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청교도의 절정- 조나단 에드워즈/ 로이드 존스

강대식 2019. 9. 19. 17:07

청교도의 절정- 조나단 에드워즈

-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PP 493-526)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감동적이고 열정적이며 능력있는 설교이다. 설교는 뜨거워야하고 진지해야한다. 때로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 원고를 다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회중들에게 읽어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때로 그는 설교 요점만 적어서 설교했다.

 

그는 설교할 때 복음주의 원리를 언제나 기초로 했으며, 영혼의 영원한 구속에 대한 강론을 다섯 차례나 했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여러 주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의 글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그 교리가 기술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크게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요, 체험 신학자요, 어떤 사람의 말대로 마음의 신학자였다. 거성, 이 능력있는 지성인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인간- 중생한 사람과 중생하지 못한 사람 모두- 의 마음 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 심리학, 회심, 부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으면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보면 유명하다는 사람들(윌리엄 제임스, 스타벅, 사잔트)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하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어휘를 쓸 수 없다. 그 정반대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 그래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부흥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에게 문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그의 지식,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심리학은 정말 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에드워즈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부흥의 필요성을 깨우쳐 준다. 부흥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전도 운동과 부흥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서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부흥시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결신을 요청하는 것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흥에 대한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십시오. 그가 늘 사용하는 어휘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다. 오늘날 우리는 쇄신”(renewal)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은 부흥이라는 어휘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쇄신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그들이 이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는 우리 모두 중생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가졌음을 깨닫고 그것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흥이 아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부흥을 얻을 수는 없다.

 

부흥이란 성령의 부어주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자각할 따름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부흥의 진정한 뜻을 상기시켜 준다.

 

여러분은 신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붙는 신학이어야 한다. 빛 뿐만 아니라 뜨거움과 열도 있어야 한다. 에드워즈에게는 이런 것들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위대한 교리들이 성령의 불로 뜨거워져 있다.

 

오늘날 이런 지식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가? 논리의 힘과 침투력, 학식의 정도, 명확한 분별력, 바른 문체, 표현의 명확함 들이 이처럼 빼어난 세대가 언제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앙을 고백하는 사림들이 죄를 이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천국을 사모하는 일, 그리고 삶의 거룩함이 이처럼 빈약했던 적이 언제 있었는가? 현재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많은 것을 축적시켜야 하는 필요보다는 마음이 감동받을 필요가 더 급하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훌륭한 성향을 가진 설교를 가장 크게 필요로 하고 있다.”(Works,1,391)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결심하십시오. 그의 설교문들을 읽어보십시오. 그의 실천적 연구문들을 읽어보십시오. 그 다음, 신학적 주제에 대한 위대한 강론을 계속 읽어보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설교자이든 청중이든 우리 모두는 이 사람의 글을 읽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포착하도록 합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어떤 유익을 얻었다고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또한 최고의 체험을 누렸다고 해서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이것은 언제나 참된 체험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주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외경심과 경이감을 느낄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내에 기이함과 놀라움이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언제나 전달해 주고 일으키는 인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사역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들이 그들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이제 그 많은 집회에 다니는 것을 중단하시고, 오늘날 복음주의 집단에서 유행하는 여러 형태의 오락 즐기기를 멈추십시오. 집에 머무는 법을 배우십시오. 다시 읽는 법을 배우십시오. 현대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만 읽지 마십시오. 견고하고, 사실적인 것들로 돌아가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두 권과 같은 책을 읽은 결과로 부흥이 시작된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신학대학 시절 친구에게서 소개 받은 책의 한 부분에서 에드워즈를 만났다고 한다. 더 깊이 그를 알고 싶었지만,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약 2년후 아주 우연하게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두 권을 만나게 되어 5실링을 주고 샀다.

저는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 두 권이 제게 끼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역사가인 페리 밀러는 아직까지는 에드워즈가 미국을 빛낸 가장 위대한 철학자겸 신학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에드워즈는 교회가 생명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있을 때 나타난 사람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의 시대도 교회가 성령의 불이 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분명한 특징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서문을 당시 목회자였던 쿠퍼라는 분이 썼다. 거기에 위대한 부흥이 있기 전 교회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모든 개혁교회들이 그동안 얼마나 죽어 있었고, 얼마나 메마른 상태에 있었습니까?

황금의 소나기가 멈추어졌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은 탁월한 성공을 전혀 거두지 못했습니다. 회심도 드물었고 정말 그러한 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그 전처럼 깨어 있거나 뜨겁거나 새로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년동안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상태입니다. (때때로 긍휼의 소나기가 내렸던 특이한 한두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신실한 교역자들과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했던 것과 같이 영적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생명 없는 상태를 지속하던 교회들에 이제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가뭄 후에 소나기가 쏟아진 것이다. 생명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 100년 동안, 아니 실제로는 오늘날까지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에드워즈의 생애에서 뛰어난 사실은 그의 노샘프턴 사역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이었다.

