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참된 회개의 본질 Π
- 네 번째 성분: 죄를 부끄러워함 -
얼굴에 드러난 붉은 색은 덕의 색깔이다. 죄로 인해 마음이 검어지면 은혜가 부끄러움을 불러일으켜 얼굴을 붉게 만든다. 회개는 거룩한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죄인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피가 없다면 얼굴이 붉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1. 모든 죄는 죄의식을 만들어 내고 죄의식은 대개 부끄러움을 일으킨다.
죄 없던 시기의 아담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하지만 죄를 지어 자신의 영혼을 훼손하는 순간 그는 부끄러움을 알았다. 죄는 지금까지 우리의 피를 더럽히고 있다. 마땅히 우리는 거룩한 겸손과 부끄러움을 보여야 한다.
2. 모든 죄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태도가 있고, 이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행2:5) 우리는 까닭도 없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우리가 무슨 까닭으로 하나님을 지겨워해야 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론의 머리에서부터 거룩한 황금 기름의 축복이 우리에게 흘러내렸다. 이토록 좋으신 하나님의 친절을 욕되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나님의 자비를 화살로 만들어 그분께 되쏘고, 그분의 은총으로 오히려 그분께 상처를 입힘이여! 배은망덕은 하나님께서도 기막혀 하실 만큼 큰 죄이다. 이러고도 우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지 않는단 말인가?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려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사1:2)
3. 죄는 우리를 벌거숭이로 만들었고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죄는 우리의 거룩한 흰옷을 벗겼다. 이로 인해 우리는 벌거벗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추한 자들이 되었으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4.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를 수치스럽게 했으니, 우리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유대인들은 그분의 손에 갈대를 쥐어 주고, 얼굴에 침을 뱉었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로서 지극히 존귀하신 분이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수치는 없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수치를 당하셨으니 우리 또한 우리의 죄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 않겠는가? 그분께서는 홍포를 두르셨다면 우리의 얼굴 또한 피처럼 붉어지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태양마저 얼굴을 붉히다가 끝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을진대, 우리가 그 태양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5. 우리가 저지르는 많은 죄들은 마귀의 부추김에 의한 것이니 이 또한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탄의 능력으로 잉태한다. 처녀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했지만, 우리 마음에 교만과 욕망과 원한이 잉태되는 경우는 대부분 마귀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저지르는 많은 죄들이 옛 뱀과 음행에 의한 것이니 부끄러운 일 아닌가?
6. 죄는 키르케의 마법처럼 사람들을 짐승으로 만든다.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죄인은 사람의 머리를 한 돼지이다. 그들은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욕망과 분노에 휩쓸려 정신을 못 차린다. 우리가 이처럼 우리의 본 모습이하로 추락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에게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이성은 어두워졌으며, 양심은 마비되었다. 우리 안에는 천사보다 짐승이 많다.
7. 모든 죄는 어리석다.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생명의 양식보다 썩어질 양식을 위해 더 많은 노고를 바친다면 어리석은 자 아닌가? 육신을 지키다가 영혼에 상처를 입는다면 어리석은 자 아닌가? 조끼가 상할까 싶어 팔이나 머리로 칼날을 막으려는 자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땅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유산으로 삼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8.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이교도의 죄보다 한결 무거우니 마땅히 이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이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빛을 거스르는 셈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한결 더 명백한 확신을 거슬러 죄를 짓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모에 염색하듯 더 명백한 죄, 혹은 저울에 더 큰 추를 얹듯 더 무거운 죄이다.
9. 우리의 죄는 마귀들의 죄보다 중하다.
