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장 나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당신은 산 자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죽은 자 가운데 있는가?” 엄숙한 자기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
1.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어떤 자인가?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죽어있다. “죽어있다”라는 것은 아주 무시무시하고 강렬한 말이다. 사람들이 가장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결코 죽어있지 않다고 말하며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가장 믿을만하며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말씀이다. 요셉의 애정에 대해 죽은 야곱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창5:1) 길보아 산에서 왕의 장식품을 모두 벗겨 가져갔을 때에 사울왕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삼하1:10)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영혼에 대한 문제에 있어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처해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라는 것을 주장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생각하며 슬퍼하시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서 자비로운 은총을 내려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영예와 영광을 빼앗기고 찬란한 보석과 영원불멸한 영혼을 약탈당하고 모두 강탈당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영적으로 죽어있다고 말씀하신 것보다 더욱더 완전하고 참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한 사람의 마음이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때 말씀은 아주 간결하게 “죽어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의 손은 하나님의 역사를 돕는데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고, 그의 발은 하나님의 길에 익숙하지 않으며, 그의 혀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데 거의 써본 적이 없고 쓰지도 않는다. 그의 귀는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도 않으며, 그의 눈은 하늘의 왕국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곧 그 사람은 “죽어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만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모든 사람이 죽어있다. 그들은 죄를 느끼지 못하며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일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고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근심, 가정에 대한 걱정, 또 건강 때문에 어려움에 처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말한 바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사람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그들은 죽어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설교단에서 회중석의 수많은 죽은 자를 볼 수 있다. 에스겔의 눈에 보였던 그 골짜기와도 같다. 영적인 변화를 겪지 못한 사람의 상태를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들과 하늘 사이에는 엄청난 경계선이 놓여 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을 말해주는 무시무시한 표시이며 타고난 죽음과도 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위험인 것이다. 죽은 영혼은 아무것도 모르고 느끼지 못한다. 목사들이 회중을 염려하고 걱정해야 하는 이유는, 시간은 짧고 생명 또한 매우 불확실한 것이며, 그리고 영적인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가장 나쁜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자와 죽은 자들 사이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담대히 말해야”(고후3:12) 하고 또 담대히 말할 것이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에 예비하리요”(고전14:8)
2. 구원받는 자들 모두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
구원받는 자는 살아 있어야 하며 생생한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재산 중에서 생명은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강력한 것이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모든 변화 중에서 가장 강한 변화이다. 그것은 결코 잘못을 고치거나 다른 것으로 조금만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다. 약간만 닦아내고 씻어내는 것이 아니고, 수선하는 것도 아니며 덧칠하는 것도 아니다. 겉만 번듯하게 하는 것이 아닌 그것은 전적으로 새롭게 바꾸는 것이요, 새로운 본성을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원칙, 새로운 정신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며, 오직 이것만이 진정으로 인간의 영혼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채석장에서 대리석 조각을 찍어내고 그 대리석으로 고귀한 조상을 만드는 것과 같은 변화도 강력한 변화이지만 그것은 형태로 바뀌었을 뿐 아직도 그 이전과 똑같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곧 죽은 자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은 아주 커다란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고 그는 거듭나야 한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영혼의 생명에 반드시 필요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자연적인 출생은 육체의 생명에 있어서 하찮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자녀는 다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그다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들의 양심을 날카롭게 찌르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천국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을 넓게 하려고 하거나 그 이외의 다른 여러 길로 올라가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이것들을 허용하고 자리를 내어줄 수는 없다.
만약 우리는 세리였던 삭개오가 한때 사람들을 속이고 약탈하였으며 탐욕스럽게 행동하였으나 다시 나중에 그리스도를 섬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모두 나눠주고 베푸는 것을 보았더라면 어떻게 말했어야 하는가? 어거스틴이 한때 혼인하지 않은 여인과 간음하였으나 나중에는 하나님과 함께 아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보았더라면 어떻게 말했어야 하는가? 정말로 우리가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경우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탄생이요, 인간 본성의 부활이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올바른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 나는 이제 솔직하게 말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움츠려들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위에서 말한 변화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표면을 모두 벗겨 내어 보라. 그러면 그 밑에는 우리와 그들에게 똑같은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완전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악한 본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모두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바로 이점에서 같은 수준이다. 그들은 다 태어날 때부터 죽어 있으며, 둘 다 살아나야 한다.
우리는 바벨탑을 건설한 자들처럼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다. 우리의 자만심과 독선은 겸손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며 부주의는 신중함에 세속적인 속된 마음은 성스러운 마음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실현될 때까지 우리는 모두 딱딱한 돌과 같이 죽어 있는 것이다.
- 이제 그의 존재가 지닌 모든 편견과 경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① 과거의 그는 자신이 나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레미아서에서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17:6)고 한 것처럼 자신의 마음이 지극히 사악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② 과거에 그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오직 참회하기만 하고 약간의 기도를 드리고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그리스도께서 부족한 것들을 모두 보충하여 완전하게 해주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천국에 이르는 길이 아주 좁다는 것을 확신하여 오직 소수만이 그 길을 찾아낸다는 것을 믿는다.
