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Ⅲ. 실제적인 접근
사도의 목적이 신학 논문을 쓰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호소를 하려는 데 있다. 그는 실제적인 호소를 하기 전에 신학적인 설명부터 한다.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생활방식과 단순한 윤리체계의 차이점이 여기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세상에 호소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고 처신할 것을 호소하는데,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에 근거하여 호소한다.
신약성경에는 중대한 삶의 법칙이 나오는데, 신약성경은 그것을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부른다.(약1:25)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무법하게 산다는 뜻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자유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은 항상 교리부터 제시한 다음에 “이것을 믿는다면 다음과 같이 행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 서신서에서 ‘교리’를 다루다가 ‘실제로 넘어가는 부분을 보면 항상 “이러므로”나 “그러므로”라는 연결어가 나온다. 이 연결어가 있기 때문에 이성과 상식에 대한 분명한 호소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요구하는 삶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만큼 신앙고백을 철저히 검증할 방법은 없다. “이러므로”라는 말, 교리와 실제를 단단히 묶어 주는 이 말이 있기 때문에, 교리와 행동 사이에 이처럼 피할 수 없는 논리적인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 호소에 대한 태도를 보면 교리 전반에 대한 궁극적인 태도가 무엇인지 상당 부분 알 수 있다. 이것을 거부하고 두 가지를 양분하는 것은 어쨌든 교리관이 잘못되었다는 표시임에 분명하다.
- 실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사도가 무엇을 가르치는가?
1. “구원을 이루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원은 신약성경 전체의 핵심 메시지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나의 죄를 깨닫고 죄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 자신들의 어떤 노력도 무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3장에서 자신이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었다는 것, 할례를 받았다는 것 등을 언급하며 결국은 그런 것들이 아무 가치도, 쓸모도 없는 배설물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빌립보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알았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 그들은 실제로 새사람이 되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을 구원하는 새로운 힘과 능력을 느꼈고 해방감을 느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천국 시민이 되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3:20)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거류자요 순례자인 것을 알았다.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의 핵심적인 의미이다. 바울이 이들에게 호소하는 바는 바로 이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시작한 일을 마무리 하라.
이것이 신약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인 권면이다. 이미 주셨으니 완성하라는 것이다. 씨는 심겨졌다. 내가 할 일은 선물로 주신 이 씨가 다 자라서 완전히 익을 때까지 성장과 발육을 도우며 계속 북돋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안에서 행하고 계신다. 나는 그가 주신 것을 최선을 다해 키우기만 하면 된다.
2. 이런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① 먼저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 주와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똑같이 순종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첫 단계이다. 이렇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으니 당연히 우리 뜻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실 권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뜻을 내 뜻으로 여기고, 그의 명예와 영광을 내 유일한 관심사로 삼겠다’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② 다음 단계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 즉 신약성경이 말하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의 체계 및 인생관이 하나님과 반대된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다. 경건치 못한 세상은 하나님께 어떠한 관심도 보지지 않으며, 육신에 영합하여 하나님께 관한 것은 무엇이든 비웃고 조롱한다. 신약성경은 이처럼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외면하는 것이 곧 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것에는 관심이나 흥미 자체를 보이지 말아야 하고, 마음을 빼앗기거나 현혹될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위험에서 날 건져 주셨다’라고 하면서 , 여전히 세상에 속한 일을 하고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바울은 상식에 호소하고 있다. 여러분은 새로운 본성을 받아 새롭게 출발했고, 구원을 얻었다. 그러니 이제 다른 길에는 영원히 등을 돌리라. 이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3. 이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① 이 주제를 다룬 책을 찾아보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세상의 삶과 죄의 본성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이해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것은 더욱 갈망하고, 세상에 속한 것은 더욱 미워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실제적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거기 푹 잠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일주일 동안 표를 작성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책을 읽은 시간을 표시하고 신문과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본 시간을 표시하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지 묻고 싶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이 삶을 살찌우고 촉진하며 확장시키고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는 뜻이다.
② 또 한 가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기도이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해 주시기를, 성령을 더 충만히 부어 주시기를, 말씀을 더 알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나를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구해야 하며, 지각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가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하신 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인가? 왜 그를 더욱 사모하지 않는 것인가? 구원의 완성을 위해 주시는 모든 격려와 인도에 순종하며 따라가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업으로 여겨, 그 삶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4. 어떤 태도로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가?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겸손과 거룩한 경외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일이 굉장히 엄숙한 것임을 알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가장 강조해야 할 점, 특히 복음주의 쪽 사람들에게 강조해야 할 점이 아닐까 한다. 어쩌다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종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청교도들과 우리가 이처럼 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이들이 신약성경의 참된 정신을 잃어버리고 완전한 율법주의에 빠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여기에 과잉 대응하다가 경건의 개념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는 바이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행해지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과도히 신경을 써 항상 미소를 띠고 웃어야 한다는 착각으로 이른바 ‘근육질’ 기독교를 신봉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이것은 본문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빛들의 아버지”시라는 것,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다면 나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또한 세상이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잡아떼어 끌어내리려 하는 것을 알기에 세상을 두려워해야 하며 세상에 건전한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자기 자신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자기 마음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가볍고 태평하고 경박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롬7:18)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넘어지거나 흔들릴까 봐 두려워한다. 세상의 교묘함을 분별하지 못할까 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분별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5.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① 우리 주와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바로 그 모습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하셨다.(요6:38) 그를 본받고 따르겠다는 이유보다 더 고상한 이유가 있겠는가?
② 그가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딛2:14)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시려고 자신이 죽으신 것이다.
③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도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은 주님의 백성을 보고 주님을 판단하게 되어 있다. 그의 영광과 명예는 바로 내 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세상도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를 알려 주어야 한다.
④ 내가 천국에 갈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내가 하나님 나라 시민임을 믿으며 죽은 후에 이 놀라운 기업을 받을 것을 믿는다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요일3:3) 하나님은 순결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분을 뵐 준비를 하려면 일분일초도 함부로 흘려보낼 수가 없다.
⑤ 내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주저앉았을 때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취하시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가르친다.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은 그 구원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이며 마침내 여러분을 완성시키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릴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징계하신다.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미련한 자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구원을 이루어 나가지 않으면,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구원을 이루어 나가신다. 하나님의 호소에 반응하지 않을 때 징계를 받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며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여러분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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