타락한 천사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피를 욕되게 하는 죄는 짓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귀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들은 배반하자마자 지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바닥까지 긁어 썼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악함을 동정하시고, 우리의 뻔뻔스러움을 참아 주셨다. 그분의 성령께서는 거듭 거절당하셨지만 한결같이 우리에게 호소하셨고, 앞으로도 늘 간청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하심마저도 갉아먹고 결국 우리를 연민하시는 것조차 지겨워하시게 만들었다.(행15:6)
마귀들은 결코 본보기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를 짓고 최초의 본보기가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천사들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고, 세계가 홍수에 감기고 소돔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보고서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향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우리의 죄가 마귀들의 죄보다 클진대, 이는 명백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적용Ⅰ) 부끄러움은 죄의 성분인가? 많은 이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죄를 지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처럼 부끄러운 것은 없다. 주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렘6:15) 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람 외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피조물은 없다. 짐승들도 두려움과 고통은 느끼지만 부끄러움은 알지 못한다. 죄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이 거룩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자랑스러워하고, 영광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영광스러워해야 할 것을 외려 수치로 여긴다. 그들은 죄를 굉장한 멋으로 안다. 욕설꾼들은 욕이 들어가야 멋있다고 생각하고, 술꾼들은 두주불사를 대단히 자랑으로 여긴다. 이들이 전능자의 입김으로 일곱 배나 뜨거워진 풀무 불에 들어갈 때도 죄를 자랑하게 두자.
적용 2) 겸손한 부끄러움으로 우리가 회개하는 자임을 보이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스9:6)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죄로 인하여 거룩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확신하건대, 지금 우리가 죄를 많이 부끄러워할수록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는 그만큼 덜 부끄러울 것이다. 심판 날에 거룩한 자들의 죄가 언급된다면 그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자 함이 아니요,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 은혜의 부요함을 드높이고자 함이다.
- 다섯 번째 성분 : 죄를 미워함 -
미움은 두 가지로 역겨움으로서의 미움과 증오로서의 미움이 있다.
첫째, 역겨움으로서의 미움 “너희가 너희의---온갖 악과 역겨운 일들 때문에 너희 자신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겔36:31) 육신의 구역질을 유발하는 어떤 것을 싫어할진대 양심의 구토를 일으키는 어떤 것은 더더욱 싫어할 것이다. 죄를 버리는 것보다는 미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두려움으로 인해 죄를 버리는 것보다 죄를 역겨워하고 미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죄를 혐오한다는 증거이다. 죄를 미워해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천국을 그리워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가장 귀한 때는 우리 스스로 문둥병자가 될 때이다.
둘째, 증오로서의 미움 회개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고자 한다면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가 있는지 보면 된다. 건전한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해서 죄에 대한 증오로 끝난다.
- 죄에 대한 진정한 미움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마음이 죄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다.
혀를 통해 죄를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서 마음이 죄를 싫어해야 한다. 그래야 죄가 제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싫어할 수 있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미움이 총체적이다.
죄에 대한 진정한 미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첫째, 미움은 우리의 정신적 기능과 관련하여 총체적이어야 한다. 생각으로만 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으로도 죄를 싫어해야 한다.
둘째, 미움은 대상 자체와 관련하여 총체적이어야 한다. 거짓된 길은 어떤 길이든지 미워한다.(시119:104) 바울은 죄의 충동을 미워했다.(롬7:23)
3. 죄에 대한 미움이 모든 형태의 죄를 대상으로 한다.
거룩한 마음이 죄를 싫어하는 까닭은 죄가 근본적인 오염원이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은 죄가 저주를 불러오기 때문에 싫어할 뿐 아니라 전염되기 때문에도 싫어한다. 뱀이 물기 때문에 싫어하고 또한 독이 있으므로 싫어한다.
4. 죄에 대해 단호하다.
진정한 미움이라면 이제부터 죄와 화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분노는 화해할 수 있을지 모르나 미움은 그럴 수 없다. 죄는 두 번 다시 좋게 봐줄 수 없는 아말렉 족속이다.
5. 우리의 죄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에도 대항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분노로 환전상들을 채찍질하여 성전 밖으로 내쫓았다. 바울은 베드로가 비록 사도였지만 그의 이중적인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재판관이 분노하는 데는 기염을 토하면서 악습을 제압하는 데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죄를 적대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개의 문외한들이다. 그들 안에 죄가 뱀의 몸속에 독이 있는 것처럼 있다. 뱀에게는 이 독이 자연스러운 것이니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룩한 이들에게 죄는 눈엣가시 같은 것이요, 악한 자들에게는 머리에 쓰는 관과 같은 것이다. 죄를 범하는 것보다 죄를 사랑하는 것이 더 악하다. 구정물 속에서 구르기를 사랑하니 마귀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의도적인 죄는 속죄제로도 씻어낼 수 없다.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전9:3) 죄를 사랑하고 제 죽음이 될 것을 껴안으며 저주를 붙들고 희롱하니 마음에 광증이 있는 것이다.