그것은 1734년말부터 1735년 사이에 일어났다. 그 후로는 1740년 초 조지 휘트필드 일행의 방문과 함께 일어난 대각성 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나서 1758년에 죽었다. 천연두 예방접종 후에 죽었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제공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에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1727년 그는 메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의 보조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 1년쯤후 외조부가 돌아가시자 에드워즈는 혼자 목회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1750년 교회에서 쫓겨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는 정말 빼어난 천재이며 능력있는 설교자로서 대부흥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1750년 투표 결과 23023으로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특정인의 자녀에게 세례를 주지 않으려 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 기준을 주장했다. 학습 준비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주장이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은 어떤 위대한 신적 감화를, 단번에 엄청난 변화를 받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진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과, 갑작스럽고 극적인 회심을 믿었다.

에드워즈를 통해서 청교도주의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청교도적인 정신과 삶이 그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가 그의 삶과 사역에서 만발했다.

 

노샘프턴 교회에서 추방당한 그는 당시 변경 지역으로 인디언들이 사는 곳인 스톡브리지로 갔다. 그가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가장 위대한 걸작들을 몇 권 썼다.

존 번연이 12년동안 베드포드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써 명저를 남기게 된 것과 같다.

 

그곳에 있다가 뉴저지 대학의 학장으로 초빙되었는데,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이다.

거기서 얼마 후에 그는 천연두 접종을 받고 그 부작용으로 죽었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유하고 싶은 유혹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의 영적인 산소는 매우 희박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거룩이 더욱 찬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한 그의 강조도 두드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로 치솟은 이 큰 봉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왜소한 등산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누구나 그의 전집을 사서 읽도록 설득하는 것이 나의 목표일 뿐입니다.”

 

에드워즈는 한마디로 거성이었다. 그는 미개발된 나라에서 자라났다.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놀라운 지성을 발휘했고

명석한 상상력과 놀라운 독창성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뛰어난 점은 그의 모든 빛나는 재능들과 함께

겸손과 온유 그리고 탁월한 영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았다.

그는 마음을 크게 강조했다. 그를 볼 때 두드러진 사실은 완벽성과 균형이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고 동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다.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람은 신학자이기도 하면서 전도자였다.

그는 위대한 목사였으며, 영혼들과 그 영혼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회심에 대한 대단한 옹호자였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이 단독으로 모이는 집회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는 진정 모든 것을 갖추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사람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이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오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들입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하고 통합된 지성을 조화시킨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적인 것이 언제나 지적인 것을 통제했다.

그는 자신의 빼어난 지성과 독창성과 철학을 성경에 굴복시켰고

그것들을 단순한 종으로 여겼다.

 

그 어떤 지식도 성경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은 오늘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살아 있는 만남이 신앙이었다. 그의 유명한 체험의 글이다.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습니다.

경건한 묵상과 기도하며 걷는 것이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텅 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티끌 속에 앉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 외에도 몇 차례 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들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내게 미쳤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성삼위 되시는 성령의 영광을 감지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그의 직무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역사를 통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전달하시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신적 영광과 상쾌함의 무한한 샘으로 나타나셨고, 충만하시며, 내 영혼을 채우고 만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교통을 통해서 자신을 부어 주셨고,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태양처럼, 생명과 빛을 달콤하고 즐겁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이며, 생명의 빛이며, 달콤하고 탁월하며 생명을 주는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때는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풍성하게 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뒤따랐습니다.”

 

 

진정한 덕이나 거룩은 본질적으로 머리보다는 마음에 좌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한 것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지식을 심어주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감정에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고양된 감정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진정한 신앙과 거룩이, 영혼 속에서 큰 역사를 하도록 허용을 해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주로 마음의 일이다. 머리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서 나오는 뜨거움과 감정을 강조했다.

 

설교를 통해서 얻은 주요한 유익은, 설교 당시 마음속에 생긴 인상이지,

전달받은 것을 후에 기억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탁월한 부흥 신학자요, 체험 신학자요, “마음의 신학자였다.

에드워즈만큼 인간의 마음 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회심, 부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으면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을 발견한다.

놀라운 회심에 대한 진술이라는 그의 책은 가장 흥미롭고 가장 감격적인 책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이라고 존스는 말한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쉽사리 속아 넘어가는 사람도 아니었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비평가도 아니었다. 1740년대의 부흥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하고 비상한 현상들을 변호하면서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지도 말고, 육체를 통해 사탄에게 기만당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는 휘트필드에게 경고하기까지 했다.

휘트필드는 충동에 복종하고 순응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휘트필드를 감히 비평했고 가능한 위험들을 경고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