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 죄의 속박
“눈은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2-24)
- 19-24절에는 간접적인 가르침, 암시적인 가르침이 있다. 주님은 이 실제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시면서 우리에게 경고하심에는 가장 중요한 교리를 부수적으로 다루고 계신다. 이런 일들에 관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그처럼 경고할 필요를 느끼게 된 이유는 모두 죄와 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가르침을 풀이하시면서 명령을 주시고, 그 이유를 진술하시며, 이것에 곁들여 죄와 죄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 첫째, 죄는 사람의 정상적인 균형과 정상적 기능에 어지럽고 혼란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육신, 지성,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이며, 그 다음으로 혼이요, 그 다음이 육신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부분이 지성 곧 생각하고 추리하는 능력임은 의심할 바 없다. 특히 최상의 감각인 영적 감각으로 사고한다는 점이다. 사물은 지성에 의해 분석되어 진다. 그런 다음 감정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감수성이 온다. 그런 다음 의지라고 하는 기능, 곧 우리가 이해한 결과로 소원하는 일들을 실천에 옮기는 능력이 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런 모양으로 만드셨다. 사람은 이해하도록, 또 그 이해한 것의 지배를 받고 조정 받도록 되어 있었다.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좋고 가장 참된 것을 이해하는 것을 사랑해야 했고 그런 다음 그 모든 것을 실천하고 실행해야 했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로 그 질서와 균형이 어지러워진 것이다. 주님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먼저 마음을 ‘너희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는 것이다’ 다음 지성을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발을 것이요,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그 다음 의지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마음이 첫째요, 지성이 둘째요, 의지는 세 번째이다.
사람의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이제는 그의 지성과 이해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의 욕망과 감정과 정욕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니라” 사람은 어둠을 더 좋아한다. 이것은 죄의 결과이다. 사람은 그의 지성의, 그의 이해력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표현한대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다. 불신자는 이런 소리를 한 다음 자기 마음에서 하고 싶은 말을 정당화시킬 이유를 찾으려 애를 쓴다.
사람은 자기를 엄청 큰 지성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과학자들은 가장 편견이 많은 사람일 때가 많다. 그들은 자기의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책에서 어떤 관념은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뒤에 가서 그 관념을 하나의 사실로 언급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마음의 작용이지 지성의 작용이 아니다. 이것은 그 순서와 균형을 뒤엎어 버리고 최고 최상의 선물이 보다 열등한 선물에 종속된 것이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둘째, 죄의 작용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다. 지성이 제어를 받지 않는다면 필연코 일종의 맹목이 따르게 마련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3-4) 죄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완전히 분명한 일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보물 문제를 예를 들면, 죽을 때 우리는 돈을 가지고 갈 수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진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반대의 가정 아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뒤에 남기고 떠나야만 할 이것들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시킬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지성을 눈멀게 하여 명백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죄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죄는 우리 눈을 어둡게 하여 사물의 우열의 가치를 보지 못하게 한다.
시간과 영원을 예로 들면, 우리는 여기 시간의 피조물이지만 영원으로 가게 되어 있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영원은 끝없고 완전무결하다. 우리가 소유하고 근심하고 허둥거리는 모든 것은 시간이라는 매우 짧은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닌가? 영원하고 끝없는 것들이 있음을 알지만 우리가 이것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죄의 결과이다.
어둠과 빛의 예를 들면, 어두움에 속한 행위나 어두움과 밤의 장막 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아는 터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어두움이 없으며 밤도 없을 것이다. 거기는 온통 빛이요, 영광이다. 그러나 빛과 어두움의 우열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에 우리는 얼마나 둔한가?
사람과 하나님의 등급을 생각해 보라. 기독교를 떠난 생활은 사람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하나님은 잊혀지고 무시당하고 있다. 이것이 죄의 영향을 받은 온 인류의 삶의 특징인 것이다. 우리의 지성은 우열상의 가치에 눈이 멀어 있다. 세상의 부귀와 세상 재물과 지위, 신분을 탐하며, 하나님의 양자 곧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보다 이 모든 것들을 우선 시키고 있는 것이다. 눈 앞에 닥친 것에 너무 열중해 있다.
