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리처드 십스, '개 혁', 1장 2) 연약한 마음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법 (김영희)

강대식 2019. 7. 8. 12:34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전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들은 말을 의논하건대---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대하 34:26-27)

 

원리. 연약하고 부드럽고 여린 마음은 하나님의 참 자녀의 초자연적 성향이다.

 

1. 연약한 마음이 되는 법

2. 연약한 마음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법

3. 연약한 마음을 그 반대와 구별하는 법

2. 이 연약한 마음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법

이 연약한 마음을 보존하는 수단들이 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편들에 맞추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 역사하여 연약함을 보존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우리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보존해 줄 방편들을 따라가야 한다. 또한 우리의 본성적 상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 최후의 심판 등에 대해 들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율법에서 해방된 존재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한다고 말한다.(고후5:11)

 

통곡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이 교회 전반의 비참하고 암담한 상태를 마주 대하라. 느헤미야의 마음도 그래서 깨졌다. 유대인들은 큰 환란과 능욕을 당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져 성문들이 불탔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통곡했고 기도했다. 모세도 자기 민족의 고난을 보고 마음이 녹았다. 우리도 하나님의 교회 전반의 딱한 처지를 바라봄으로써 마음을 연약하게 지킬 수 있다. 자신도 그런 처지에 빠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율법과 복음을 힘써 믿으라. 하나님의 모든 경고가 그대로 실현될 것을 믿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도 실재처럼 우리 앞에 내보이는 것이 믿음의 특성이다. 믿음은 심판 날을 눈앞에 내보여 우리를 떨게 만든다. 바울은 심판주로 오실 예수 앞에서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곤 했다.(딤후4:1) 에녹도 믿음으로 장래 일을 실재처럼 보며 하나님과 동행했다.(1:14-15) 복음을 믿으면 연약한 마음을 보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용서와 영생을 믿으면 그렇게 된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그런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연약하게 된다. 마음이 연약한 자들 가운데 양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욕을 하거나 안식일을 모독하는 자들이 있는가?

 

양심에 어긋나는 가장 작은 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작은 죄 때문에 마음은 점점 완고해지는 법이다. 양심에 어긋나는 작은 죄라도 지으면 총명이 흐려지고 애정이 식고 생명력이 소진된다. 인간이 양심을 거스르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시고 마음이 점점 더 완고해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인간은 아주 완악한 존재인지라 한번 양심에 어긋나는 죄로 자기 마음을 배반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떤 죄라도 능히 저지를 수 있다. 하나님이 완고한 마음을 내버려 두시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영적 술 취함을 조심해야 한다. 육체적인 안락에 취하거나 외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4:11) 무엇이든 세상 것에 푹 빠지면 그것이 영적인 감각을 앗아간다는 뜻이다. 영혼은 외적인 일에 민감할수록 영적인 일에는 둔해진다.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에 대한 사랑이 반감된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17:21)

육체적 안락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혼의 기력을 잃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와 금식을 하나로 묶으신다. 우리 마음이 하늘에 상달하려면 세상의 것들을 모두 끊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적인 본분을 다하려면 육체적 안락을 삼가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술 취함과 이생의 염려에 마음이 짓눌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한다. 그런 것들이 인간을 영적으로 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 위선은 마음을 교만하게 하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어느 누구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악한 위선자이자 모든 해악의 화근이었고, 이교도인 빌라도보다도 더 완고했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구하려 했지만, 그들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바벨론의 음녀는 포악과 피로 잔뜩 취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마음을 지니려면 위선을 조심하라.

 

무엇보다도 큰 죄를 조심해야 한다. 작은 죄는 오히려 양심을 깨울 때가 많다. 하지만 큰 죄들은 사람을 완고하고 무디어지게 한다. 작은 핀에 찔리면 정신이 번쩍 들지만, 강타를 얻어맞으면 바로 의식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윗도 백성을 계수하는 죄를 지었을 때는 바로 가책을 느꼈지만 우리야와 밧세바에게 큰 죄를 범했을 때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나단이 와서 그를 소생시켜야 했다.(삼하12:1) 연약함을 보존하려면 자신의 마음을 잘 감시해야 한다. 양심에 중죄의 흉터를 남기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거기서 다른 죄가 싹트기 때문이다. 양심이 큰 죄로 일단 완고해지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탐욕에 파묻혀 그냥 죄로 직행하게 된다.

 

완고한 마음의 비참한 상태를 생각하라.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지옥의 문턱에 가 있고, 가장 끔찍한 상태인 영혼의 저주에 접근해 있다. 완고한 마음은 경고에도 깨지지 않고 약속에도 녹지 않는다. 지난 일로 인한 심판도 다 잊어버리고 장차 임할 심판도 안중에 없다. 영혼이 그 상태가 되면 오직 죄와 마귀에 적합할 뿐이다. 그야말로 끔찍한 상태다.

