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하늘의 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요3:9)
-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3:9) 니고데모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3:19)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3:8)이 주어져 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엡3:19)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니고데모를 넘어뜨린 바로 이 방해물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충만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최고의 방해물은 지적인 교만과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에서 시종일관 가장 큰 원수 노릇을 한다.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문제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인간의 공로와 능력과 이해로 희귀하려는 경향이 늘 나타나는 것이다.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능력이나 기질이나 힘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우리의 어려움이 여기 있다. ①인간은 천성적으로 항상 이해하길 원한다. 사실상 그것이 원죄였다. 인간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②그 다음 단계로 이해할 수 없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본주의자를 비롯한 비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일관성이 없다. 그들은 다 이해하지 못함에도 기꺼이 사용하는 것이 많다. ③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 이해 수준에 맞추어 제한하는 그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큰 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권위를 밀어내고, 계시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며, 자기가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진리만 진리라고 말하는 자는 바로 이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대신 인간의 이해와 철학이 권위를 갖는다. 복음의 영광이 제한되고 격하되며 협소해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물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은 경험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위험에 빠져있다. 개중에는 성령과 그 능력을 두려워하여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경의 가르침까지 제한하려 든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폭로하고 규탄하는 큰 위험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주신 메시지의 핵심이며, 다른 여러 곳에서도 동일한 위험을 경고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바울은 지적인 거인이었음에도 내내 같은 점을 지적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6-27)
-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0-12) 이 어리석음에 인간의 비극이 있고 인간의 화가 있다. 이 어리석음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처음 불순종하여 타락한 결과 빚어진 혼돈과 반복에 불과하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이 말은 세상의 삶과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복음의 작용이나 가시적인 일조차 사실상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땅의 일’ -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성도들의 생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과 그들이 행한 경이로운 일)을 오늘날 아무리 지혜로운 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 20세기 사람들은 이것을 심리학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부적절한 접근법이다!
참그리스도인은 모든 비그리스도인의 문젯거리이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 안에 들어왔는데 전과 똑같을 수는 없다. 차이가 생기고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달라진 모습은 보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런 땅의 일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비극은 이런 태도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까지 끌고 들어오기 쉽다는 것이다. 완전히 이해되지 않으면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의 일’ - 첫째, 삼위로 계시되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최대한 생각해 보라.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단순히 친절하고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 명백한 죄인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되거나, 정치 현안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부 땅의 일이다. 기독교의 내용, 실제 토대, 실제 핵심은 하늘의 일에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알려 주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아직도 이런 일을 머리로 이해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자기 자신이나 주변 현상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유한하고 왜소한 인간으로서 감히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측량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하늘의 일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멀리서 살짝 보았을 뿐인데, 그는 큰 충격을 받고 흙바닥 위에 엎드렸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기독교는 모든 설명과 통제가 가능하도록 작은 꾸러미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후12:1-5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하늘의 일을 살짝 엿보는 경험이다. 계4:1-8을 보라. 기독교는 하늘의 일을 아는 것,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를 깨닫는 것이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들으라. 작고 하찮은 인간의 이해를 내려놓으라. 땅의 일도 이해할 수 없는데 하늘의 일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구속의 전체적인 설계와 계획과 목적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인간뿐 아니라 천사도 구속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해가 안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난 이해되지 않는 건 믿지 않겠어”라고 한다.
오, 어리석은 인간이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영원토록 애쓰는 것이 곧 지옥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영원한 영광의 모든 영광과 축복을 스스로 차단하는 태도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이 하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늘에 올라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올라가 본 자는 아무도 없다.
자신의 작은 두뇌를 의지하는 자는 비참해지게 되어 있다. 여러분은 거듭나야 한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이 일을 깨달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상에 오셨다. 혹시 이런 일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하늘의 일이다.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이다. 오늘날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경험한다. 이 구원은 인간적이거나 세상적인 일이 아니다. 신적인 일이다. 참으로 살아 있는 생명, 인간의 이해뿐 아니라 상상까지 뛰어넘는 생명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심히 무지하고 무력하고 소망 없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말씀하시는 이분께 복종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하늘에 올라갈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이분만 철저히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분은 하늘에서 친히 오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얼굴과 눈을 직접 들여다보신 분이다. 우리를 세상에서 이끌어 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다. 거듭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분은 이 일을 가능케 하려고 오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호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제 질문은 여러분은 하늘의 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늘과 교통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늘의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은혜의 삶, 성령 안에 있는 삶의 가능성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교회의 위치 전체가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통해 죄와 악의 무지와 어둠 속에서 죽어 가고 있는 멸망의 무리에게로 퍼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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