 사람들이며 그들의 거룩한 생애는 이 채워짐을 보여주는 삶이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를 아는 시금석

첫째, 자기 의는 아무것도 아니며 누더기이다. 바울은 이것들을 모두 으로 썩고 있는 쓰레기로 여겼 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또는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어떤 것으로 만족감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을 변호하기 일쑤라면 이것은 여전히 자신의 의에 매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리고 목마르는 것은 죤 다아비의 표현대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굶어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는 것임을 안다. 이것이 첫 단계이다.

 

둘째, 동시에 우리 자신의 구원의 필요와 구주가 필요함을 깊이 인식함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성도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의욕을 우리들 속에 가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들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는가? 경고하건데 우리는 그들과 같이 되려는 의욕은 없이 그들이 누린 축복만을 즐기려 할지 모른다. 발람처럼 의인처럼 죽고 싶으나 의인과 같이 살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인처럼 죽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의인처럼 살고 싶어해야 한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그것이 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이다.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의와 반대되는 모든 일을 피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수는 없으나 시궁창 같은 삶을 중단할 수는 있다. 이것은 주리고 목마르는 것의 일부가 된다.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나쁘고 해로운 것들을 피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의욕을 마비시키거나 무디게 하는 것들을 피할 것이다. 이 의욕의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간식을 먹으면 식욕을 무디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 자체만으로는 정죄할 수 없는 것들로 너무 시간을 많이 보낸다면 영적인 일들을 점점 적게 원하게 된다.

 

셋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우리가 이 의를 열심히 상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생각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들 앞에 있도록 우리의 생활을 훈련하며 이 의를 날마다 바라볼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시간을 내게 될 것이며, 이 의를 바라보는 데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항상 그것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소경 바디메오는 자기 스스로 고칠 수 없었지만 그는 가서 시력을 얻을 기회를 가졌다. 성경을 연구하고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내라. 성경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쓰라.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으라. 그런 다음 이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분께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는다면 그들은 그날의 가장 좋은 시간을 4-5시간을 하나님께 바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어디서나 의만을 찾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거의 미친 사람같이 된다. 그들은 바디메오나 귀찮게 조르는 과부와 같다. 그들은 주의 사자와 씨름을 한 야곱과 같다. 여러분이 이 의를 참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혼신의 힘으로 이 의를 찾을 때뿐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 이것이 생애 최대의 의욕이 되고 있는가? 가장 큰 소원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를 못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절망과 참화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있다. 우리를 하늘에 가서 그와 함께 그의 거룩한 존전에서 영원을 보내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의뿐이다. 이 의는 이생과 내생에서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삶은 얼마나 고귀한 삶이며, 훌륭한 성품인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