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청교도 언약사상 : 개혁운동의 힘 1

강대식 2019. 1. 9. 11:15

I. 저자

 

원종천 교수

- 미국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ery (Ph.D., 역사신학 전공)

-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 전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 회장

- 저서,

칼빈과 청교도 영성 (도서출판 하나, 1994)

중세 영성의 진수; 성 버나드 (대한기독교서회, 2004)

존 칼빈의 신학과 경건 (대한기독교서회, 2008) 등

이 책은 1996년에서 1997년까지 1년 동안 안식년을 가지고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환교수로 연구하여 나온 결과물이다.


II. 1장 서론

 

영국에서 1620-1630년대의 미국 신대륙으로의 이주와 1640년대의 영국의 혁명이라는 거사들이 이루어진 데는 정치, 사회, 경제 종교의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투쟁의 초점은 영국의 종교인 기독교 신앙이었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까지 한 세기 동안 영국에서는 교회 개혁을 놓고 진통을 겪었고 이 진통은 국가 정치적인 내용으로 파급되었으며 결국은 미국 신대륙으로의 이주와 영국 혁명이라는 거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과정을 왕들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 정책 및 청교도와의 관계

비고

헨리 8세

(1509-1547)

- 1534년 영국을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영국교회를 개신교의 형태로 세움.

- 동기가 신앙적이거나 신학적인 것이 아니어서 지극히 제한적으로 개혁함

- 유렵 대륙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 윌리엄 틴데일을 처형함

()는

통치

기간

에드워드 6세

(1547-1553)

- 적극적인 개혁을 주도했고 유럽 대륙의 개혁 교회는 영국에 확실한 개신교 회를 세우기

  위하여 도움을 줌

- 단기간 통치로 교회 개혁의 열매를 다 맺지 못함

단기

통치

메리여왕

(1553-1558)

- 로마 천주교로 환원시키려는 작업을 함

- 수많은 영국교회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함

- 국민들을 더욱 개신교 쪽으로 기울게 함,

- 박해 기간 동안 유럽 대륙에 피난했던 개신교 성직자들은 유럽 대륙의 개혁 신학과

   교회 정치제도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음

- 취리히 계통 신학자들인 스위스 개혁교회를 형성한 츠빙글리와 그의 후계자 불링거, 제네

   바의 칼빈이 영향을 줌

단기

통치

엘리자베스 여왕

(1558-1603)

- 영국을 다시 개신교 국가로 복귀시킨다고 즉위하며 선언함

- 망명에서 돌아온 성직자들은 여왕의 교회 개혁이 미온적이고 확실하지 못하 다 평가함

- 이들은 즉위 첫 10년 동안 성직복, 예배형식 등과 같은 주변적인 내용으로 개혁을 부르짖음,

   이 때 청교도라고 불려 지기 시작함

- 1569년부터는 영국교회 정치제도 개혁운동을 펼치기 시작

- 1590년 정도까지 20년 동안의 청교도들의 반교회정치제도 운동은 실패함

제임스

1세

(1603-1625)

- 왕은 장로교주의의 배경을 가짐

- 청교도들은 교회개혁을 위하여 왕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왕은 청교도들 의 제안을 거부

   하고 도리어 왕 중심의 감독제도에 순응할 것을 강력히 요 구함

찰스 1세

(1625-1649)

- 청교도를 탄압함

-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꾸준히 설교 사역과 출판을 통하여 개인의 영적 개혁을 추구

   했고 엉국의 중산층과 신사계급(Gentry)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 시작함

- 1640년에 들어서면서 오랜 의회와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충돌하게 됨

- 청교도화 된 의회는 많은 국민들의 힘을 입어 왕에게 대항함

- 1642년 왕정파 군대와 의회파 군대가 전쟁을 함

- 1646년 전쟁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남. 이로인해 왕정제도와 감독제도를 폐지함

올리버

크롬웰

- 국가는 의회가 다스리는 의회제도를 택했고 교회는 장로교제도를 체택하기 로 결정함

- 호국경으로 재위 기간은 1653년에서 1658년까지.

 

 20년의 청교도 통치는 실패하여 무너지고 왕정이 복귀되며 영국교회는 왕정중심의 성공회 감독제도로 환원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청교도 통치의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분열이었다.