 

- 요시야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요시야의 연약함에는 어느 정도 나이에 이점이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마음이 세상 염려에 짓눌리기 전이다. 물론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일찍부터 마음을 연약하게 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청춘의 좋은 기회를 경시하지 말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을 연약하게 지키자. 그것은 정말 복된 상태다! 늦기 전에 모든 죄를 회개하고 선한 사람들과 교제하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3:13)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마음을 연약하게 지키자. 그것은 정말 복된 상태다! 마음이 연약할 때 우리는 살기에 적합하고, 죽기에 적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이든 받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본분을 다하기에 적합하고,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일단 감각과 감정을 잃고 나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를 회복시켜야 하는데 결과가 좋은 경우는 백 명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힘써 보존하라.

 

질문) 하나님의 자녀들도 연약한 마음과 반대되는 완고한 마음에 빠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자신의 죄 같은 영적인 일들보다 외적인 일들에 더 민감해질 수 있는가?

해답) 하나님의 자녀도 마음이 완고해질 수 있다. 아직 부분적으로만 새롭게 된 상태라 육과 영이 공존하며, 따라서 마음이 완고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완고한 그런 상태로 두심은 우리 안에 그만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심은 그동안 소홀하고 태만했던 우리의 죄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다. 특히 연약한 마음을 지켜 줄 은혜의 방편들을 경시할 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귀히 여기지 않을 때이다.

 

질문) 이렇게 완고해질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과 버림받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대답)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완고해져 더는 돌이킬 여지가 없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거기에 방심과 무감각과 고집까지 가세하여 방편들마저 멸시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이 완고해졌어도 여전히 자기 마음을 보고 느끼는 감각이 있다. 부분적으로 완고해진 마음과 완전히 완고한 마음은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는 부분적으로 완고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완고할 수는 없다. 완고한 자신을 지각하며 여러 가지 좋은 방편들을 활용하여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완고해진 상태가 다른 고통보다 더 슬프게 느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어찌하여---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63:17)

 

질문)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는가?

대답) 일차적인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으나, 하나님의 방식은 네 가지 방식이다.

박탈이다. 우리 마음을 녹이시는 능력을 거두신다.

거부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거부하시고 처음에 주신 은혜도 앗아가신다. 사람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지극히 합리적인 삶을 앗아가시고 그들을 완고한 마음에 내버려 두신다.

 

양도이다. 즉 마귀에게 내주셔서 마귀의 괴롭힘에 시달리게 하신다. 성령을 슬프게 하는 길로 가면 성령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길로 가게 하신다. 이렇게 완고해지는 과정은 하나님 쪽에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탄에게 그리고 우리 마음의 본성적 정욕에 내버려 두시는 것뿐이다. 사탄과 정욕은 지옥의 모든 귀신보다 더 지독하다.

 

선물이다. 하나님은 좋은 선물을 제시하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 좋은 선물이 악한 마음과 만나면 그 마음은 더욱 완고해진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6:10) 선한 선물의 빛인 말씀이 악한 영혼을 들추어내면 마음이 더 완고해진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모든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이 박탈이나 거부나 양도나 좋은 선물 중 무엇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든 그 뿌리는 다 우리에게 있다.

앞서 보았듯이 버림받은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보고 느끼고 슬퍼하며 하나님께 토로한다.

 

질문)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인 일들보다 외적인 기쁨이나 고통에 더 민감해질 수 있는가?

대답) 이런 의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연약한 마음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늘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선한 부분에 소홀할 수도 있고, 힘없이 타락을 이겨 내지 못할 때도 있다. 완고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무릎 꿇게 하시면 그들은 애통한다.

하나님의 자녀도 세상 것들을 귀히 여기고 중시하다가 돌연한 슬픔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건전한 조언을 통해 영적인 일을 외적인 일보다 훨씬 귀히 여기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실족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하실 필요가 무엇인가?

 

질문) 우리 마음이 민감하고 부드러운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답) 우리 영혼을 네 가지 대상을 적용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 그분의 말씀, 그분이 하시는 일, 인간이다.

