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among you 있느니라”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로서는 두 가지 번역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롭다고 믿는다.
기독교의 실체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인 혼란이 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14:8).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된 성경이 있는데도 대답에 혼란이 있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성경에 끼워 넣기 때문이다. 자신의 철학과 이론과 사상과 이해의 수단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제시된 성경의 메시지를 지나쳐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 속에 초대교회의 문헌이 있다. 성경 속에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기독교가 처음에 무엇을 가르쳤으며,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분명한 메시지라고 말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과 메시지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분명한 메시지이며, 왕께서 직접 선포하신 메시지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분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 나라에 최우선순위를 두라고 촉구하신다.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사복음서는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을 매우 강조한다. 주님은 항상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여러 방법으로 선포하셨고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핵심 주제였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면 그분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주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저는 이것을 세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나라를 어떻게 세우시는가?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시는가? 눅 17:20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묻는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여기 첫 번째 요점이 있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을 오해했다.
요한복음을 읽어 보면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 선생들과 함께 참으로 많은 시간을 논쟁하신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 논쟁하셨는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이들의 모든 개념과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언제 오는가? 우리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원한다. 우리는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그저 설교에 그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 언제 선생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 주겠는가?” 하였다.
빌라도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요 18:33-37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네가 스스로 왕이라고 말한다면 네 나라는 어디 있는가? 동일한 오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이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형태가 제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행 1:4-7.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는 보편적이었다.
사람들의 공통된 오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외형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며, 어떤 획기적인 행동의 결과로 온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위대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스라엘의 과거 그 화려한 과거가 회복되기를 원하였다. 구원자 메시아가 오면 큰 군대를 이끌고 원수를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예루살렘은 온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며, 그 구원자 메시야는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요 6:15에 방금 5천 명을 먹이는 엄청난 기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이들을 피하셨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러한 오해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조장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영적인 곳인 동시에 정치적인 곳이다. 교황은 정치적인 인물로서, 많은 나라들이 교황청과 대사를 교환하고 있다. 로마제국 때처럼, 교회와 국가가 연합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행한 모든 박해는 바로 이러한 연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개신교도 동일한 오류를 범한 적이 때때로 있었다. 세계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군대를 모으고 칼로 생명을 위협하면서, 사람들을 강제로 믿게 하려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오해는 우리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세기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가 가운데 하나는, 세상을 바꾸고 개혁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만들고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세상이 훨씬 더 나아지면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려면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직적인 운동과 켐페인을 벌이고, 불의와 전쟁을 규탄하라고 외친다. 이들은 예수님을 사회적 정치적 스승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이 주님이 다루신 오해들이다. 주님은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어떤 형태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답이 있는데, 모두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나와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과 함께 임하며 comes, 임했다 came. 누가복음 11:14-20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이 자연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귀신들과 모든 악한 것들보다 강하시다는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기적을 행하시고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실 때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입법이 아니며 정복하는 군대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다의 폭풍을 잠재우셨고, 눈먼 자를 고치시고, 저는 자를 고치시고,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모든 귀신을 내쫓으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분은 옥에 갇힌 세례요한에게 이 동일한 대답을 매우 극적인 방법으로 하셨다. 세례 요한조차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주님이 행하신 기적과 그분이 보이신 놀라운 권능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그분과 그분의 능력 가운데 임했다는 표시이다.
그 다음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라는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대답하신다. “너희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고 지금 그 나라를 보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는데도 보이지 않느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느냐? 능력이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 나라는 여기, 내 안에, 나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내게 주신 능력 가운데 있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벌써 임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제가 말하는 ‘교회’는 외형적 기관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으로 알려진 체제는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다. 로마 카톨릭은 화려함과 권세를 가진 세상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화려하고 힘 있게, 눈에 보이게 임하지 않는다. 국가 교회의 모습으로 임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교인들이 곧 교회인 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여러분은 교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슬프게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회에 외형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인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는 뜻도 아니며, 교회에서 활동한다는 뜻도 아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이 ‘비종교적 기독교’ 즉 교회를 폐쇄하고 종교 의식과 예배를 그치며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필요와 고통을 돌아볼 때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제가 의미하는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몸이다. 교회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 그분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몸이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교회이다. 주님은 그분의 참 신자들의 마음에서, 그분의 사랑에 매인 사람들의 마음에서 왕으로 다스리신다.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그분을 알기 원하고 그분을 섬기기 원하며 그분의 능력을 깨닫기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왕으로 다스리신다. 이것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형태이며, 현세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주요 형태이다.