한 세기의 청교도 운동이 막판의 성공 후에 정치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들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보여준 노력과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개혁운동 과정에서 그들이 남긴 신앙, 정신, 사상은 후대의 현대 서구 문명에 개인신앙, 교회, 사회 그리고 국가적으로 많은 영향을 남겼다. 신대륙에서 완전히 새로운 교회와 사회공동체를 세웠고, 영국에서는 혁명을 일으켜 교회제도뿐 아니라 국가정치도 변혁시켰다. 무엇이 이러한 힘을 공급하였는가? 그 힘을 불어 넣어 준 그들의 영적이고 사상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본 주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한 세기가 넘게 청교도 성직자들이 먼저 스스로를 설득하고 사람들을 설득시키며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신앙적이고 사상적인 힘을 불어넣었던 내용은 바로 청교도 언약사상이었다.

언약사상은 유럽 대륙에서 소개되었지만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발전되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개인언약, 교회언약, 사회언약으로 발전시켰고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정리했다. 청교도 개혁운동은 바로 이 언약사상의 뒷받침으로 전개되었다. 본 주제는 청교도 운동을 역사적 측면으로 보면서 언약사상이 어떻게 그 운동을 이끌어 나왔는가를 볼 것이다.

청교도 언약사상은 사람들에게 자발적 참여의식을 낳게 했고, 이 자발적 참여의식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청교도 개혁운동 역사 가운데 언약사상이 어떻게 형성, 전개되었으며 자발적 참여의식이 어떻게 발생되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III. 1부 청교도 개인언약 사상


 츠빙글리로 시작된 언약사상은 불링거와 칼빈을 통하여 주장되었고 그 후 전개될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리적 터전을 마련했다. 또한 후대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발전되고 보완되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도 언약사상은 그들의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16세기 말 영국교회의 정치체제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개인적, 윤리적 경건이 청교도들에 의하여 대응책으로 나타나면서 개인언약 사상은 정밀성을 더해갔다.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며 경건을 유발시켜 윤리적인 개혁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 개인언약은 청교도 언약사상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교회 언약 사상이나 사회 언약 사상도 사실상 개인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다.

 

IV. 2장 개인언약 사상의 배경


1. 츠빙글리(1484-1531)와 불링거(1504-1575 )


 성경적 언약사상은 종교개혁 때에 개혁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언약사상에 대하여 언급이 없었고, 언약사상의 시작은 취리히의 츠빙글리였다. 츠빙글리가 성경적 언약개념을 소개했다면, 그것을 발전시키고 후세들에게 영향을 남긴 사람은 그의 후계자 불링거였다.

취리히에서 사역하는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언약개념은 당시 재세례파와 유아세례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나타나게 되었다. 재세례파의 유아세례 거부에 대항하여 츠빙글리는 유아세례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관계의 외적 징표라고 말했고, 유아는 하나님과 그 유아의 부모가 이미 맺은 언약관계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츠빙글리는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구약의 언약개념과 할례는 신약에서는 유아세례로 변형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내용적 의미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개혁신학의 기초가 되었고, 칼빈도 이것을 충실히 따랐다.

 

 하나님과 믿는 자들 사이의 언약관계에 있어서 쌍무적 계약의 의미는 츠빙글리에게는 없었고 불링거에게 나타났다. 츠빙글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구원이란 인간이 의무 조건인 믿음을 갖춤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믿음을 은혜로 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츠빙글리는 믿음이 구원을 위한 언약의 조건이라는 표현을 피했다.

 

 그러나 불링거는 이 점에서 츠빙글리와 달랐고, 또한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접근 방법과도 분위기가 달랐다.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 관계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중심으로 하는 일방적 관계를 중시했던 반면, 불링거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역할과 의무를 동시에 강조했다. 믿음이 구원을 위한 언약 조건이라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로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종교개혁 사상을, 그는 언약이라는 또 하나의 성경적 사상으로 종합 정리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당신의 주권과 은혜를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주장한다.

 

 불링거는 칼빈의 이중예정 사상이 아니라 단일예정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예정은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의 길에 가게 하는 것이지, 그 예정이 선택받지 않은 자들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이는 인간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는 쌍무적 언약사상과 잘 어울린다.

영국 청교도들은 츠빙글리-불링거로 이어지는 개혁교회 전통으로부터 먼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불링거의 언약사상은 초기의 영국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은 다음 세대의 청교도들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칼빈의 영향이 이들을 능가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 중심의 사상이 청교도 언약사상에 중요한 바탕을 형성하게 되었다.

