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토마스 왓슨, '회개', 3장 참된 회개의 본질 1 (김영희)

강대식 2019. 5. 14. 18:13

3 장 참된 회개의 본질

 

복음적인 회개가 무엇인가? 회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이며, 죄인은 이 회개를 통해 안으로 겸손해지고 밖으로 개혁되는 것이다. 회개는 여섯 가지의 특별한 성분으로 만든 영적인 약이다.

 

1. 죄를 봄

2. 죄를 슬퍼함

3. 죄를 고백함

4. 죄를 부끄러워함

5. 죄를 미워함

6. 죄에서 돌아섬

이중 한 가지라도 빠진다면 약의 효능은 잃는다.

 

- 첫 번째 성분 : 죄를 봄 -

 

이 약의 첫 번째 부분은 안약이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고 헤아려야 하며 자신의 마음의 역병을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죄에 대해 겸손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 번째 피조물은 빛이었다. 그러므로 회개자의 첫 번째 일은 깨달음, 곧 빛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못 볼진대 회개 또한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잘못은 잘도 찾아내면서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못 본다. 자신들은 마음이 선하다고 외친다. 그의 몸과 영혼이 함께 살며 일하지만 전혀 서로를 모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마귀는 그들의 눈을 가리고 두건을 씌워서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 사람들은 마음의 눈이 멀었다.

 

- 두 번째 성분 : 죄를 슬퍼함 -

 

슬퍼하다라는 히브리어는 영혼이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 박히다라는 뜻이다. 참된 회개는 바로 이것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못이 자신들의 옆구리를 찌른 듯 통곡한다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회개자들은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린다. 제사장들이 수족을 씻는 놋대야는 두 대야를 상징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야이며, 또 하나는 눈물의 대야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피의 대야에서 씻어야 하고, 회개로 눈물의 대야에서 씻어야 한다. 죄에 대한 이 슬픔은 표면적인 슬픔이 아니다. 이 슬픔은 거룩한 고통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깨어진 마음이다.(51:17)

 

- 이 슬픔은 다음과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

첫째, 그리스도가 귀하게 된다. 이제야 그리스도가 진실로 그리스도이시고, 자비가 진정으로 자비이다. 상처입고 피 흘리는 사람이라야 의사를 진정으로 반가워한다!

둘째, 죄를 몰아낸다. 죄는 슬픔을 낳고 슬픔은 죄를 죽인다. 거룩한 슬픔은 영혼의 독소를 배출시키는 약초이다. 눈물의 소금기가 양심에 쓴 구더기를 죽인다.

셋째, 든든한 위로의 방편이 된다. 회개자는 울며 씨를 뿌리지만 추수의 기쁨을 누린다.(126:5)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영혼을 격동케 하심은 천사가 병자들의 치유를 위해 연못을 휘젓는 것과 같다. 하지만 참된 슬픔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슬퍼해야 한다.(고후7:9)

 

1. 하나님의 뜻에 맞는 참된 슬픔은 내적이다.

1) 참된 슬픔은 마음의 슬픔이다. 위선자의 슬픔은 얼굴에 몰려 있고, 마음까지는 찢어지지 않는다. 참된 슬픔은 내출혈처럼 깊다. 마음은 죄로 인해 피를 흘린다.

2) 참된 슬픔은 마음의 죄에 대한 슬픔이다. 마음은 죄가 처음 발생해서 커지는 장소이다. 그는 쓴 뿌리 자체만으로도 슬퍼한다.

 

2.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순수하다.

참된 슬픔은 형벌보다는 범죄 자체를 슬퍼한다. 하나님의 법이 침해당했고 그분의 사랑이 모욕당했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은 죄의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해서만 슬퍼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법이 없다. 다윗은 지금 무서운 칼이 내 앞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내 죄가 내 앞에 있다고 말한다. , 그토록 좋으신 나의 위로자를 내가 슬프게 했음이여! 이것이 나의 가슴을 깨뜨리는 도다!

 

3.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믿음과 함께한다.

참된 슬픔은 믿음과 섞인다. 영적으로 가라앉는 마음은 믿음의 도르래로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의 죄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듯이 하나님의 약속 또한 언제나 우리 앞에 있어야 한다. 뱀에 물려서 죽게 생겼으면 우리의 구리 뱀이신 그리스도를 올려다보아야 한다. 영혼에 믿음의 여명도 없이 울기만 한다면 그것은 겸손의 슬픔이 아니라 절망의 슬픔이다.

