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성부와 성자를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
- 우리는 크고 넓고 분명한 시금석들로부터 다룬 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긴요한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추는 측면에서 범위를 좁혀 나가는 중이다.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신앙의 큰 특징은 외적이지 않고 내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면도 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특징짓는 표지는 항상 내적인 생명과 내적인 성장으로 나타난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3:16) 거듭난 자는 자신에게 속사람이 있음을 인식한다. 이 내면의 생명, 내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새 생명을 받지 못한 자의 전적인 비극이다. 몸은 이생에 사는 동안 속사람이 잠시 머무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이 아는 유일한 삶은 육신의 삶, 오직 인간관계로만 이루어지는 삶, 인간관계에만 의존하는 삶이다. 재미와 쾌락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인간관계에서 찾는다.
- 새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심을 갖는다. 도덕처럼 종교도 항상 외적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은 항상 내적이다. 속사람의 큰 특징은, 종교적 의무나 신학이나 축복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을 열망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벧전3:18)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이 땅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거룩하신 분인 동시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시는 분이다.(사57:15)
신학자들이 지적으로만 접근할 때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확실히 죽은 하나님이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과 정서와 온 존재를 다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외쳤다.(시42:2) 그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었다. 철학자요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큰 체험을 하고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창32장에 나오는 야곱의 브니엘 체험도 보라 그는 자신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났음을 알고 그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의 최고의 체험이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 번 체험하고 나면 다른 증거가 굳이 필요치 않다.
여러분은 욥처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까!”라고 외쳐 보았는가? 주일 아침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온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인가? 하나님을 찾고 싶은 열망 때문에 오는 것인가? 거듭난 자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야곱은 심각한 걱정거리가 많았지만 이 분을 만나는 순간 소유나 재산을 비롯한 모든 걱정거리를 잊어버렸다. 이처럼 하나님과 만나는 일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 되는 것이야말로 항상 새 생명의 시금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이 체험한 일이다.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만이 체험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이상을 보거나 하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닌데 생생하게 체험한다. 이런 열망에 대해 알거나 이런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성령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절대적 증거라는 것이다.
- 속사람은 또한 성삼위 하나님께 점점 더 관심을 갖는다.
성자께 관심이 있는가? 우리는 구원의 혜택(용서와 죄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있다. 그 정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라는 분께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지 검증하는 시금석이 된다.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으신 분이다. 이것이 새 생명의 징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복음메시지를 참으로 믿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사에 비추어 생각하더라도 누군가 나에게 친절을 베푼 이가 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진다. 복되신 성자의 영광에 관심을 갖게 된다.
육에 속한 자는 신학적 사안이나 철학적 논쟁의 주제에는 관심을 보여도 인격적인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성육신에 대해 살펴보고 묵상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무엇보다 놀랍고 기이한 일이다. 그는 복되신 분의 생애와 사역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복음서를 읽어간다. 내 가족이 아닌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글을 읽는 태도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친밀한 사람에 대한 글을 읽는 태도는 완전히 다른 법이다.
또한 거듭난 사람은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며 묵상한다. 사도 바울을 보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여기서 구분해야 할 점은 주님의 죽음에 대한 이론을 믿는 것과 그의 죽음을 분명한 사실로 믿고 자랑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지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있지만 자랑하지는 않는다. 굳이 교회에 십자가를 걸지 않아도 된다. 마음속에 이미 예수의 십자가가 있어 내적으로 십자가를 보고 있다. 십자가가 자신의 전부가 되어 있다.
거듭난 자는 이처럼 주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신 일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 부활의 영광 가운데 계신 일도 생각한다. 여러분은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고양되어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때로 우리는 이런 일들을 믿기 위해 애를 쓰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일은 사실이라는 것,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러므로 이 일이 꼭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문제 속에서 믿음을 일으켜 보고자 애쓰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라. 이것은 설득의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되고,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기뻐하면 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마28:18) 받으셨다고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면 된다.
실제로 이것이 히브리서의 중대한 주장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서신을 쓴 이유는, 이 편지를 받을 자들이 박해 속에 힘든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우려 한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을 분명히 모르는 데서 모든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라. 원수들과 어려움과 문제만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이 모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위에 계신 대제사장을 묵상하는 것, 그가 모든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아는 것이야말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은 자의 표지이다. 인격적인 측면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이야말로 새 생명의 징표이다.
바울은 이 복된 이름, 이 복된 분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져 자신을 주체치 못하고 찬양과 경배의 말을 쏟아낸다. 그가 늘 하는 말은 ‘내가 아는 일은 너희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본질적인 핵심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제주와 상관없는 영역에 속한 일이다. 전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심으신 신성한 생명의 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씨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사도들처럼 될 수 있다.
각기 다른 시대에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 성자의 영광을 깊이 새기며 그가 하신 일- 특히 십자가에서 하신 일-의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상고했던 사람들, 이른바 예수의 흔적을 점점 더 많이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교회사에서 읽을 수 있다. 개중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손에 난 못 자국을 깊이 묵상하다가 자신들의 손에도 못 자국이 나타난 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말하고 싶은 점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새 생명이 자라고 커지고 성숙할수록 예수를 아는 인격적인 지식을 열망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고난에 참여하는 수준까지 예수를 실제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정도까지 그와 연합된다.(빌3:10) 실제로 그리스도와 일치되면 그 고난까지 나누게 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가? 그에게서 온전한 만족을 얻고 있는가?
성부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성부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하는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1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심을 안다. 관념이나 단순한 ‘존재 기반’이나 심지어 ‘사랑’이 아님을 안다. 그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을 일종의 축복 대리점이나 어려울 때만 찾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알고 싶어 한다. 하나님과 그의 무한한 속성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지름길로 가길 원한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속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축복과 체험과 활동에만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과연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그의 큰 목적에 대해 묵상하고 있는가? 사도들이 어떻게 이 주제를 다루고 상기하며 경탄하는지 보라.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 같은 위대한 찬송의 모든 단어와 구절들을 소중히 여겨 상고하고 묵상하며 노래함으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자신도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오, 위에 계신 영화로우신 왕께 경배하라.
오, 그의 능력과 사랑에 감사하며 노래하라.
오, 헤아릴 수 없는 힘이시여!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시여!
천사는 위에서 즐겁게 주를 예배하고
비천한 우리 피조물은 미약한 노래나마 진심으로 주를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로버트 그랜트 -
오 여러분, 제가 묻고 싶은 점은 이것이다. 여러분은 즐겁게 주를 찬양하는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가사에 가슴이 뛰느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새 생명의 시금석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더 이상 차갑고 지적인 관념이 아니다. 나와 동떨어진 율법적인 신, 도덕에만 신경을 쓰는 신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다. 성령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 안에 들어오면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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