 

2. 윌리엄 틴데일(1492 - 1536)

 

 영국에서 가장 먼저 언약신학을 소개한 사람은 윌리엄 틴데일이다. 헬리8세 때에 활동했던 그는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운동을 영국에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루터와 접촉이 있었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는 복음을 이해했으며 1525년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강도있게 해설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하고 정죄하며 복음은 그들을 해방시킨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동시에 믿는 사람들의 선한 행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기시켰다. 틴데일은 루터교가 강조했던 율법과 선행에 대한 조심과 경계에 비하여, 그것이 믿는 자들에게 주는 유익을 찾았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유익한 점을 제공한다. 첫째, 그것은 우리가 영생의 후손들이고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율법을 향하고 있으며,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것으로 육신을 길들이며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죄를 죽인다. 그것으로 더불어 매일같이 성령 안에서 점점 더 완전을 향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말살시키지 않도록 하며, 성령의 역사와 은사들을 꺼지지 않게 하며, 성령을 다시는 잃지 않도록 한다. 셋째, 우리는 그것으로 이웃에게 우리의 의무를 이행한다.

 

 틴데일은 믿는 자들의 선행에 대한 강조를 언약사상으로 설명했다. 틴데일은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에게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잘 이해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인 언약을 통해 인간의 윤리적 의무도 중요함을 인식시키기 원했다. 1528년 틴데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의 마음, 의도, 감정, 그리고 열정은 눈이 멀어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정죄 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우리 사이에 언약을 만드셨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와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틴데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약 개념을 통하여 성경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영국교회의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언약사상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약속의 내용을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피로 약속을 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든지 그의 이름으로 간구하면 주실 것이고, …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우리를 그의 자비와 은혜 하에 놓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배우기를 원하셨다.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도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주시며, … 그리하여 우리가 어떠한 정죄하에도 있지 않게 하신 것이다.”

언약사상에 나타난 텐데일의 윤리적 강조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공로적 의무이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은혜를 받았을 때에 율법을 지키고 언약조건을 이행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의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틴데일이 불링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언약사상이 불링거와 흡사한 점이 많이 있다. 그의 많은 표현들이 언약의 쌍무적 관계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인간의 책임과 윤리적 의무에 대한 강조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의 윤리적 의무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는 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침체되어 있는 영국교회의 신앙과 경건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했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인간이 수행해야 할 조건적 성격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로지 믿음을 통한 구원”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3. 존 칼빈 (1509 - 1564)

 

 칼빈에게 언약사상은 비록 중심적이고 포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칼빈의 언약사상은 츠빙글리처럼 유아세례를 뒷받침하며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상적 도구로 사용되었고, 나아가서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은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과 근본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언약 하에 구약 선조들에게 주셨던 율법들도 신약에 살고 있는 믿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나옴을 가르쳤다.

 

 칼빈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인간의 역할을 중시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윤리적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 측면이며, 곧 성화와 윤리의 강조로 연결된다. 즉,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인간이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거룩해야 할 의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무는 하나님의 은혜 중심적 언약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과 맺으신 언약관계는 근본적으로 은혜언약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을 약속하신 언약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후손으로 언약관계의 기반을 이루고 계신다. 인간의 거룩과 윤리적 책임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언약 하에서 말하고 있다.

 

 칼빈은 그의 언약상상에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뿐 아니라 차이점도 지적했다. 구약의 율법은 은혜언약에 속해 있는 우리에게도 윤리적 의미로 적용되지만,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은 이유로 아직도 문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신약시대에는 그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됨으로 영적인 의미를 충만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로마 천주교와 투쟁하며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현저하게 드러냈던 것에 반하여, 칼빈은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약과 신약의 연결성을 발전시켰다. 칼빈은 이 연결성 구축을 언약사상을 통하여 했고, 이것은 재세례파의 도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언약사상은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우러나왔음을 살펴 보았다.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할과 의무에 대하여 정리하면 칼빈의 은혜언약 전통에도 인간의 윤리적 책임과 거룩의 의무가 분명히 있고, 볼링거의 언약신학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이 확실히 존재한다. 단지 일반적인 인식이 칼빈의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더 강조한 것이고, 불링거는 연약개념을 놓고 하나님과 인간 양쪽의 역할을 강조하며 특히 인간의 의무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두는 영국의 연약사상의 배경이 되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조정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