 

4.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큰 슬픔이다.

1) 슬픔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다.

선천적으로 기질이 강해서 쉽게 몸을 굽히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옹이진 나무에는 더 큰 쐐기를 박아 넣어야 하듯, 이들은 특히 더 비통해하며 낮아져야 한다.

남들보다 더 사악한 범죄자들이 있다. 죄의 종양을 바늘로 터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으로 터뜨려야 하는 사람도 있다.

더 고귀한 섬김에 뜻을 두고 하나님의 빛나는 도구로 쓰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 교회의 기둥으로 삼고자 예비하신 사람들은 더욱더 베이고 깎여 나가야 한다.

 

2) 죄에 대한 슬픔은 세상 무엇을 잃은 것 못지않게 커야 한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12:10). 죄에 대한 슬픔은 세상의 슬픔을 넘어서야 한다.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눈물과 삭발을 금하시는데(16:6, 22:10) 이로써 우리에게 죄에 대한 슬픔이 무덤 앞의 슬픔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르시는 것이다. 죽은 자의 장례는 결국 친구가 떠나는 것이지만, 죄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다.

죄에 대한 슬픔은 다른 모든 슬픔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야 한다. 담석증과 통풍이 동시에 찾아올 때 담석의 고통이 통풍의 고통을 집어삼키는 경우와 같다. 죄에 대한 슬픔은 우리에게 크나큰 이득과 즐거움을 가져다 준 그 죄들을 기꺼이 떠나보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충분한 정도의 슬픔에 도달한 것은 죄에 대한 애착이 말끔히 씻겨 나갔을 때였다.

 

5.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배상과 연관되기도 한다.

부정한 거래로 타인에게 재산상의 손실을 입힌 바는 명백히 배상해야 한다.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5:7). 아우구스티누스는 배상 없이는 사면도 없다라고 말했고, 래티머 역시 부당하게 취한 재산을 돌려주지 않으면 지옥에서 뱉어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1) 어떤 사람이 부당한 방식으로 남의 재산을 취했는데 피해자가 죽었다면, 가해자는 불의하게 취한 재산을 피해자의 상속인이나 후계자에게 반환해야 한다. 이들마저 살아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2) 가해자가 죽은 경우는, 가해자의 상속인이 배상해야 한다. 배상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물려주게 될 것이다.

3) 돌려줄 능력이 없을 경우는, 하나님 앞에 깊이 겸손해야 하며, 주께서 형편을 돌아보시면 언제든 온전히 배상하겠다고 피해자에게 약속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가상한 뜻을 받아 주실 것이다.

 

6.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변함이 없다.

순간적으로 잠깐 흘리는 눈물은 소용이 없다. 참된 슬픔은 습관처럼 지속적이어야 한다. 여러분의 영혼의 질병은 만성적이어서 빈번히 재발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회개함으로써 꾸준히 스스로를 치료해야 한다.

 

- 참된 슬픔이 전혀 없어 회개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

교황주의자들은 회개의 핵심을 도외시한 채 모든 회개의 행위를 금식과 고행과 순례로 채우는데, 여기에 영적인 슬픔은 전혀 없고 마음을 찢지 않는다.

쾌락적인 개신교도들은 참된 슬픔을 아예 모르는 문외한들이다. 이들은 진지한 생각을 못 견뎌할 뿐 아니라, 죄 따위의 문제로 고민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오래도록 살았지만 하나님의 병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려 본 적이 없고 상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이들은 재산이 없어지면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며 몸부림치지만 죄로 인해 영혼의 몸부림을 겪는 경우는 전혀 없다.

 

- 두 종류의 슬픔이 있다.

논리적인 슬픔으로 이는 정신의 행위로서 죄를 불쾌하게 여기며 그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고통스러워하는 쪽을 선택한다.

정서적인 슬픔으로 이는 무수한 눈물로 표현된다. 첫째 슬픔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서 볼 수 있지만 눈가에 이르는 둘째 슬픔은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눈물 많은 이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 회개가 언제나 우리 영혼 안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특별히 더 우리의 회개를 새롭고 깊게 해야 하는 특별한 시기가 있다.

