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영의 생각’의 증거
영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 생각들이 거룩함을 입은 총명과 정서의 내면의 샘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생각들이 우리 속에서 흘러 넘쳐 우리 ‘마음이 그 생각들로 가득 차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이러한 심령의 상태가 맺는 열매를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의 열매의 본질은 먼저 ‘생명’의 차원에서 숙고되어야 합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첫 번째 열매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심령의 상태가 가져오는 두 번째 효력인 ‘평안’은 우리 마음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심령 속에 있는 생명의 원리가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작용하는지에 따라 평안의 정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할 뿐”(창6:5)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등지고, 부패한 본성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모든 인생들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확연한 죄를 범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본질의 부패를 있기 때문에 한결같은 악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할 뿐입니다.
부패한 본성에 거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상상하는 악한 소재를 부단하게 찾아 다닙니다. 그 상상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양적 형태가 어떻게 드러나든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쌓아 놓은 것이란 한결같이 모두 악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들의 악함과 허무함이 그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주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패한 본성에 변화가 일어날 수만 있다면 이는 정말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이 부어오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 치료를 통해 그 붓기가 온전히 가라앉았다고 해도, 그 즉시 그가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 속에 여전히 질병의 씨앗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혈압도 안정되고, 체온도 정상을 찾으면서 좋은 상태를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의 몸의 근본적인 건강의 상태가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역시 그러합니다. 어떤 특정한 죄는 치유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원한 죽음의 씨앗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의 씨앗이 언제 즉각적인 효력을 드러낼지 아무도 모릅니다.
부패한 본성의 근원적 상태가 변화된다면 그는 영적으로 그 본질이 회복되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부패한 상태와 조건에서 변이(變異)가 일어나고 있다면, 그런 현상은 마음의 본성이 향하는 성향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큰 증거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의 허다함’처럼 헤아리기 곤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생각들은 가을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과도 같습니다. 만약 그 허다한 마음의 모든 생각들의 파편과 상념들이 악하다면 그 자체로 가공할 공포와 혼돈의 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합니다. 영혼의 본질적 변화 없이는 평안도 영생도 영광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마음과 생각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상상들을 만들어냅니다. 도도한 강물이 쉬지 않고 바다를 향해 흘러들어 가듯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생각들도 항상 그렇습니다. 지옥을 향해 치달아 가는 일을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그러한 강물을 막고 그 물줄기를 돌리려고 하는 시도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적어도 그런 시도를 하는 동안만큼은 그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도도한 강물줄기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을 결국 삽시간에 무너뜨립니다.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그 물이 흘러갈 다른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센 물줄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생각의 도도한 줄기는 너무나 거세어 멈추게 하려는 시도 따위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샘 근원에 소금을 넣는 일입니다. 여리고의 쓴 물을 달게 하기 위해 엘리사가 소금을 넣었던 것처럼 먼저 사람의 마음의 샘 근원에 ‘은혜’가 녹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생각의 줄기에 새로운 통로를 터주기 전에 먼저 샘 근원에 은혜가 공급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생각의 본질적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변화된 본질이 가지는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대상들을 향하도록 생각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솟아나 흘러넘치는 우리의 생각들이 원천적으로 영적인 생각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는 충고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8-19).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거룩하고 영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사도의 권고가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신령한 의무를 감당할 때 마음이 온통 ‘영의 생각들’로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의 마음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흘러넘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19편의 다윗을 보십시오. 영적인 생각이 넘쳐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사모했는지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믿음과 사랑과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들만큼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한 생각들과 묵상에 있어서 그들과 같은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옛날 거룩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부단히도 사모하면서 묵상하였습니다. 온종일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였고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행사를 찬미하였습니다. 그들의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 중 ‘영의 생각’이 차지하는 비율과 ‘육신의 생각’이 차지하는 비율이 서로 어떠한지 관찰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입으로 고백한 것과 실상이 일치합니까? 여러분의 가장 주된 관심이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에 있다고 고백하면서 실상이 그렇지 않다면 그 고백처럼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 모순은 전적으로 세상적인 일 가운데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사람의 생각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모하는 곳에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신앙을 고백한 바대로라면 여러분의 정서 대부분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는 소원과 생각의 방향이 전적으로 영적인 것들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지는 생각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떤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고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걸어갑니다. 물론 그러한 일은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합당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람들의 생각이 세상에 집중되고 있음을 정당화할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어떠합니까? 그들 대부분은 오직 자기와 관련된 것들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영적인 것들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들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사람들이 감당하는 생업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들에 관해서 ‘많이, 자주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한 고백대로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더 더욱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종일 세상과 관련된 자신들의 일에 육신과 마음의 힘을 소진시키며 살아갑니다.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미미한 관심만을 가지면서 말입니다.
