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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5장 하나님의 나라: 통치 그 자체인가, 통치 영역인가?

강대식 2018. 9. 12. 07:10

5장 하나님의 나라:

통치 그 자체인가, 통치 영역인가?

 

신약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데 동의한다. 결정적인 난제는 예수께서 어디서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정의하신 일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강조점이 있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미리 말씀한 메시야적 구원이 예수님 자신과 그 사역 가운데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메시야적 구원은 다가올 시대에 가서야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 종말론적 완성의 때는 아직도 미래에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복음서의 자료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가 매우 다양한 문맥 속에 나타나지만, 최소한 네 가지 서로 다른 용례를 찾을 수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통치나 다스림 등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RSV역은 누가복음 19:12,15:,23:42에서 바실레이아“kingly power”(왕의 권세)로 번역하고 요한복음 18:36에서는 “kingship”(왕권)으로 번역하고 있다. 두 번째 구절들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의인이 이 시대의 종말에 들어가게 될 미래의 묵시론적 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그런 말씀들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올 시대와 혼용된다(9:47; 10:23-25; 8:11=13:28). 세 번째 그룹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실재하는 무엇으로 묘사된다. 가장 두드러지는 말씀은 막10:15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이 현재 받는 것으로 말씀하며, 또한 마6:33=12:31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이 찾는 것으로 말씀하며, 11:1212:28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서 역사하는 능력으로 말씀하며, 17:21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사람들 안에 있다고 말씀한다. 네 번째 그룹의 경우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이 지금 들어가는 현재의 영역으로 말씀한다(11;11=16:16; 21;31; 23:13).

 

예수께서는 미래의 완성을 배경으로 하여 현재의 성취를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관념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인가, 아니면 그가 통치하시는 영역인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진행 중에 있으며, 이미 개입한 상태에 있고, 이미 밝아오고 있는 것으로 보셨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적들이 그 임박성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미래를 동시에 이미 현재의 실재로 만든다는 데 예수의 사역의 의미가 있다. 이 임박성에 대한 메시지가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예수의 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예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권능들이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말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 , 종말이 가까이 임했기 때문에 그 권능들이 이미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 의미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바실레이아의 핵심적인 의미는, 히브리어의 말쿳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통치 영역이라기 보다는 추상적이며 역동적인 통치, 다스림, 왕권의 관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신약과 구약을 함께 묶어주는 끈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역동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두 가지 중심적인 강조가 있음을 발견했다. , 현재의 성취미래의 종말론적 완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바실레이아가 통치 영역이 아니라 통치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복음서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새 시대에 하나님의 다스림과 권세가 공개적이며 가시적이며 우주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종말론적인 통치의 뜻으로 사용하는 예는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기노니”(22:29)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때 나라는 곧 왕의 지위를 뜻한다. 이 약속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권세와 나라가 그들에게 주어질 날이 올 것이다. “주님 가르친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구하는 것이다(6:10).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강림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영역이 아니라 신적인 활동이다. 또 다른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6:33=12:31).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서 받아들일 그 무엇이다(10:15; 18:17; 18:17; 18:13).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어떤 영역이 아니라 통치다. 하나님의 통치이며, 그 통치와 더불어 주어지는 축복들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유대인의 시각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는 일은 랍비들의 이해로는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의 길이었다. , 랍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길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율법주의적 학식과 가르침을 배격하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은 단순하고도 어린 아이 같은 자들이 영접할 수 있으며, 또한 어린 아이 같은 순전한 순종과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에 받아누리는 축복이라는 관념은 보화와 진주의 비유에서도 나타난다(13:44-46). 이 두 비유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시대에 찾아질 수 있으며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하여 포기할 자세가 되어 있는 법이다.” “세상에서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에게는 진주가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을 소유한 만족감이요, 마음에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성취감이다.”