주님의 만찬을 받기 전이다. 이 영적인 유월절은 쓴 풀과 함께 먹어야 한다. 회개의 마음이야말로 성찬에 임하는 마음이다. 죄의 맛이 쓰면 쓸수록 그리스도의 맛은 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한 회개자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나의 붉은 상처로 너를 치유하라

 

임종을 맞을 때이다. 이때는 오로지 울어야 한다. 이제 천국을 향한 마지막 절차만 남았으니 바로 이때 우리의 눈물로 빚은 최상의 포도주를 내놓아야 한다. 내 허물을 넣어 두신 자루는 가득찼지만 내 눈물을 담아 두신 병은 비었으니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으며, 그분께 더 많은 덕을 배워 더 많은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했으니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이제 육신을 떠난 영혼은 천국까지 눈물의 바다를 헤엄쳐 가야 한다.

 

- 세 번째 성분 : 죄를 고백함 -

 

슬픔은 대단히 격한 감정이므로 배출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울음을 통해 눈으로 나오고 고백을 통해 혀로 발산된다. 그레고리 나지안젠은 고백을 일러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한 약이라고 했다. 고백은 스스로를 고발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우리 스스로를 고발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자기 고발로 사탄의 고발을 방지한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참소)하는 자라 불리는 사탄이 제아무리 이러한 죄목을 들이대며 우리를 고발해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은 이미 스스로를 고발했다. 그러므로 사탄아 너의 소송을 기각한다. 너의 고발은 너무 늦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11:31)

 

1. 고백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악한 자들의 고백은 고문받는 자들이 실토처럼 어쩔 수 없이 뱉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참된 고백은 감람나무에서 향유가 흘러나오고 벌집에서 꿀이 떨어지듯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내린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15:18). 탕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죄를 묻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2. 고백에는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마음은 죄를 깊이 증오해야 한다. 참된 고백은 마음에 도장처럼 뚜렷한 상처 자국을 남긴다. 다윗의 영혼은 죄를 고백하면서 무거운 짐을 진 듯 눌렸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38:4). 죄를 고백한다는 것과 죄를 아프게 느낀다는 것은 다르다.

 

3. 고백은 진심에서 나와야 한다.

위선자는 죄를 고백하지만 여전히 그 죄를 사랑한다. 참 그리스도인은 이보다 더 정직하여 마음은 혀와 일치한다. 그는 자신이 고백하는 죄를 확신하고, 확신한 그 죄를 혐오한다.

 

4. 고백은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악인은 주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말하지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한다. 참된 회개자는 자신의 죄를 조목조목 인정한다. 부상당한 자가 의사에게 가서 모든 상처를 보여주며 상처를 일일이 말하듯, 애통하는 죄인자기 영혼의 여러 질환을 일일이 고백한다. 다니엘은 민족에게 화를 불러온 죄를 읊는다.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9:6).

 

5. 근본적인 죄를 고백해야 한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그는 자신의 본성이 오염되었음을 인정한다. 이 죄는 철에 쓴 녹이요, 예복에 묻은 얼룩과 같다. 우리 안에는 독초나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있다. 우리의 본성은 만 악의 구덩이요 온상이며, 거기서 나온 추악한 것들이 세상으로 퍼져나가 거룩한 것들을 오염시킨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고 우리의 성화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 본성의 죄이다.

 

6. 죄를 유발하는 모든 환경 및 죄를 가중시키는 요인 역시 함께 고백해야 한다.

복음을 알고도 짓는 죄는 의심의 여지없이 더 무겁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 뜨리셨도다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78:31-32).

 

7. 고백하되 모든 죄를 철저히 우리 탓으로 돌려서 하나님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주께서 섭리의 엄중함을 보이시며 무서운 칼을 빼어든다 해도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무죄를 선언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8. 죄를 고백하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백을 통해 죄를 죽이지만 그 뒤로는 전보다 더 빨리 자라도록 놓아두는 것 같다. 우리가 고백으로 죄를 토해 내고서 다시 이 토사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반역을 자백한 뒤 새로이 역모를 꾸미는 자를 어떤 왕이 용서하겠는가?

 

적용 1) 고백은 회개의 필수적인 성분인가? 여기에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한 고발장이 있다.

첫째, 죄를 숨기는 자, 그들은 죄를 제거하기보다는 숨기고 싶어한다. 그들이 혀를 움직여 고백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며 그들의 반역을 밝혀내실 것이다.(50:21) 사람들이 가슴 안쪽에 꾹꾹 눌러 숨겨둔 부정과 불의는 어느 날 그들의 이마에 다이아몬드 촉으로 쓴 듯 선명히 새겨질 것이다.