 

3. 연약한 마음을 그 반대와 구별하는 법

우리 마음이 연약하고 부드러운지 이 네 가지 방식으로 시험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이다. 연약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올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은 자신의 죄로나 남의 죄로나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없고, 그분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의 말도 차마 들을 수 없다. 성령의 감화에 복종하는 사람은 마음이 연약한 사람이다. 반면에 완고한 마음은 모든 것을 뿌리치며, 망치로 때려도 꿈쩍 않는 돌처럼 성령의 어떤 감화에도 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연약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다. 참으로 연약한 마음은 먼저 말씀의 경고 앞에서 떨며, 하나님의 분노의 조짐 앞에서 떤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66:2)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3:4) 연약한 마음은 심판날에 임할 주의 두려우심을 듣고 떤다. 바울도 그러했으며 그의 직분에 충실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후5:11)

 

경고뿐 아니라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엇보다도 즐거워하는 사람은 마음이 연약하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니 어찌 그 앞에서 우리 마음이 녹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울러 연약한 마음은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 앞에서도 나긋나긋하다. 이사야도 연약한 마음으로 주여 나를 보내소서”(6:8)라고 아뢰었다. 다윗도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27:8)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영혼은 그분께 공손히 응답한다. 이렇듯 참되고 연약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모든 사명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적용해 보면 된다. 연약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두루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두려워 떤다. 그래서 얼른 하나님과 화목하려고 그분께 나아가 회개한다. 연약한 마음은 하나님의 자비를 즐거워하며 그 속에 있는 사랑을 더 잘 본다.

 

다른 사람들의 선하거나 악한 상태를 대할 때이다. 그 때 우리 마음이 연약하고 민감한지 알 수 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119:136),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3:18)

우리도 악한 사람들을 향해 다윗과 바울처럼 마음이 연약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예루살렘의 재난을 느끼시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후에는 예루살렘을 위해 친히 피를 흘리셨다. 그분의 마음은 이처럼 연약하셨다.

또한 자기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에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 연약한 마음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며, 울라시면 울고 기뻐하라고 하시면 기뻐한다. 연약한 마음은 모든 선한 일에 적합하다.

 

적용) 이 시대 사람들은 요시야의 심정을 얼마나 품고 사는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모욕하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성령의 감화에 복종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 이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지도 않는다. 이 시대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에 대해 우리는 얼마든지 성토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신앙도 있고 은혜의 방편도 누리는 우리가 그들보다 못하다면 사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비참한 상태를 민감하게 느끼는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린 마음과 거리가 멀어 본능적 감정을 따라간다. 그들은 교회 전반의 상황을 들어도 이방인보다도 더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적다. 이는 그들에게 연약한 마음이 없다는 증거이고,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몸된 교회에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당신은 어떤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그렇게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향하도록 그냥 두는 것이 자비인가? 그들을 권면하고 가르쳐야 한다. 냉냉함과 무감각은 이 시대의 영적인 병이다.

당신에게 연약한 마음이 있는지 알려면 하나님 그분의 말씀, 그분이 하시는 일, 당신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보라.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연약한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질문) 완고하고 둔하고 무감각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대답1) 찬 물건을 불가로 가져가 덥히고 녹이듯이, 우리의 냉냉한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가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지은 우리 죄를 생각하고,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라. 우리가 얼마나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인지 생각하라. 그러면 우리 마음이 햇빛 앞의 밀랍처럼 부드럽게 녹을 것이다.

 

대답2) 방편들을 활용하라. 항상 복음의 햇빛 아래 있으라. 항상 선한 방편들 가운데 거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라. 그를 일으켜 세워 줄 적임자는 주변의 좋은 동지들이다.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3:13) 두 사람이 영적으로 교제하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세 번째 사람으로 오신다.

 

대답3) 담대하고 경건하게 은혜의 언약을 주장해야 한다. 그분은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11:9)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분께 이 약속을 주장해야 한다. 그분 앞에 가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간구하라. 단 그분의 때를 기다리라.

 

- 마음을 연약하게 하는 일에 분발하려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연약한 마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나님은 그런 마음속에 친히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57:15)

마음이 나긋나긋하고 연약해지면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마음이 불행해질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된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은 자신이 창조된 목적에 적합해진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약한 마음은 모든 복을 받기에 적합하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은 어떤 복이든 능히 누릴 수 있다. 그 마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기 때문이며, 연약한 마음은 언제나 긍휼을 베풀기 때문에 복이 있다.

 

반대되는 마음, 즉 연약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 마음의 비참한 상태를 생각해 보라. 인간의 마음은 한없이 완고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해가 어두워졌고, 무덤들이 열렸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났다. 그런데도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은 비웃었다. 정작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은 이교도들이었다. 의식만 중시하는 위선자는 이교도나 이방인보다 더 완고하다. 이런 위선자 중에는 아예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두려운 일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떨쳐 버릴 수 있었지만, 거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실행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은 누구나 머잖아 그런 무서운 종말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연약하고 부드러우며 유순하고 민감한 마음을 품고자 여기서 성심을 다해 힘써야 한다. 이생에서는 무감각을 고집하던 위선자들이 그때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모든 것을 감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