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존 로빈슨, `신에게 솔직히` 3장 우리 존재의 기반, 신은 존재가 아니라 깊이다

강대식 2018. 7. 13. 16:48

3.  우리 존재의 기반

 

삶의 중심에 있는 깊이

 

틸리히의 말이다.

깊은은 이를 영적으로 사용할 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즉 그것은 얕은의 반대를 의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높은의 반대를 의미한다. 진리는 깊은 것이고, 얕은 것이 아니다. 고난은 깊이이지, 높이가 아니다. 진리의 빛과 고난의 암흑은 둘 다 깊은 것이다. 신에게는 일종의 깊이가 있다. 신을 향하여 외치는 시편 작가에게도 깊이가 있다.

 

틸리히가 깊이라는 말로 신을 표현할 때 또 하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 우리가 무조건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깊이, 사회생활의 근거와 목적, 도덕적 사회적 활동에서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들이다.

 

본회퍼의 말에 따르면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에서 그 피안에 있다”. 즉 그는 삶의 한계가 아니라 그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실재의 깊이이다. 그것도 키엘 케고르가 적절히 표현한 대로 고독한 자가 고독한 자에게 도피함으로써가 아니라, ‘실존에 더 깊이 잠김으로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낱말은 우리의 존재 전체의 궁극적인 깊이, 우리의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신에 관한 전통적 지식 전체를-그리고 필요하다면 신이라는 말 바로 그것까지도 잊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이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실재에 접하게 된다는 것, 존재자체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부버의 말과 같이 모든 하나 하나의 는 영원한 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이며 이것은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놓여 있는 것이지, 포이에르바하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이 합쳐서-‘의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주장한 바와 같이 신은 그 한가운데서 그 피안에 있으며,” “초월적인 것은 무한히 먼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는 오직 유한한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경우나 자연의 질서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막론하고-안에서 그 와 더불어 또 그 밑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7-68

 

우리 존재의 기반과 근원과 목표로서의 신은 우리 생활의 천박하고 죄스러운 표면으로부터 무한한 거리와 깊이에 떨어져 있는 동시에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깝다고 하는 역설적인 논법으로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초월과 내재라는 전통적 범주는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76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하심과 무소부재성을, 현대과학의 성과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기준으로 삼아, 포기하고, 신을 인간이 구제해 주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신은 겨우 인간 내면의 깊이와 초월성 속에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리고 종말을 고할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그들에겐 이미 죽은 존재이다. 이 사상의 발원은 아담을 범죄하게 한 옛뱀, 사탄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초대교회 시대의 영지주의로 이어지고 이 영지주의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경건주의 흐름으로, 하나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이단적 가르침은 기독교 하나님을 부인하는 휴메니즘 지식의 세계로, 경건주의는 신비주의 전통의 흐름을 따르며 기독교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낳고 근래에 와서는 뉴에이지와 관상기도 등 신비주의를 낳고 있다. 자유주의는 경건주의의 아들이다. 기독교의 적은 휴메니즘적 진리관과 현대판 신비주의이다. 다른 복음, 다른 영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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