 

둘째, 죄를 고백하되 어중간하게 고백하는 자, 그들은 푼돈은 내놓고 큰돈은 숨긴다. 그들은 간과 폐는 썩었는데 배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정확히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명백히 인식하고 양심이 고발하는 죄는 자비를 바라는 한 반드시 고백해야 한다.

 

셋째, 죄를 깎아내고 완화하는 식으로 고백하는 자,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죄를 줄여 보려고 한다. 아담은 죄를 무겁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탓으로 돌렸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3:12). 이러한 성향은 대물림된 것이다. 우리는 죄를 덜어내고 줄이는 데 얼마나 능한지 모른다.

 

넷째, 죄를 대놓고 변호할 정도로 고백과 동떨어진 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죄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들며 방어한다. 사람이 죄를 범할 때는 마귀의 종이 되고, 죄를 변호할 때는 마귀의 변호사가 된다. 변호사의 비용은 마귀가 댈 것이다.

 

적용 2) 진실하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가 회개하는 자임을 보이자.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23:41).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첫째, 거룩한 고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겸손한 고백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의 입에서 나온 간곡한 호소로 인해 그분께서 책망을 거두신다면 그분께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동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인내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은혜가 커진다.

 

둘째, 고백은 영혼을 겸손하게 하는 수단이다. 자신을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으로 인정한다면 당연히 자랑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해도 거기에 많은 악이 함께 들어 있음을 인정한다.

 

셋째, 고백은 괴로운 마음을 해소한다. 양심이 죄책감으로 끓어오를 때 고백이 배출구를 마련한다. 오래 묵은 종기를 째서 터뜨림과 같으니 회개자는 그제야 살 것 같아진다.

 

넷째, 고백은 죄를 몰아낸다. 죄는 나쁜 피이며 고백은 혈관을 열어 이 나쁜 피를 내보냄과 같다. 고백은 구멍난 배 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퍼냄과 같다. 그렇게 죄를 퍼내지 않으면 영혼의 배는 가라앉을 것이다.

 

다섯째, 죄를 고백하는 영혼에게는 그리스도가 귀해진다.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말하는 순간 그리스도가 내게 얼마나 보배로운지 모른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7:25). 빚진 자가 채무를 고백하는데 채권자가 빚을 독촉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들을 지정하여 그 빚을 대신 갚으라고 한다면 빚진 자로서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겠는가? 값없이 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클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 얼마나 존귀해지겠는가?

 

여섯째, 죄의 고백은 용서의 통로가 된다. 탕자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순간, 그의 아버지는 마음이 풀어져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요일1:9). 사도는 왜,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말하지 않고 의로우셔서 용서해 주신다고 말하는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엄히 약속하셨으니,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사람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이 보증한다.

 

일곱째, 죄를 고백하라는 이 명령은 합리적이고 쉽다.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해를 끼쳤을 때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보다 합리적인 것이 있겠는가? 은혜의 언약 아래에서는 우리가 채무를 고백하기만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실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방편으로 겸손한 회개보다 쉽고 간편한 길을 생각할 수 있는가? “다만 너는 너의 죄를 깨달아라”(3:13) 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숫양을 잡아 바쳐서 네 죗값을 치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너 스스로 자신에 대한 고발장을 작성하고 유죄를 인정하기만 하라. 그러면 틀림없이 사면을 받으리라

 

적용 3) 양심의 문제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람에게 고백할 의무가 있는가? 가톨릭교도들은 신부에게 비밀고백을 강력히 주장한다.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사람에게 고백은 찬성하지 않으나 다음의 경우에는 반드시 사람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모두가 수군대는 죄를 짓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실족케 한 경우, 당사자는 공개적으로 명백히 자신의 회개를 보여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 죄를 고백했지만 양심이 여전히 무겁고 마음에 평안이 없을 경우, 그는 사려 깊고 경건한 친구들에게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들이 조언하며 도와줄 것이다. 양심을 찌르는 가시가 있을진대, 뽑아 줄 사람을 활용함이 마땅하다.

 

셋째,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명예를 훼손한 경우, 다른 이의 평판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거나 거짓 증언으로 타인에게 재산상의 손실을 입힌 사람은 반드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형제에게 먼저 가서 잘못을 고백하고 그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일이 허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