③ 과거의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훌륭함과 탁월한 미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는 몇몇 목사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설교하고 이야기해 주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지극히 값진 진주이며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자이며 그의 구세주요 그의 변호자임을 안다.
④ 과거에 그는 죄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죄야말로 자신이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며 자신의 생명의 슬픔이요 무거운 짐이라고 말한다.
⑤ 과거에 그는 은혜의 수단에 대하여 아무런 즐거움도 알지 못했다. 성경읽기를 게을리하였고, 기도는 형식적이었다. 그에게 있어 일요일은 지루하고 성가시고 진저리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고 이러한 모든 것은 그의 영혼의 기쁨이요 위안이며 마음의 양식이다.
➅ 과거에 그는 참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싫어했다. 그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이나 나약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며 그가 볼 수 없는 수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⑦ 과거에 그는 이 세상에 대해서만 곧 이 세상의 쾌락과 일과 직업과 그 보상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세상이 텅 비어 있고 전혀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는 이 세상을 장차 누리게 될 삶을 위한 훈련소 같은 곳으로 여길 뿐이다. 그의 보물은 천국에 있고, 그의 안식처는 무덤 너머에 있다.
- 나는 또다시 묻고자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새로운 생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와 같은 변화가 일반화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정도와 범위, 강도에 따라 그 변화도 대부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로 구원받기 원한다면 우리 모두 이와 같은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우리 내부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때라야 비로소 우리에게 생명이 생겨날 것이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과 참 그리스도인 사이에 놓여있는 넘을 수 없는 놀라운 장벽은 생명의 상태와 죽음의 상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이다. 그리스도의 자녀 중에 가장 병약하고 나약한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이 세상의 가장 재능 있는 인간보다 훨씬 더 칭찬할만한 고귀한 자녀이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는 그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이요, 반면에 죄악 속에 사는 자는 영원히 죽을 것이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당신은 진정으로 감사하라. 하나님의 발 밑에 엎드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 그리고 자주 하나님께 “주여! 제가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여 왜 하필이면 제게 그리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이까?”라고 외치도록 하라.
3.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죄를 고칠 수는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구스인들이 그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으며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다.(렘13:23) 아담의 코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하나님만이 죄인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바꿀 수 있다.
영광의 복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며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필요한 마음의 양식이다. 살아있는 전능한 왕은 죽은 성도를 거느리지 않는다. 그의 백성은 죄 사함뿐만 아니라 주와 함께 살아 있게 되었고 주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성령은 주와 죄인을 연결시켰고 죄인을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인도하여 하나로 연합하게 함으로써 그를 일으켜 세웠다. 죄인은 그가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 있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모든 생명에게 약속하는 맑은 샘물이요 성령은 우리 영혼에 그러한 생명을 전달해 주는 약속의 중재자이다.
- 당신이 생명을 얻고자 결심하였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라. 당신의 영혼은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은혜로우며 자비로운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막달라 마리아의 영혼을 살리기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여인은 일곱 가지의 죄악을 저질렀지만 성령은 그 여인까지도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나게 하였다. 성령은 그 여인을 십자가 곁에서 마지막까지 있게 하였고, 맨 먼저 무덤에 와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는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성령은 한 영혼이 부패하였다 하여 결코 그 영혼을 돌보지 않거나 내 쫓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지극히 나쁜 것들을 모조리 가지고 가는 은혜의 그릇이다.
성령은 전능하신 영이다. 그분은 모든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모든 거친 곳을 아주 평탄하게 고르고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 성령은 바리새인적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고수하였던 유대인을 받아들여 진정한 신앙을 가진 성실한 전도자로 바꾸었다. 바울과 더불어 이미 그 일을 행하였다. 성령은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인 습관 속에서 성장하였던 사제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미신으로부터 떨치고 일어나게 하여 이 세상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굳건한 신앙으로 진정한 의로운 지지자들로 바뀔 수 있게 하였다. 마틴 루터와 더불어 그 일을 행하였다. 성령은 품행이 나쁘고 방탕한 노예선 선장을 받아들여 복음을 전도하는 아주 훌륭한 목사로, 자주 불리는 찬송가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문학가로 바꿀 수 있다. 존 뉴턴과 더불어 그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성령의 팔은 결코 줄어들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누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돕기에 열망하는가? 그러면 그에게 위대한 성령의 부어 주심을 위해 기도하게 하라. 오늘날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보다 훌륭한 설교나 더 좋은 설교 작품이나 저작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부어 주심이다.
하나님께로 끌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있는 자가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달려가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 하신 것”(요7:38-39)이라고 말씀하신다. 즉시 성령께 기도를 시작하라. 그의 이름은 약속의 성령이요, 생명의 성령이다. 새로운 마음을 만들어 줄 때까지 그를 쉬게 하지 말라.