질문) 죄의 어떤 면 때문에 회개자가 죄를 미워해야 하는가?
대답) 죄는 저주스러운 것이며 더할 수 없이 흉측한 괴물이다.
첫째, 죄가 어디서 처음 나왔는지 그 기원을 보면, 죄는 지옥에서 유래한다. 죄는 악마의 고유 업무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정하는 일에 관여하시지만 그 죄의 실행에 관여하는 자는 사탄이다.
둘째, 죄를 그 본질 면에서 보면, 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멸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며, 하나님을 지치게(사7:13)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극악무도한 죄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이다.
셋째, 죄를 그 비교 대상인 고통과 지옥과 비교해 보면, 죄가 더 나쁘다. 고통의 원인은 죄이고, 원인은 결과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하며(시119:71), 고통은 회개를 이끌어낸다. 독사는 두드려 맞으면 독을 뱉어 내듯, 하나님의 회초리로 맞을 때 우리는 독을 뱉는다. 고통은 저주를 막아 준다. 이처럼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하지만 죄는 전혀 좋은 것이 없다. 고통은 육신에 작용할 뿐이지만 죄는 거기서 더 나아가 마음을 더럽히고 감정을 흩뜨려 놓는다. 고통은 개선하지만 죄는 파괴한다. 고통은 목숨을 빼앗을 뿐이지만 죄는 영혼을 앗아 간다. 고통에 시달린다 해도 양심은 평화로와서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찬송할 수 있다. 하지만 죄를 범하면 양심이 끔찍스럽게 무서워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며 상처를 입히신다면 그것은 은혜와 성령의 위로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거두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가장 큰 심판은 바로 마음껏 죄를 짓도록 방치하시는 것이다.(시81:12)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로서는 당연히 그 죄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지만 죄는 결코 그분의 작품이 아니다. 죄는 마귀의 피조물이다. 지옥의 고통에도 좋은 점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지만, 죄는 최악의 불의일 뿐이다. 하나님에게서는 그분의 영광을, 그리스도에게서는 그분의 속량을, 영혼에게서는 그의 행복을 강탈해 가는 것이 바로 죄이다.
넷째, 죄를 그 발생과 결과라는 면에서 보면, 죄는 육신을 온갖 비참과 불행에 노출시켰다. 우리는 울면서 이 세상에 왔다가 신음하며 저 세상으로 간다. 죄는 온갖 불행이 군대처럼 몰려나오는 트로이 목마이다. 죄는 우리의 무덤을 판다.
죄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고결과 위엄의 근본이었던 하나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태곳적의 영광으로 둘러싸였던 아담은 왕의 문장을 착용하고 오는 특사 같았다. 그에게 왕의 문장이 있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공경했지만, 이제 문장이 벗겨지니 누구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죄가 우리에게 이런 치욕을 안겼으며,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아 그분의 아름다우신 모습을 영원히 못 보게 할 수도 있다. 죄가 그토록 악한 것일진대 우리는 마땅히 격분해야 한다.
- 여섯 번째 성분 : 죄에서 돌아섬 -
마지막으로 회개를 뒤에서 떠받치는 개혁이 남았다. 울어서 죄를 내 보내고 돌아서는 이 두 행위는 하나가 된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겔14:6) 죄에서 돌아선다는 것은 죄를 버리는 것이고 죄를 멀리 집어던지는 것이라고 한다.(사55:7) 바울이 뱀을 불 속에 던져 넣은 것과 같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 회개의 생명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돌아서는 바로 그날, 스스로에게 영구적인 단절을 선언해야 한다. 죄에서 돌아선다 함은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는 뜻이다.
이제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부싯돌처럼 단단한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진다. 그분께서는 회개를 통해 돌덩이 같은 마음을 살과 같이 바꾸신다.