누군가가 정말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상 하고 있는 생각이 그 문제와는 소소한 일들에 관한 것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소한 일들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목적을 위해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습관처럼 우리의 가야 할 종착지가 영광스러운 하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고 있는 실제 생각들 대부분이 장차 사라져 버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무엇으로 ‘우리 마음이 진정 하늘을 향하고 있다’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구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든 일들은 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어떤 염려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염려와 걱정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한 불안감을 가진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돌보심이나 섭리를 부정하고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마땅한 생각 대신 이 세상 일로 염려하고 불안하여 ‘심령을 부단히 쏟는 일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것이 여러분의 삶의 가장 주도적인 일이 되게 하십시오. 그 비중에 있어서 영적인 생각들이 세상적인 것들을 월등히 압도하도록 하십시오. 이 법칙으로 매일 여러분 자신을 검증하십시오. 영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땅에 관한 생각과 비교하여 얼마나 컸는지를 스스로 묻고 점검해 보십시오. 만약 영적인 것들을 더 생각하는 일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여러분은 아직 ‘생명과 평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다른 생각들’이 영적인 의무들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은 허다합니다. 세속적인 관심거리들이 우리의 영적인 일들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례자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고 방황하게 하여 하늘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버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허망한 생각 자체를 죄악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생각의 대상들 자체가 죄악적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위험한 실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어리석음이 허망한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허망함이 부패한 자신의 근원으로 말미암아 상태에서 더러워진 양심의 상태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생각들’이 있는 곳마다 죄가 있기 마련입니다(렘4:14).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들 가운데 그 내면에 ‘교만과 육신의 정욕과 세상 자랑과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허망한 야심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들’이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러한 허망하고 무익한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세상의 모든 생각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바로 이해하였다면, 여러분이 하는 영적인 생각들이 그 허망하고 무익한 생각들에 비하여 어느 정도의 비율로 앞서는지를 검증해 보십시오. 세상의 일들에 대한 허망한 생각을 죽이고 거룩한 묵상에 대한 생각들을 더 살리고자 노력하십시오. 세상에서 생업을 영위하는 일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생각들이 ‘영적인 것들에 거룩한 생각들’을 앞서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또 우리 자신에게 ‘영적인 생각들이 얼마나 자주 드느냐’의 문제도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다 보면 모든 일상에서 물러나 생각 속에 깊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이라면 그런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침상에서 일어나는 시간부터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행하고 자리에 눕기까지의 시간 중 어느 때이든지 이를 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우리 속에서 충만하다면 이러한 시간을 가지는 것을 매우 마땅하게 여길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우리에겐 영적인 것들을 위해 일상에서 벗어난 ‘정해진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마땅히 만들어야 할 시간을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이유에 빼앗겨버린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영적인 일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거의 모든 이들은 자기들이 주야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분명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당하고 있는 거룩한 의무가 영적인 것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적인 일들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역시 그러한 이들을 전적으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묵상에 합당한 때를 영적이지 못한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매 시간의 분초를 가장 어리석게 활용하는 자일 것입니다. 자기들의 영혼에 생명과 평안이 달려 있는 그 보배로운 순간들을 세상의 고민과 슬픔으로 인한 혼란의 시간들로 바꿔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처럼 보배로운 시간에 허망하고 악한 생각이 늘 찾아 들곤 하는 것은 영적으로 생각하려고 애를 쓰는 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양심의 고통이 됩니다.
우리가 여가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미2:1). 이 말씀은 밤에 잠자리에 누워 꾀했던 악한 상상들을 이루기 위해 다음 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기회를 노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악을 행하기 위해 절호의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나, 자기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활용해야할 그 시간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이 본질적으로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 영적으로 생각하는 이 은혜를 계속 누리길 원하거나 우리 자신 속에 그에 대한 어떤 증거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영적인 생각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태함과 시험과, 우리 삶의 일상적인 여러 가지의 지엽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본질상 모든 영적 의무에 거부감을 가지도록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상태라면 설령 영적인 의무를 감당해낸다고 할지라도 마지못해 억지로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영적인 의무에 참여하느라 어떤 세상적인 이익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영적인 의무를 악한 것으로 간주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영혼’, 곧 ‘진정으로 영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영혼’은 정반대입니다. 세상의 일로 인해 자신이 영적인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 매우 애통히 여깁니다. 또 다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적었던가! 시간을 헛되이 보낸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우리가 진정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영적인 생각들을 위하여 자신들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예의 주시하며 신중하게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기회와 때를 놓쳐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상실한다면 자신의 게으름에 대하여 애통해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시시각각 주어지는 영적인 기회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한 일이 자주 반복됨으로 우리의 양심이 무뎌져 결국 마음 전체가 냉랭해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신자로서 ‘시간을 아무렇게나 보내는 것’은 정말 크게 경계할 일입니다. 열매 없는 허망함을 따라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거리를 ‘주제넘게’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넘어지게 하는 그 의미 없는 대화가 이루어질 그 시간을 거룩한 묵상의 분량으로 사용하십시오. 선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시간을 허송치 않게 하시고 영혼을 위해 보다 더 주의 깊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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