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결코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우상 숭배적이다/ 마이클 호튼
근대적 신화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평화와 조화와 질서와 정의와 공의를 성취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좋은 사회 구조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의도치 않게 계몽주의적 신화들을 지속시켜 주었던 것은 경건주의자들과 부흥운동가들이었다. 근대성을 옹호했던 세속주의자들은 자기들에게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지지물로서 종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교는 바벨탑을 재건하려는 본질적으로 반(反)영적인 프로그램을 위한 영적인 유인책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해야 했다. 그 야망에 가득 찬 프로젝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라는 말이었다.
기적적인 것을 “수단을 정당하게 사용한 철학적 결과”(찰스 피니)라고 축소시킴으로써, 미국의 부흥사들은 계몽주의에 시혜를 베풀었으며, 세속주의의 통치가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들은 계몽주의적 프로그램들을 통해 구원의 프로그램을 들여왔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고 있으며, 죄와 은혜에 대한 선포를 통한 하나님의 성령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부흥은 18세기 중반의 대각성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수용하면서부터 그들은 부흥과 회심을 순전히 자연주의적이며 기계론적인 맥락에서 파악했다. 이런 측면들은 오늘날까지도 목격되고 있다. 우리의 전도에서만 아니라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는 좀더 사려깊은 복음주의 지도자 가운데서도 목격되고 있다.
사회가 언제 정치 과정을 통해 재형성된 적이 있었는가? 정치는 이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사상들이 법률적인 적용점들을 찾기 위해 경합을 벌이는 장소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도 정치를 통해 사회를 재형성할 수는 없다고 보인다. 민주주의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을 통해 제정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과거에 있었던 정부론의 일종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시즘도 혁명가들이 지적으로 그 신조를 수용한 이후에야 비로소 권력을 획득하고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정치적 승리들은 먼저 지성에서의 승리였다. 역사는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 점에 있어서, 어떤 색깔의 정치를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르크시즘과 자본주의 모두 똑깥이 근대의 계몽주의에서 나온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그 둘 중 어느 정치 체제도 사회의 영적인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두 체제 모두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많다. 두 체제 모두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며, 인간이 악해지는 것은 사회 구조들이 그 사람들을 적절하게 ‘양육’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사람들의 가능성들을 제대로 개발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두 체제 모두 세속적 실험의 산물들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기독교와 혼동함으로써, 우리는 역사를 이해하지도 못하며(자본주의가 뿌리박고 있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적 토양을 무시하고 있다), 그 두 세속적 실험이 인간 정신에 끼친 영적인 피해를 평가할 능력도 상실하고 있다.
그 두 체제는 모두 우상 숭배적이다. 자본주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저하심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체시켜 버렸으며, 반면에 마르크시즘은 국가를 우상으로 만들었다. 하나는 국가를 해방자로 보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시장을 해방자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두 체제 모두 본질적으로 물질주의적이며 영적인 실재들에 대해 적대적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솔제니친이 미국에 와서 자기가 마르크스주의 국가 치하에서 매우 잘 알고 있었던 환멸과 실망과 허무주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서구 사회의 성적인 타락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의 탐욕과 수탈에 대해서도 공격했다. 그가 선호했던 것은 소비에트 독재정치에 대한 서구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체제들이 아예 종식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쪽을 택하고 있었든지에 상관 없이 ‘이데올로기 전쟁’ 그 자체가 문제였다. 그 두 체제 모두 합리주의와 인간의 선함과 인간의 자율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을 그저 경제적인 동물로 격하시키고 있다. 인간의 존재 전체는 그저 생산과 소비의 요소일 뿐이다. 한 체제는 천국을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고, 다른 체제는 그저 그 존재를 무시하기로 선택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은 청교도들과 건국 시조들의 후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은 그들은 청교도들의 후예라기 보다는 건국 시조들의 후예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식으로 행복을 찾는 길을 입법화하려고 나와 았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들을 점점 더 사법적인 맥락에서 보고 있다. 우리는 설득하려는 대신에, 우리의 권리들을 입법화하기를 원하고, 주장하기를 원하고, 우리에게 떨어질 정치적인 떡고물을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결코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그 체제들은 기독교적인 영향 아래 만들어진 체제들이다 그 체제들을 만들어 낸 것은 세속적인 관심이다. 그 점이 절대로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이슈는 단지 ‘이 체제’ 대 ‘저 체제’ 혹은 ‘이 정당’ 대 ‘저 정당’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정치의 합당한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다. 정치적 해결들은 의료적 해결들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정치가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들은 행복과 기쁨과 지속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 능력은 없다. 내적인 평안을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영혼에게 자유를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좋은 가정, 좋은 사회를 창출할 수는 없다. 정부는 국민들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요구되고 있는 것은 많은 비기독교인 사상가들조차도 말하고 있다시피, 다름 아닌 어떤 영적인 추구다.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인격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대답들을 가지고 궁극적인 물음들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겠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운동들에 휩싸여서 고여 있는 물줄기에서 우리의 물을 길어오겠는가?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6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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