 

정리하면,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실레이아의 추상적 의미가 랍비적 유대교에서 나타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현재에 벋아들일 수 있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은 또한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실현될 것이기도 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통치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유대교에 있어서는 그 통치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를 새로운 사랑의 윤리에 순종하는 것이요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유대교와 대조를 이루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예수께서는 종말론적 완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구약의 소망이 실제로 성취되는 일이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러한 현재의 성취에 대한 암시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현재 임하며 역사하고 있다는 말씀 속에서 나타난다. 핵심적인 논지는 곧, 이 시대의 마지막에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기 전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사람들 중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사람들이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라는 추상적인 개념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권능(power)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유대교의 가르침과 구분지어주는 특징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그의 선포의 핵심이요 그의 사역 전체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묵시론적으로 임하여 새 시대의 하나님의 통치가 최종적으로 임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의 통치를, 그의 나라를 드러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구속적인 통치의 축복들을 종말론적 시대가 오기 전에 미리 경험하도록 하신 것이다.

 

마귀들을 내어쫓으신 일을 지칭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엡따센)”(12:28=11:20).

이것을 표준역에 따라,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로 번역하여야 한다.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대로 하나님의 나라 자체가 임재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임재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나 하나님 나라의 권능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인 것이다. 이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역동적인 의미로 보아서 하나님의 통치나 다스림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는 이 시대의 종말에 능력적인 역사 개입을 통해서 임하여 다가올 시대의 완전한 질서를 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역사 속에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곧 하나님의 통치의 역동적인 임재를 의미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더 이상 사람들이 그의 통치에 굴복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먼저 주도권을 행사하셔서 새롭고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하나님이 영원하신 왕이시요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만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역동적인 개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대의 종말에 임하여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적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할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인간 역사의 한가운데 임하여 있는 것이다. 내일 권능으로 역사하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이 오늘 예수 안에서 활동 중에 계신 것이다. 동일한 하나님이, 동일한 통치가, 동일한 나라가 역동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사고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면이 나타난다. 랍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원칙적으로(de jure) 계속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머리를 숙일 때에 비로소 이 시대에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de facto) 실재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바로 율법의 멍에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토라 속에서 그의 뜻을 표현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율법에 굴복하여 그것을 순종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멍에를 지게 된다. ,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유대교 문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시대에 임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주도권이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맡기셨으므로 율법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실현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책임이다. 하나님 나라는 임할 것이다. , 하나님은 이 시대의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주도권을 행사하실 것이다. 그의 나라를 온 땅에 실현시킬 것이다. 그 때에 죄와 악이 사라질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무런 악의 방해를 받지 않고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12:28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유대교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지금, 이 시대에, 다가올 시대가 오기 이전에, 하나님이 활동하셨음을 말씀하였다. 이 현재의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 자신 속에서 사람들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서 새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역사 속에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그 나라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통치가 새 시대를 열 것인데, 그 하나님의 통치가 이 시대에 사람들 가운데 임하여 구속 활동으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 주님의 다양한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였고 구속적인 역사를 행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역동적인 의미로 볼 때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저 우주를 다스리시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그의 다스리심을 세우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이제 곧 구원과 심판이라는 묵시론적 역사 속에서 활동하려 하신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술의 의미는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님이 이제 곧 구원과 심판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실 것이지만, 그것은 묵시론적인 실현이 아니요 그 묵시론적 실현에 앞서서 이루어질 하나의 필수적인 단계일 것이다.

 

선지자들은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긴장 관계를 가졌다. 그들은 역사적인 강림의 날종말론적인 강림의 날을 한 날로 보았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의 관심의 초점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역사하심의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역사와 종말론 속에서 구속 활동을 전개하시는 바로 하나님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강림을 실현된 종말론으로 보고, 종말론적인 강림을 완성된 역사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묵시론자들과 선지자들 사이의 확실한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선지자들의 긴장을 그대로 재현하심으로써 묵시론자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로써 그는 선지자들의 소망이 역사적 현재 속에서, 곧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성취되었음을 지칭하셨고, 동시에 이 시대의 종말에 그 소망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을 지칭하셨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현재종말론적 미래 모두가 동일하신 하나님의 강림이요 동일한 하나님의 다스림의 실현으로서 동일한 구속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나 다스림으로 해석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포가 갖는 올바른 역사적 의미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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