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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4장 완성에 이르지 않은 성취

강대식 2018. 9. 12. 07:07

4장 완성에 이르지 않은 성취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약속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였으니”(3:1,2). 요한은 이사야 40:3의 예언을 성취하는 선지자로 나타났다. 그의 약대털로 만든 겉옷과 가죽 허리띠는 엘리야의 차림새(왕하1:8)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누가는 하나님이 말씀이 빈들에서 요한에게 임하니라하였다(3:2). 백성들은 요한에게서 성령의 감동함을 받은 새로운 선지자를 본 것이다(11:32).

 

요한의 메시지를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웠고, 하나님이 곧 그의 백성에게 임하려 하신다. 이 하나님의 강림은 오실 자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인데, 그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을 행할 것이다.” 요한은 이 두 가지 메시야의 사역이 한 가지 단일한 종말론적 사건 속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요한은 감옥에서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예수가 과연 오실 자인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할지를 물었다. 요한은 윤리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당시의 유대 교사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다가올 나라는 다가올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건은 깊은 윤리적 성격을 지닌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며 그 원수들에게는 심판을 줄 것으로 믿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묵시문학에서 특징적으로 자주 나타는 바 유대인들의 편협된 사고와 윤리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분명히 거부했다. 유대인의 혈통에서 났다는 것은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요한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회개를 요구했다. 곧 스스로 죄악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행실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 회개의 증거로서 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회개를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예수에게서 이루어진 성취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시더라”(1:14,15). 마태복음의 보도는 더 간결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차이는 예수의 메시지를 때가 찼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마가의 보도를 통해서 나타난다(1:15). 예수님은 단순히 요한처럼 하나님의 강림의 임박성을 선포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강림이 실제적인 과정 속에 있으며 하나님이 이미 그의 백성에게 임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들이 가졌던 소망이 성취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취에 대한 언급이야말로 예수님을 유대교와 구별짓는 그의 메시지의 진정으로 독특한 요소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가운데서 메시야적 구원을 약속하는 부분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말씀하심으로써 청중들을 놀라게 하셨다(4:21). 요한은 하나님의 강림이 임박했음을 선언한 바 았다. 즉 종말론적 소망이 성취되고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할 때가 가까웠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고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묵시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현재의 구원이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을 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에게 임하였음을 담대히 선언하신 것이다. 그 나라의 임재는 하나의 해프닝, 곧 하나의 사건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이었다. 그 약속은 예수님의 활동에서 성취되었다. 곧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며, 눈먼 자의 시력을 회복시키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활동을 통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것은 역사 속에 나타난 새로운 사건이었다.

 

구약의 소망의 성취에 대한 핵심적인 사실을 말씀하신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10:23-24=13:16-17). 그들이 기다리던 그것이 이제 사람들에게 임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이 아닌 약속하신 메시야의 구원이었다. 성취에 대한 사실은 요한이 오실 자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신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분명히 인증된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11:4-5,7:22). 이 말씀 가운데서 메시야의 구원의 축복들이 현재 임재해 있음을 주장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의 요점은 종말론적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취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의 약속과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것이다.

 

완성에 이르지 않은 성취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그 어떤 일이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메시지는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적인 이원론적 구조를 통해서 해명하는 것이 가장 좋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약속이 현재 성취되는 과정에 있으나 그 완성은 오직 다가올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으로 가르치신 것을 보도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종말론에서도 이원론의 구조가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자연과 역사를 포함한 현재의 질서가 악으로 인해서 더럽혀져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임할 새로운 질서를 추구했다. 이 새 질서는 모든 악이 사라진 질서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이 거하는 땅이 구속함을 받은 질서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 두 시대의 이원론적인 구조와 이원론적 용어를 모두 예수께서 사용하시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두 시대의 용어는 바울 서신에서도 발견된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등한 것으로 말씀하며, 또한 다가올 시대와도 동일한 것으로 말씀하셨다(10:23-25). 그의 제자들은 주께서 원하시는 희생을 감수하는 대신 특정한 상급을 누리게 되지만, 동시에 핍박도 받게 된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선물인 영생은 다가올 시대에 속한 것이다. 이원론적인 용어는 마가복음 4:19의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대(‘세상으로 번역)의 염려”, 재물, 생활의 안정, 명예에 대한 관심은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대적해서 그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태복음만이 유일하게 시대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시대는 인자의 파루시아를 통해서(24:3), 의인이 악인과 분리될 사람들에게 대한 심판을 통해서(13:39) 종결될 것이다. 동일한 표현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함께 시대의 완성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28:20). 이 말씀은 그의 파루시아와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새 시대가 이룰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은 이 시대를 종말에 이르게 하며, 다가올 시대를 개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로 들어가게 할 것으로서 종말론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이원론의 요소는 이 시대에서의 사탄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신약 전체에 걸쳐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 속에서 사탄이 사람들을 비극적으로 통치하도록 허락을 받은 것으로 바라본다. 사탄은 자기 집을 지키는 강한 무사로 표현되기도 한다(3:27). 사람들은 그의 권세에서 구원받아야만 한다(6:13). 다가올 시대에야 비로소 사탄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사역과 바울의 신학을 둘 다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두 나라의 교의이다. 곧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그것이다.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든 악한 일들과 그들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은 그 악한 나라의 권세가 역사 속에 드러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 세상 또는 개인-에 대한 인간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탄의 나라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과 묶여져 있다. 그 승리가 올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 가운데 임하게 될 것이다.”(맨슨) 예수의 독특한 점은, 물론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임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사역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서의 신학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에 대한 미래의 종말론적인 승리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동시에 현재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미래이며 동시에 현재일 수 있는가? 어떻게 미래의 묵시론적 질서가 현재의 역사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는가? 예수의 사역을 어떻게 구약의 소망의 성취의 때를 소개하는 것으로 보며, 한편으로 그 완성의 때는 아직 미래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강조점- 현재성과 미래성-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론적 완성의 때는 아직 미래 속에 남아 았다.

 

현대의 성경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이면서 동시에 현재일 수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두 가지 말씀들- 현재의 성취에 관한 말씀들과 미래의 완성에 관한 말씀들-을 모두 보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찾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기로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 의미 속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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