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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3장강해`, 15 장 인간의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강대식 2018. 9. 4. 19:56

15 장   인간의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 가장 친숙하고 잘 알려진 구절이지만 이 구절은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긴요한 교리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조사하고 관찰해야 한다. 16절은 11절부터 말씀하신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 16절의 중심주제는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은 니고데모가 무엇보다 이 사랑을 알길 원하셨다. 이것이 특별히 학식이 높고 독실한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세상이란 죄 가운데 있는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 밖에 살고 있는 인간,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주신 모든 영광스러운 가능성 밖에 살고 있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독생자를 보내 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놀라운 말씀은 없다. 죄와 불순종 때문에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난과 고통을 대신 당하도록 아들을 내주셨다.

 

사랑의 방식이처럼 이라는 짧은 단어로 정의해 주신다. 이 구절에 엄숙히 주의를 환기시키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는 바로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 삶에 대한 진실만 깨달아도 복음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문제점은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이런 이야기를 초연한 태도로 들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인과 나그네와 거류자라는 사실만 알아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이 자리에 있어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가진 자들로 여기며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설교자도 죽어가는 자로서 죽어 가는 자에게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 이 은혜로운 구절을 고찰할 때도 그런 자세로 주목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주로 가르치는 예배로 인식되던 그 예배를 하나님이 회심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멋진 경험이 있었다. 복음을 제시하는 예배는 전부 전도 예배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특정 예배만 전도 예배로 여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고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집회에서나 회심을 기대할 수 있다.

 

-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는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복음은 바로 이 일에 대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 점을 몰랐다. 기적이나 몇 가지 측면의 가르침 등에 대한 것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복음의 중대한 목적 및 목표는 사람에게 영원하고 영구한 생명을 주시는 데 있다. 영생은 멸망에 반대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는 멸망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상태로 태어난다. 인간의 상태는 인간의 생각과 사상과 역량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멸망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이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자기 영혼에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어 멸망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는 것은 몸의 생명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대해서만 열광하며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이다. 가장 높고 고상하고 놀라운 일에는 살아 있거나 깨어 있지 못하면서 그 반대의 일에는 열광한다. 더 비극적인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며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죽어 간다는 것이다. 건강과 활력이 넘쳐 보이던 사람도 한순간에 쓰러져 죽을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같은 상태로 지금보다 더 나쁜 상태로 영원히 지내고 싶은가? 고통을 달래 줄 것도, 희망도, 전망도 없는 상태로 영원히 지내고 싶은가?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 멸망의 상태에서 벗어나 실제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생명은 항상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영생이고,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핵심과 소명과 중심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즉 영생이다.

영원하다라는 말은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과 인생관을 평가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영원한 생명, 영구한 생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영원한 세계 및 그 모든 영광스럽고 놀라운 것의 맥락 안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과 관심을 앎으로영생을 얻는다.(17:3)

 

뒤따라 전에 몰랐던 평강과 기쁨을 경험한다. 세상 어디에서 평강과 안식을 찾을 수 있겠는가? 평강과 기쁨은 영생의 일부로 주어지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소유하셨던 것을 우리도 소유한다는 뜻이다. 그분의 삶을 살펴보면 모든 사람이 흠모할 삶을 사셨다. 그리스도와 똑같이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으며, 어떤 것도 훼방치 못하는 평강을 경험할 수 있으며, 십자가조차 빼앗지 못하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영생은 바로 이런 생명의 특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생은 생명의 특질을 가리키는 말일 뿐 아니라, 양적인 요소도 포함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얻는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다.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생명은 첫 열매 내지 맛보기에 불과하다. 주님이 이 16절에서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펼쳐 보여주시는 전망이 바로 이것이다. 영생은 선물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 아닌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만큼 큰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 영생을 주시는 방식이 니고데모를 크게 경악시켰다.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하나님이 인간의 선한 삶이나 기도나 신앙심 등에 보상해 주신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청구서를 내놓고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육에 속한 자의 관점이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전적으로, 유일하게, 철저히, 하나님의 선물로 얻는 것이다. 노력이나 수고나 성취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회심 전 마르틴 루터는 세상과 전도유망한 직업의 길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 골방에 들어가 금식하고 땀 흘리며 기도하고 선을 행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렇게 애썼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이 열려 그것이 참담하게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오히려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 하나님과 천국으로 가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생의 선물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요 영원하신 아들이시라는 성경의 증언과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의 위격을 믿을 뿐 아니라 그가 하신 일도 믿는다. 인간을 멸망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는다. 단순히 도덕적인 가르침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노력과 시도를 돕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믿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안다. 멸망의 상태에 있는 자임을 안다.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자임을 안다. 그토록 자랑하던 선한 일들도 다 더러운 누더기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이런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땅에 내려오셔서 내 죄를 지고 형벌을 담당하신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는 뜻이다.

 

- 믿음의 자세

진리를 인정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성경은 단순히 2천 년 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요, 모든 시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말씀은 나한테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도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며 집중한 적이 없는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말씀을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씀을 의지하기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일을 신뢰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영혼과 영원한 운명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맡기고 의지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노력을 영원히 포기하고 내가 무엇을 하느냐, 얼마나 오래 하느냐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안다. 주님과 주님이 하신 일만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세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는 즉시 실행에 옮긴다. 이처럼 믿음에는 즉각적인 특징이 있다. 빌립보 간수는 무슨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사도가 전한 말씀을 듣고 바로 믿었다. 깨달은 자에게 미루는 것은 무의미하다. 믿음은 즉각적인 것이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즉시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뢰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지금 확신이 느껴지든 느껴지지 않든 걱정하지 말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믿는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고 계심을 안다. 나는 그를 믿고 나의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긴다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지체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라.

 

- 자마다” - 영생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위한 것이다. 나라와 종족과 언어에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이다. 주의 자비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든 중요치 않다. 하나님은 구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죄나 저 죄나 똑같이 악하다. 우리 모두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오직 중요한 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라는 것이다. 그의 말씀을 믿는 자는 하지만이라는 말을 일체 하지 않는다.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임을 고백하라. 하나님의 아들이 해주신 일로 인해 그 모든 형벌이 취소되었다는 것,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요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릴 상속자라는 것을 믿으면 된다. 지금까지 믿지 않았고 나아가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하라.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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