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최고의 우선순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 한 구절에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이, 기독교의 복음이 담겨 있다. 복음의 본질을 완벽히 알 수 있다. 우리 시대는 기독교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극적이고 끔찍한 혼란 속에 있다. 우리에게는 인증된 복음서가 있고, 초대교회의 문헌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과거로 돌아가 최초의 설교자들이 무엇을 전했는지 확인하고, 곧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한다.
첫 번째 요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인 복음이 이전에 있던 다른 모든 메시지와 전혀 다르며, 인간이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본성적으로 믿는 모든 것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분은 마6:31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절에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우리 시대와 우리 세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방인‘은 계시를 모르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그분의 가르침이 이방인들의 시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엄청난 사실을 강조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매우 중요한 요점이다. 기독교의 입장, 기독교의 생활방식은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독교는 독특하고 유일무이하며 다른 것과 구별된다.
두 번째 요점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인간이 속한 세상의 문제, 질병과 고통의 문제,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피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매우 깊고 매우 근본적이며 매우 심각하다. “너희는 먼저 — 구하라”. 그분은 첫 번째 우선순위에 관심이 있으시다. 주님의 요지는 이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마음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다른 가르침들과 다르다.” 마음은 삶과 존재의 중심으로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중심된 곳에 있는 것이다.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가 인간의 마음에, 보고 이해하는 궁극적인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부분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잘못 되었다. 인간은 잘못된 방향을 주시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두워졌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을 것이니”(마6;23).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하는 바로 그 부분, 즉 마음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와 ’마음‘과
’눈‘을 크게 강조하신다. 사람들은 사회적, 정치적 법률과 조례를 통해 세상의 질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특히 지난 백 년 동안 반복되어 온 치명적인 오류이다.
인간의 문제는 화려한 코트로 속을 가리거나 여기 저기 손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철저히 변해야 한다. 인간은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근본에서부터, 기초에서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은 “거듭나야” 한다는 신약성경의 큰 가르침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 번째 요점은 이것이다. 그분은 큰 헌신의 행위를 요구하신다. “너희는 먼저 --- 구하라”. 기독교는 생활방식이다. 기독교는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생활방식이며, 따라서 우리의 전부를 요구한다. 인간은 기독교의 진리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기 전에는 결코 기독교의 진리를 알 수도 없고, 그 진리가 주는 축복도 경험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이지 알리라”(요7:17). 여기 기독교의 생활방식에 관한 크고 근본적인 원리가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주님을 맛보기 전에는, 그를 만나보기 전에는 그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과일을 따서 입에 넣고 씹어 보기 전에는 결코 그 맛을 알 수 없다.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고찰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주님은 언제나 헌신을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나를 따르라.” 이것은 주님의 놀라운 명령이다. 사복음서 어디에나 있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드리며, 우리 앞에 서 계시는 복되신 분께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이다.
이 메시지에 일반적인 세 가지가 나온다. 이 특징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주님이 특별하고 세밀한 방법으로 세 가지 일반적 원리를 시행한다. 1) 가장 먼저 하시는 말씀은 모든 인간의 문제가 잘못된 인생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잘못된 인생관이 사실은 ’이방인‘의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이방인들은 끔찍한 삶을 살고 있다. “인간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관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결정한다. 인생관이 잘못되면 다른 모든 것도 틀림없이 잘못된다.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렌즈의 초점이 잘못되면 무엇이 제대로 보이겠는가? 빛과 관련해서는 눈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비극은 세상의 인생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에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이야말로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믿는지 말해 준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이다. 우리가 우선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붙잡는가? 우선순위는 우리의 관점을 보여준다.
2) 그 다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의 문제는 잘못된 것을 앞에 두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예배의 자리에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섬기는 것이며,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와 우선순위를 제시해 주셨다. 이것들은 2천 년 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마6:19). 그러나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고 있다. 돈! 돈은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최우선순위를 두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돈이 힘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행복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최고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이 이방인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말씀하신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또 다른 우선순위는 25절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세상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생각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반복하신다. 오늘밤에도 순전히 먹거나 마실 것에서, 특히 마실 것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라! 주님은 사람들이 돈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이런 것을 위해 산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인생의 비극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마치 육체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하며 사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생각과 주의와 계획을 육체에만 집중시킨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우선순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너희 생명을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의 뜻이다.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사람들의 행복은 돈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수명의 길이에 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그 첫째 이유는 이런 태도를 취하면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 부분에서 복음은 언제나 검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청지기이며, 돈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돈 그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잘못은 인간이 돈을 섬기며, 돈을 위해 살며, 돈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것을 돈과 연결시켜 돈의 노예가 되는 데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몰두하면 언제나 그것의 노예가 되며,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바르고 참된 인생관을 갖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 구하라”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른 시각이며, 진정한 우선순위이다.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큰 가르침이기도 하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목숨(생명)이다! 육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생명(목숨)이다. 인간 속에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영원에 속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다.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지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인간은 피조 세계의 통치자이다. 인간은 이성과 큰 능력과 기질을 부여받은 피조물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롱페로우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영혼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고 했다. 우리 안에는 더 크고, 더 거대한 것을 갈망하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다 한없이 중요한 것을 덧붙이신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여러분의 우선순위여야 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저는 제 자신이 제 육체보다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으며, 티끌보다 본능보다 욕망보다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 안에는 제 바깥에 어떤 힘이 있다는 의식이 있다.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에게도 이런 의식이 있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2천 년 전 아테네 사람들에게도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그 신이 바로 하나님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6:26). 이것은 우주의 지탱자이자 위대한 공급자이신 하나님, 영원한 능력과 영광 중에 거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 쾌락과 돈이 최고이다. 이들은 늘 하나님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며 자신을 신으로 삼는다. 자신의 성취와 소유와 돈을 섬긴다. 재물을 숭배하며 섬긴다. 자신이 만든 거짓 신을 예배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시100:3).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호흡이 그분이 손에 있다. 하나님이 생명을 다스리신다.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다. 주님은 세상이 지금과 같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통치자이시기도 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관자이시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관해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모든 길은 완전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가 임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때가 찼고 그 나라가 임했다. 내가 그 나라가 임하게 했으며 그 나라가 가까이 오게 했다. 그 나라는 의의 나라다.”
