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7 주일설교
본문: 요 5:22-24
제목: 사망에서 생명으로
1.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사람은 한번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
심판은 현재 역사 중에도 하시지만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 날 이루어진다.
그 심판의 권한을 아들에게 다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 아들이 중보자이시며 인자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대적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아들이 다시 오실 때
산 자와 죽은 자들을 다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이 미래의 사실을 성경대로 고백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해 관심이 없다.
자유로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개념 전체를 싫어하고 혐오한다 .
심판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보편 구원론을 믿는다. 속지 말라.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에서 주님은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을 구분하여 말씀하신다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5절은 첫째 부활 즉 중생,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28절은 육체적이며 물리적인 부활을 말한다.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신다 .
성경이 말하는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 날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 몸이 부활할 때 일어난다.
온 세상이 모인 자리에서 모든 개개인의 운명이 공포되는 엄청난 공개적 사건이다.
누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므로 심판을 받지 않으며,
불신자들만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시에 일어나고 두 집단의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다 .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1-15)
그리스도인들이 받지 않는 심판은 정죄의 심판, 형벌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책에 따라 상급의 심판을 받는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0)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때에 칭찬을 듣고 대단히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이 일을 하였나이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매를 많이 맞을 종과 적게 맞을 종에 대해 말씀하시고,
바울은 그 날이 각 사람의 공적을 밝힌다고 말한다.
바울은 신자들 사이에 구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공적이 불로 시험받을 것이다.
사람의 공적은 완전히 타 버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공적은 실제로 계수되고 차이를 만들어 낸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41)
그것은 우리의 칭의가 아니라 상급과 관련된 것이다.
상급을 위한 심판이 위대한 심판의 날과 함께 있을지,
아니면 그 후에 있을 것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모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주님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일이 내세에서 우리의 영원한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준비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5:23)
그리스도로 오신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죄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거룩한 영광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공의의 심판을 받으셨다.
인자의 희생 제물과 중보와 의롭다 하심이 없으면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통치권을 회복할 수 없다.
이 모든 구원과 복을 아들을 통해 회복하게 하셨다.
그 아들을 보내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공경하지 않는 자를 받으시겠는가?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믿어도 아들은 그냥 사람으로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경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아들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셨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 성자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똑같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영광이 동등하시다.
이에서 어긋하는 것은 다 이단이다.
기독교 역사는 아들의 영광, 성령의 영광에 도전하고 딴 소리하는 이단과 싸워왔다.
아들은 아버지가 낳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아들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들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도 다 이단이다.
아들은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하며 섞이거나 혼동되지 아니한다.
강보에 싸인 인자일 때도 그분의 신성은 함께하셨고,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때도 그분의 인성은 함께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 하나님을 똑같이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부인하는 자이다.
유대인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아들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단들이 현재에도 교회 안과 밖에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공경해야 한다.
인간의 어리석은 지성과 비뚤어진 종교관이
아들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아들의 인성을 부인하는 폭거를 행해 왔다.
인간의 이성과 세상의 지혜로는 어리석게 보이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이었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들만 이해하고 감동하고 헌신하는 진리이었다.
예수님의 인성만 좋아하는 자유로운 신학, 세상 지혜는 큰 이단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교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큰 이단이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참 그리스도인이다.
3,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영생을 얻는 자, 구원을 얻는 자는 ‘내 말’을 듣는 자이다.
‘내 말’은 이제 성경 말씀이고, 성경대로 믿는 자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를 아버지가 보내셨음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그 아들의 이름을 믿고 영접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이는 혈통으로도 육정으로도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이다.
이들은 보좌 앞에 있는 책들에 의한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
은혜로 믿고 영접한 사람은 그 순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그의 삶의 영역이 옮겨진다.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한번 옮겨진 영역은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우리의 행위로 인해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에,
우리의 죄로 인하여 구원을 잃고 이전 영역으로 되돌아 가는 일은 결코 없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그리스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그 행함에 따라 상급과 영광을 받는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어 새 예루살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하시니라”(46)
하늘나라에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불행이나 비극이나 우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게 행복하고 지극한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급과 영광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행함이 결정한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보게 될 것이지만 가장 신실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심판으로 인해 최후의 영원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최종적 운명을 알도록 도와준다.
21장에서는 신자의 운명이 완벽하게 드러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얼마나 멋지게 묘사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우리는 슬픔이나 탄식이 없는 완벽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사야가 11장과 65장에서 예언한 일이 성취될 것이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모든 것, 심지어 자연 자체도 영화롭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된 세상에서 영화된 몸을 입고 살 것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상태이자 영원한 운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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