적용)
1)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당신은 죽어있는가 아니면 살아있는가?”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길, 곧 좁은 길과 넓은 길이다. 또한 두 가지 신분, 곧 심판 날에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왼편에 있는 자들이 있다.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 안에 들어왔으며 성찬식에서 은혜와 성령을 받았으므로 살아 있다”라고 말하면서 나를 막으려 하지 말라. 당신이 말하는 생명은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령이 깃들어 있음을 밖으로 나타나는 열매로써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의 눈으로 그 은혜를 발견할 수 없다면 둘 다 지극히 의심스럽게 바라봐야 한다.
“그것은 결정할 수 없는 질문이며 그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매우 무례하고 건방진 일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헛된 도피이며 잘못된 겸손일 뿐이다. 영적인 생명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애매모호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져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의 실재와 사실은 전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의심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지금은 알고 싶지 않다”라고 대답하려고 마음먹지 말라. 당신은 조금도 알고 있지 않다. 행복이나 불행이 영원할 것인가는 당신의 대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당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불확실한 것들뿐이며, 모두 어두운 것뿐이다. 자기점검이라는 큰 일을 시작하라. 당신의 영혼에 대한 실수는 영원에 대한 실수이다. 바로 지금 당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심사숙고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직접 물어보라. 당신은 산 자 가운데 있는가? 죽은 자 가운데 있는가?
2) 모든 마음을 다 하여 죽어있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생각하며 깊이 슬퍼한다. 나는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사리분별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거절한 그리스도와 당신이 저항하고자 하는 성령, 당신의 발아래 짓밟힌 주의 보혈과 당신이 게을리 읽는 성경, 그리고 당신이 경멸하는 천국과 하나님의 자리에 세상이 놓인 것을 생각하며 슬퍼한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 내버리고 떠밀어낸 평화의 위안을 생각하며, 또한 스스로 계속 쌓아둔 불행과 이제 다가오게 될 쓰라린 후회를 미리 생각해 보며 당신의 영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생각하며 슬퍼하지만 나는 죽은 영혼에 대하여 슬퍼해야 할 이유가 많다. 진정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차라리 놀라울 지경이다.
어찌하여 당신은 죽으려 하는가? 죄의 보상이 그리도 달콤하고 좋은 것이기에 당신은 포기하지 못하는가? 천국은 그것을 추구할 가치도 없을 만큼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죽은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찌니라”(겔18:32)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악한 예루살렘을 보고 슬피 울며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27)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잃어버린 바 된다면 당신의 피는 곧 당신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올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을 너무나 소홀히 섬기었다”라고 말해왔다. 자신의 영혼을 참으로 많이 돌보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이 세상의 길은 아주 넓은 길이었지만, 슬픔과 실망의 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3)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말과 일과 생활양식과 당신의 기질 등 모든 것으로 그것을 증명하도록 하라. 당신의 모든 대화의 창을 통해 당신이 받은 은혜를 빛나게 하라. 당신의 빛이 영원한 불꽃처럼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라. 만약 당신이 성령에 의해 소생했다면 어느 누구도 감히 그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살아 있는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해마다 더욱더 명백하고 분명해지게 하라. 그리고 당신이 섬기는 왕의 모습이 더욱더 분명하고 완전하며 뚜렷한 형상이 되게 하라. 우리의 등불은 더욱 반짝여야 하며 결코 꺼질 듯이 희미하게 타올라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려야 한다. 이 세상 상태는 우리 모두에게 확고한 신앙생활을 요구한다. “내 편에 선 자가 누구이더냐”라고 부르실 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22:1)라고 즉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당신의 나약함의 원인은 무엇인가? 당신이 생명의 샘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이 과거의 경험에만 의존하고 날마다 새로운 만나를 모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의 나약함의 원인은 바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믿음과 행하지 않는 작은 기도에 그 원인이 있다. 샘물은 결코 마르지 않으나 당신은 오직 몇 방울만 찔끔찔끔 마셨을 뿐이다. 생명의 빵이 당신 앞에 놓여 있으나 당신은 오직 약간의 부스러기만 먹을 뿐이다. 하늘의 보물이 넘치게 있지만 당신은 오직 몇 개의 동전만 가질 뿐이다.
자신의 특권을 인식할 수 있도록 깨어 있으라. 당신 앞에 은혜의 보좌가 있다면 영적인 배고픔과 갈증과 빈곤을 이야기하지 말라. 아직도 당신을 감싸고 있는 자만심의 수의를 벗어던지라. 홍해를 헤쳐 나가기 위해 가져가지 않았어야 했던 애굽의 나태함의 의복을 벗어던지라. 그리고 당신의 혀를 잡아매고 마비시키고 있는 무신앙에서 깨어나라.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궁핍하지 않지만 당신 자신 안에서 궁핍하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베풀기 위하여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며 예수는 그 곁에서 중재하기 위하여 앉아 계신다. 용감하게 나아와 충분히 요구하라. 당신은 강물과 같은 자비와 강력한 흐름과 같은 은혜의 능력 등의 후하고 풍성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주 안에서 살아가기 바란다. 우리가 죽게 될 때 우리는 의로운 죽음을 맞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 예수가 다가왔을 때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되도록”(요16:24) 우리 모두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국 무엇보다도 우리는 살았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그것이 가장 큰 물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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