주님이 육체로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있었다. 주님은 지금 그분의 백성 속에 계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다(고전12:27).
그러나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세 번째 형태는,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이다. 누가복음 17장에서 한 날에 “인자의 날”이 온다고 말씀하신다(22절). 그날에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외형적으로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임할 것이다.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세 번째 형태이다. 이것은 교회 시대의 끝을 의미한다. 그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 눈에 보이는 육체의 형태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구름 타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인자가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계1:7). 하나님 나라는 아주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임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신성의 위엄을 띠고 오실 것이며, 왕으로 다스리고 심판하시며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7-28). 바로 이것이다. 인자가 오셔서 그분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주님은 이것이 ‘새롭게 되는 것’이며, 장차 임할 가시적 형태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놀라운 메시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심판의 보좌를 세우시고,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분을 믿지 않는 자들은 누구든지 마귀와 악한 천사들과 함께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것이며 그분 앞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에서, 온 우주에서 악이 제거될 것이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이루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사11:6). 이것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오고 있다. 죄와 악이 제거될 것이다. 영광의 나라가 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 가운데 그분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며,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이 그분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것이다. 그때가 오고 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며,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다.
하나님 나라가 취하는 세 가지 형태가 이러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 가운데 있다. 나머지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저를 세 번째이자 마지막 큰 원리이기도한 우리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로 이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 그분이 모든 원수를 이기시는 영역, 그분이 모든 악을 마침내 제거하시는 영역임을 확인했다. 하나님의 교회에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이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내가 이 나라에 속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지 않는 바를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 중에서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만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간디는 여전히 힌두교에 남아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일부를 취해 수정하곤 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해도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할 수는 없다. 심지어 현대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이들 가운데도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촉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분은 이타심으로 사셨고, 약하게 되셨고, 세상이 자신을 몰아내며 무슨 짓이든 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분과 똑같이 하면 그분의 나라 안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그분과 같이 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모든 생각과 가르침이 거짓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가? 주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그분이 누구신지 인정할 때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첫 단계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으로 존경하고 찬양한다고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분이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을 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때에야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들어온다. 주님은 사실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가까이 왔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며, 내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본성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나를 구속하려고 육체로 오신 하나님으로 믿을 때,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그분의 의로운 가르침에 “아멘”이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은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이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8-19) “옛 사람에게 말하 바 —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자신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뜻이 며, 바리새인과는 달리 이렇게 말한다는 뜻이다. “그분의 말씀이 맞다! 그분은 우리가 모든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 나의 행동만큼이나 동기에도, 내가 실제로 손과 발로 하는 행동만큼이나 내 마음의 생각에도 주목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단지 나의 피상적인 행동을 보시는 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나의 마음을 살피신다. 하나님은 내게 절대적인 의를 요구하신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은, 나에 대한 그분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그 평가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주님은 내가 잃어버린 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눅19:10). 그분은 또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막2:17).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 자신은 잃어버린 자이며, 병든 자이며, 죄인이며, 소망 없는 자이며, 도저히 개선할 수 없을 만큼 악한 자이며, 그러므로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가? 이렇게 해야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 안에 들어온다.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할 때 여러분 안에 들어온다. “저는 제 자신을 구원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저는 잃어버린 자이며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자입니다.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다. 여러분이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는 여러분 자신을 그분의 구원 방식에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여러분은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해야 한다. 여러분은 그분의 율법에 대한 그분의 해석과 여러분에 대한 그분의 진단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러분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방법을 믿음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내어맡겨야 한다.
주님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주 분명히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린 분을 바라볼 때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절망을 느낄 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고 소망이 없는 죄인으로서, 주님의 발 앞에 나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심으로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해 들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고, 이것만이 해방과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 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샬롯 엘리엇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여러분이 절대적이며 완전하게 항복하고, 자신을 완전히 그분의 손에 내어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며, 여러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계21:6)임을 알며, 그분이 “골짜기의 백합화”(아2:1)요, “광명한 새벽별”(계22:16)이며 영원히 내 영혼의 “햇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과 여러분의 개인적인 구원자와 주님으로 인정한다. 여러분이 구하는 것은 그분뿐이며, 그분이 여러분의 전부라고 고백한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한다. 그를 알고 가까이 하고 따름으로써 마지막 날 그가 다시 오셔서 최종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에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여러분의 유일한 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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