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15장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 (김영희)

강대식 2019. 11. 8. 21:25

15 장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2:14-16)

 

- 바울은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만 하고 말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여기 본문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바는 모든 일을 하고 구원을 이루어 나갈 때 원망과 시비 없이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일들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선량하고 윤리적인 인간 그 이상의 존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윤리와 도덕의 유일한 토대를 떠날 때, 기독교 윤리와 도덕은 절대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과거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이다. 우리 조상들은 복음을 내팽개치고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조상들이 서신서들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었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원망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토대 자체가 얼마나 다른가! 이것은 강력한 호소이다. 이 호소를 잊을 때 윤리와 도덕이 심각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에밀 부르너 교수가 사용한 예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비롯된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단순히 기독교 윤리 및 도덕을 일상생활에 접목 시키려는 시도가 어떻게 다른지 밝히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차이는 땅에서 피어난 꽃과 꽃병에 꽂힌 꽃의 차이와 같다. 기독교 교리 없이도 기독교 윤리와 도덕을 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꽃을 꺾고도 계속 살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사도는 이러한 잘못을 미리 경고함으로써, 교리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영역에 속한 그 어떤 호소도 할 수 없음을 다시금 보여 준다.

 

-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와 거기 함축된 의미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1. 이 말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된다. 지난 50여 년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론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오래된 가르침에 반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아버지되심과 인간의 형제됨을 강조하다 보니 굳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고, 복음은 서로 정답게 대하며 선하게 살라는 일반적이고 막연한 호소로 전락해 버렸다. 그들은 사도행전 17장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했고,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했다는 것이다.(17:29, 26) 사도가 거기서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조물주시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벧전2:1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라고 부르짖느니라”(8:15) 전에는 자녀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자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문 자체가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자들이라는 점, 세상과 구별된 빛이요 등불이라는 점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항상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자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애를 쓴다. 이 사실은 아무리 반복해서 지적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도의 호소는 하나마나한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중대한 개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돌보아 주는 이 하나 없이 길거리를 떠돌던 부랑아였는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데려다가 입양해 주시고 가족으로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을 뿐 아니라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리요 큰 비밀이다. 우리는 내적으로도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고, 실제로 하나님의 본성을 받는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법적으로만 입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호교류가 이루어진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별한 돌봄과 은총도 누리게 된다. 자녀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부모는 항상 자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출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히 사랑해 줄 두 사람을 주신다. 그들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결과 특권적인 신분을 얻는다. 세상에서 따로 부르심을 받고 구별된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위로의 대상이 된다. 사도의 요지는 맞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라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요구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며 자신이 요구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며 살 것이냐?(하나님 자녀의 핵심적인 특징)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란 구원과 관련된 일이다. 사도가 요구하는 바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 아무런 원망이나 시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는 정확히 이스라엘 백성의 고대 역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편 106편에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가 완벽하고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택한 자로 불러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시고 복을 주셨다. 그들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땅 가나안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장막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끊임없이 불평하며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것은 인정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왜 애굽으로 돌아가면 안 되느냐. 하나님이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끌어내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은 애굽의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그리워했다. 그들은 원망했다.

 

사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교훈을 배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듯이, 너희 마음에 갈망과 암시를 주심으로 자신이 인도하고 계심을 알려주신다. 이스라엘 자손도 그러했듯이 너희도 마음속에서부터 원망과 시비가 솟구치는 시험의 때가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너희를 어떤 상황으로 데려가시고 인도하시더라도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

원망은 완악한 정신과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하다. 원망은 도덕적인 반역의 표지이며,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사랑이 없는 마음의 산물이다. 원망시비보다 먼저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범하는 잘못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다. 시비는 지적인 반역의 결과물이다. 즉 원망은 사랑이 없다는 표시이고 시비는 믿음이 없다는 표지인 것이다. 잘못은 이 순서로 일어난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대체 왜?”라는 것이다. 다른 것에 앞서 사랑부터 의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으면,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 못하게 되어서 이런저런 질문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이것이 순전히 지적인 문제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랑이 먼저 메마르면 믿음의 영역까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원망이 먼저이고, 시비가 나중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도 의심하게 되어 있다.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가 나중이다. 기본적인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사를 보았고 그 능력의 절대적인 증거를 보았다. 모든 상황이 잘 풀릴 동안에는 그들도 믿었으나,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으면 다른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원망이 시비를 불러오게 되어 있다.

원망과 시비의 정신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것은 없다. 이 정신은 불안을 조장하고 낙심을 불러온다. 세상에서 자기만 힘든 것처럼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복음의 증거까지 빈약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럽게 만든다. 사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것을 피하라고 하면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명백한 실례를 살펴보라고 촉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3 그렇다면 사도의 권면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평하신 분이며, 전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했다.(1:13) 상황이 어떻게 잘못 돌아가든 간에 이 사실만큼은 확신해도 된다. 그의 성품은 완전하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만을 터뜨리고 싶을 때 그가 본질상 완전하시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라.

그 다음으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원수 되었을 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게 하셨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든 상관없이, 설사 왜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시라는 이 사실을 기억하라. 여러분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크시고 여러분은 작다는 것, 특히 여러분의 정신과 이해력의 크기가 작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모든 상황을 푸는 열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님을 이해하려드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죄라는 것이 저의 견해이다. 에덴동산에서 생긴 문제도 이것이었다. 우리의 정신은 너무나 왜소하고,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완전하시고 광대하시다. 믿음은 내게 주신 계시에 만족하는 것이며, 그 계시에 만족하기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신이 잘못되었다거나 무정하다거나 잔인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우리의 성화에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하신다고 말할 때, 그 소원이 바로 성화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서 잘 지내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소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완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들의 영혼에 있다. 여러분의 영혼을 염려하시기에,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세상의 것들이 있을 때 그것을 빼앗아 가신다. 사랑으로 빼앗아 가시는 것이다. 놀라거나 실망하지 말라. 여러분 이 교리를 첫 자리에 두고 절대 놓치지 말라. 여러분에게 뜻한 바를 이루실 때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붙잡고 여러분 안에서 계속 행하실 것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오히려 이 일을 주신 것에 감사한다는 것은 당신의 목적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아뢸 것이다.

 

사도의 요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그대로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마음대로 쓰시게 했다. 광야로 이끌어 시험을 받게 하셔도 불평이나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는 죄가 자신과 하나님을 갈라놓을 때가 임박한 것을 알았지만, 불평하기나 원망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구했다.

 

여러분도 이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 이 성화의 과정에서 어떤 자리에 이르게 되든, 원망과 다툼의 정신에 사로잡히지 말라.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여러분을 향한 은혜로운 목적을 기억함으로 그것을 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