삶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죄에서 돌아서는 이 행위는 대단히 가시적이므로 다른 이들이 모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므로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라고 한다.
- 죄에서 돌아서는 이 일이 올바로 이루어지는 필수적인 사항들
1. 마음이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신앙은 마음이 전부이다. 마음이 죄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거짓과 다를 바 없다. 마음이 여전히 죄와 동맹관계에 있는데 그 죄에서 돌아서는 척하는 것은 정말 혐오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아선 진실한 마음만을 받으실 것이다. 참된 회개는 별도의 후원자나 우상을 두지 않는다.
2. 모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참된 회개자는 모든 죄를 버리는 것이다. 참된 회개자는 죄 하나를 허락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집 안에 반역자 하나를 숨겨 주는 자 역시 왕권에 대한 반역자이듯, 죄 하나를 받아 주는 자는 반역한 위선자이다.
3. 영적인 터전 위에 서서 돌아서야 한다.
죄의 행위는 어떤 두려움이나 속셈으로 인해 억제될 수 있지만, 참된 회개자는 신앙적 원리,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죄에서 돌아선다. 이것이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사람과 죄가 함께 응고될 경우, 사랑의 불을 이용해서 떼어냄이 최선이다. 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죄를 떠나게 되었느냐를 말하였다. 한 사람은 “나는 천국의 기쁨 때문에 죄를 떠났다”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나는 지옥의 고통이 무서워서 떠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셋째 사람은 “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떠났다 내 어찌 사랑의 하나님께 범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4. 죄에서 돌아서되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한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행26“20)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상처에서 화살을 뽑아냄과 같으며,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은 그 상처에 치유의 기름을 쏟아 부음과 같다. 성경은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히6:1)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행20:21)를 이야기한다. 참되게 회개하는 마음은 나침반이 북극을 가리키듯 정확히 하나님을 향해 있다.
5.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서”(렘2:5) 죄로 돌아감은 하나님께 허물을 돌리는 행위이다. 죄로 돌아가는 자는 암암리에 하나님을 탓한다. 다시 죄로 돌아가면, 사람을 구속하는 마귀의 능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다.(마12:45) 탈옥한 죄수가 다시 붙잡히게 되면 간수는 그를 한층 더 튼튼한 쇠사슬로 묶어두고 온전히 구속할 것이다. 부디 이 점에 유의하라. 죄에서 진정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죄와 완벽히 결별하고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음을 말한다.
적용 )
1.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회개에 필요한 성분임에도 지금은 참된 회개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부정한 채로 방주에 들어왔다가 부정한 채로 떠나간다. “그런데도 이 백성은 그들을 치신 분에게로 돌아오지 않았고”(사9:13) 그들의 이마에 여전히 나병이 있는데 요단 물에 가서 씻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한 패가 되었으니 그대로 버려두어라”(호4:17)
2. 반만 돌아선 자들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생각으로는 돌아서되 행동으로는 돌아서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해 울기도 하겠지만, 죄에 너무 깊이 현혹당해서 죄를 버릴 만한 능력이 없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확신보다 강하다. 그래서 이들은 반만 돌아선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들이다.
큰 죄에서는 돌아섰지만 근본적으로 은혜가 없는 사람들 역시 반만 돌아선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도 거룩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도덕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으니 이들은 요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요나는 박 넝쿨로 햇볕을 가리며 안전하리라 여겼지만 곧 벌레가 생겨나 넝쿨을 쏟아버렸다.
많은 죄에서 돌아섰지만 어떤 특정한 죄에서는 돌아서지 않은 사람들 역시 반만 돌아선 사람들이다. 그들의 가슴 안쪽에는 내보내고 싶지 않은 매춘부가 있다.
이처럼 돌아서나마나 하게 돌아서다가는 결국 지옥으로 돌아서고 말 것이다.
3.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 우리가 회개하는 자임을 보이자. 아무리 설득하고 말씀의 나팔을 불어도 희망이 안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악마가 미친 듯이 바다 속으로 몰아가는 돼지 떼 같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라”(겔33:11)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그분께서도 우리에게 돌아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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