- 셋째, 죄와 악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이 서로 정반대되는 것을 섞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람은 섞어 질 수 없는 것들을 섞으려고 항상 애를 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자기가 그 일에 성공할 수 있다고 자기를 설득한다는 사실이다. 정반대되는 것은 역시 정반대되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은 섞어 볼 도리가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섞을 수 없다. 우리에게 맑은 머리로 명확하게 생각할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둘을 사실대로 인정해야 한다. 죄에 빠진 인간은 자기의 가상된 영리함으로, 두 가지를 하나로 보아 버리고 이 이중의 시력 곧 난시 상태를 자랑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주님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정반대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항상 절대적인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든지 저것이든지 이다. 눈이 성하든지 나쁘든지, 하나님이든지 재물이든지 이다.
이것이 교회에서도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콘스탄틴 황제시대 이후 교회의 파멸이 되어 온 것은 교회생활에서의 이 변함없는 타협이다. 세상과 교회와의 구분을 잃으면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부흥들이 있었다. 이 진리를 보고 타협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이 교회의 유일한 소망이다. 우리는 교회를 세속적 방법으로 유지하려 애써왔다. 불가능한 것을 계속 시도하는 한 교회는 계속 이 모양일 것이다. 우리가 축복을 받고 부흥을 보기 시작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영적 백성이며, 영의 영역 안에 살고 있음을 인정할 때이다. 교회는 영적이요, 교회의 영적 생활은 순전히 영적 양태로 양육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 넷째, 죄의 또 다른 결과는 사람이 섬김을 받아야 할 것들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섭게 비극적인 일이다. 땅의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의 신이 되어 이것들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들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 이것들은 곧 음식, 의복, 가족, 친구, 기타 모든 것들은 우리로 즐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것들은 거의가 하나님의 친절하심과 은혜로우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이것들을 주셨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노예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욕구을 주셨다. 굶주림, 갈증, 성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것들의 지배를 받는 순간 그 노예가 되어 버린다. 사람을 섬기도록 작정되었던 것들이 그의 주인이 된 것이다. 죄야말로 얼마나 가공스럽고 몸서리쳐지는 존재인가!
- 다섯째, 죄의 마지막 결과는 사람을 전적으로 파멸시킨다는 것이다. 마귀는 오직 한 가지 목적,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의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못쓰게 하는 일이다. 마귀는 사람과 세상을 파멸시키는 일에 특별히 몰두한다는 것이다.
죄가 어떻게 사람을 파멸시키는가? 죄는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떤 것들을 쌓으며 한 평생을 보내고 나서 끝에 가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한다. 벌거벗은 영혼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파멸이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을 보라. 이것은 이해와 상식의 문제이다. 죄는 끝에 가서 사람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아니하는 최종적 파멸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 사람은 그의 지성과 이해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는 종교를 비웃고 세속적 생활관을 탄핵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는 현재를 위해 살며 합리적인 생활관이라 믿고 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만족해하며 그의 지성의 인도를 받는다고 확신해 버린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빛이 어둡게 된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끝에 가서야 자기가 신뢰하던 것들이 어두움이며 자기가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을 볼 것이다. 그 속에 있는 빛은 어두움이었다.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는가? 이 보다 더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걸어놨던 그 못이 여러분을 거꾸러뜨린 바로 그것임을 발견하는 일이다. 홍포를 입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지성을 믿지 말라. 그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눈물 짜는, 달콤하고 감상적인 물건으로, 민중의 아편으로, 순전히 감정적이며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 비극적인 환각은 없다. 진리는 지성으로 받아야 한다. 성령은 마음을 맑게 하실 능력이 있다. 이것이 회심이다. 지성이 악과 어두움과 편벽에서 구출 받은 것이다. 지성은 진리를 보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사랑하며 원한다.
죄로 파멸 당한 비참한 인생은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발견할 뿐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으며 진노 아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살고 있지 않다면, 이것이 여러분의 운명이 될 것이다. 이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로 가서 여러분이 세상 것들을 섬겨왔으며 여러분을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 온 것을 고백하라. 그리고 여러분을 그분의 손에 기탄없이 무조건 놓으라. 무엇보다도 지성을 밝혀주고, 이해력을 맑게 하고, 성한 눈으로 만드시어 우리로 진리, 곧 죄에 관한 진리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 오직 한 길을 볼 수 있게 하는 성령으로 가득 채워주시도록 구하라.
'성경도 아카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스펄전 목회/목사론(8) (0) | 2018.03.03 |
---|---|
[스크랩]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3장 하나님과 인간, 신개념이 정반대이다 (강의안) (0) | 2018.02.22 |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8장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김영희강의안) (0) | 2018.02.21 |
[스크랩] 스펄전 목회/목사론(7) (0) | 2018.02.21 |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7장 세상의 보물과 천국의 보물 (김옇의강의안) (0) | 2018.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