하나님 나라에는 악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전혀 없다. 하나님 나라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최종적으로 임할 때, 악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남지 않을 것이며, 악에 속한 모든 자들은 악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의인만 남을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13:43). 의인만이, 오직 의인만이 복을 받을 것이다.
3) 주님은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우선순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렇게 살라. 너희와 하나님의 관계 외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그분께서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며, 그분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시리라는 것을 깨달으라.” “나의 나라로 들어오라.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의 도래와 온 세상에 대한 그분의 통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우선순위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노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실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괜찮다. 계속하라.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하라.
여러분이 완전히 절망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까지 구하라. 그런 후에 돌아와 복되신 분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
네가 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있기를 원한다면 의로워야 한다. 그러나 너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너희 스스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의를 너희에게 주기 위해서다. 내가 너희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촉구한 것은 너희를 깨워야 했기 때문이다. 너희 시각이 잘못 되어 있고, 너희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 너희 힘으로 결코 바르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왔다. 내가 너희를 위해 온전히 율법을 지켰다. 내가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다. 내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너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았다. 너희의 죄가 사해졌고, 너희의 의가 폐기되었다. 너희의 의는 나의 피로 완전히 씻기어 사라졌다. 오라. 와서 나의 의의 옷을 입으라.
그러나 주님은 그분을 진정으로 찾는 자들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자신의 영혼과 구원에 필사적인 사람들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은혜로운 초대를 들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1) “내가 너희를 어디로 인도하든지 나를 따르라.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버리며, 모든 생각과 계산을 버리고 그저 나를 따르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여러분이 구주와 여러분에게 의를 주시는 분으로 믿으면, 여러분이 영혼이 곧 만족을 얻으리라는 뜻이다. 여러분의 헛되고 무익한 노력이 끝날 것이며, 여러분은 참으로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그뿐만이 아니다. 그분을 통해 또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이것은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으며, 그 나라의 모든 의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여러분의 심판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 하나도 남김 없이 주실 것이며, 그분의 복을 먼저 부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 가장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제 여러분은 이 구절의 “이 모든 것”을 아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입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것을 위해 살지 않는다.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바라는 모든 것을 받았으며, 원하는 것보다 많이 받았다.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 기꺼이 나눠 준다. 여러분의 인생관이 새로워졌다. 이제 여러분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가난해도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에게 기독교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행복하다.
“사람이 주는 고생 근심/ 나 주님 품에 달려가게 만들 뿐,/
시련의 삶 고되게 짓눌러도/ 더 달콤한 천국 안식 있도다” - 헨리 프랜시스 라이트
이제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받는다면 이들의 인생관 전체가 변한 것이다. 이 낡은 세상은 이제 이들이 통과해야 할 순례지가 되었다.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이 너무 끔찍하다! 인간은 정욕과 욕망과 악으로 가득한 추한 존재구나!” 그렇다. 인생은 눈물의 골짜기지만, 이들은 이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며 통과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0-21)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일 뿐이다(벧전2:11). 이 세상은 우리가 통과해야 할 땅이며, 우리는 여행자이다. 내일이면 이곳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고 우리에게 그의 의가 있다면, 우리에게 죽음은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즉시 옮겨지는 것일 뿐이다. 거기서 우리는 그분을 온전히 보며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안에 있고 그의 의가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크게 기대할 것이 없음을 잘 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의 모든 시민에게 주시며 그의 의를 가진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벧전1:4)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찬양하며 전진한다.
“영원한 하늘의 사랑 안에 있으니 그 어떤 변화도 나 두렵지 않네.
밖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내 마음 흔들리지 않네
하나님이 나를 감싸시니 내 어찌 낙심하리요?” (안나 리티셔 웨어링)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있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자녀인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 그곳, 천국에 영원한 영광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아버지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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