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4장 이 구원이 큰 이유 (김영희)

강대식 2020. 6. 3. 15:03

4 장 이 구원이 큰 이유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라”(2:1-4)

 

-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에 시달리다 보니 자신들이 받은 구원에 대한 기쁨보다 두려움과 불안이 더 커졌고, 그 때문에 옛 유대교를 돌아보며 그것을 등지고 새로운 신앙과 가르침을 믿는 것이 조금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불행해 하는 신자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그는 그런 상태에 빠지는 주된 원인이 들은 것을 놓치고 떠내려간 데 있다고 말한다. 영적 침체 상태를 치료하려면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하며, 확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엄중한 경고를 한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 구약에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주신 율법- 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율법도 그렇거든 하물며 -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브리 그리스도인들과 비슷한 상태에 빠진 이들에게 또한 불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기독교회가 이처럼 계속 설교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가 아직 존속하는 타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같이 큰 구원!” 이것이 우리가 가진 메시지이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성경의 메시지는 곧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구원한다는 것은 구해 주고 해방시킨다는 뜻이며, 병들고 아픈 데를 고쳐 건강하게 한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곧 구원받는 것이다. 기독교회 메시지는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있다. 복음 메시지는 구원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세상에 전해진 소식 중에 가장 크고 놀라운 소식이다. 복음 메시지를 말할 때마다 최상급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모든 신약성경 기자의 특징이다.

 

유럽 대륙의 대성당들을 보라. 그 건축물을 세운 사람들은 구원 메시지의 위대함과 광대함과 장엄함을 석조물로 표현하고자 했다. 미술작품도 가장 위대한 화가들이 이 큰 구원에 관한 교리를 그림에 담아냈다.(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가장 위대한 명연설과 웅변도 기독교 강단에서 흘러나왔다. 헨델의 메시아야말로 가장 위대한 음악 작품이다. 헨델은 기이할 만큼 짧은 시간에 메시아를 작곡했는데, 마치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웅장한 십자가가 일부가 보였다는 것이다. ‘할렐루야이같이 큰 구원에 대한 헨델만의 표현방식이었다.

 

여러분도 복음 메시지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구원의 위대함과 광대함과 강력함에 감동하고 있는가? 구원을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는가? 바울처럼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뛰어나심과 십자가의 영광만 깨달아도 옛 유대교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가 과연 십자가를 자랑할 만큼 자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복음이 마치 사소한 것인 듯한 인상(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몇 가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불과한 듯한 인상)을 주곤 한다. 우리는 이같이 큰 구원을 믿는 자들로서, 이처럼 악한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중대한 것을 잃고 있으며 놓치고 있는지 보여줄 책임이 있다.

 

-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크시고 그 기원이 크며 개념이 크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가 크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메시지가 아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나 근본적으론 인간의 메시지와 다르다는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1:1-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때문에 기독교회가 존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바는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이 흉흉한 세상을 위해 친히 큰 구원을 계획하고 설계하셨다. 그리고 아들이 그 계획을 실행하는 일에 자원하셔서 마침내 세상에 오셨다. 또 성령도 친히 우리 삶에 찾아오셨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을 시작하신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서로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이 구원이 큰 것은 이처럼 시작하신 이가 크시며 그 구성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2. 이 구원이 큰 것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원수가 크기 때문이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구원의 크기를 검증하려면 그 병의 심각성을 알아야 한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율법은 본질적으로 무서운 법이라고 말한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십계명을 어기는 행동)을 정죄하는 법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율법을 어기는 자를 반드시 벌한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18:4, 20)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느냐?”라고 묻는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무서운 상태를 한 번도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암이 자라고 있는데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그들의 상태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복음을 자랑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 복음을 기꺼이 전하는 것은 타락한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얻는 의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세상은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이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잊고 지낸다.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은 후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자기 인생을 설명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았느냐? 십계명을 지켰는가?”라고 물으실 때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설사 의를 행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부 누더기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뿐이다.(4:25) 기자가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오직 이 메시지만이 하나님의 심판 및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쫒겨나는 영원한 형벌의 공포와 비참에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다. 이 얼마나 큰 구원인가!

 

적극적으로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구원받았는지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2:17)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죄 사함이며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 없이 바른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문제이고, 그 답이 여기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아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제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구원인가! 세상 그 무엇도 이 일을 해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지식을 얻는다.

 

그뿐만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죄를 지시고 제하신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케 될 뿐 아니라 그의 가족으로 입양된다.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시고”(2:10-11) 우리의 죄만 사해 주시고 거리에 누더기 차림으로 밖에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다. 집에 데려가 가족으로 삼아 주시며 자기 형제로 삼아 주신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자녀로 삼아 주신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이니요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2:14-16)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그의 자녀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에 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 이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는 모든 시험을 직접 겪으셨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니라”(4:15) 이 얼마나 큰 구원인가!

 

이 구원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2:5-8) 장차 올 세상은 천사를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곳이다. 자신이 심판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것과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깨어날 것을 알기에 설사 밤사이에 죽는다 해도 아무 걱정 없이 잠자리에 누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는가?

 

더 놀라운 사실은 장차 올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멸망할 곳이다.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겠다고 한다.(벧후3:13)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한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만물이 새로워질 것이라고 한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자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야말로 구원받을 상속자들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8:19)

 

세상이 원자폭탄으로 멸망한다 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보화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 그의 보화는 이 세상 은행계좌나 세상 직업이 아니다. 그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며 산다. 그의 마음은 장차 올 영광,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에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나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

 

3. 이 구원이 큰 것은 우리를 위해 이 구원을 준비하신 방식이 크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드라마, 영원히 위대한 드라마가 히브리서 2장에 나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를 보니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으니라 이는 하나님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1:1-3) 예수는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훈련받는 바리새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천사들보다 잠시 못하게 하심을 입은 예수는 실제로 천사들을 만드신 장본인이다. 만물이 그를 통해 지은 바 되었고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그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그가 붙들지 않으시면 전부 무너져 내린다.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가 누구인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온전히 모든 영광 가운데 계시던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한 아기가 되셨고, 목수가 되셨으며, 제 손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되셨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2:14-16) 그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오셨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이처럼 자신을 낮추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는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그는 세상의 창조자요 보전자요 생명의 주이심에도 수치와 오욕 속에 죽으셨다. 마귀조차 죄를 찾아낼 수 없는 분이 도살장으로 잠잠히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려가 죽으셨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옥의 형벌을 면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가장 높은 하늘 궁전에서 가장 비통한 십자가로 내려오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구출되고 구속되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장차 올 세상의 영광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었다.

 

예수는 감사하게도 죽음에 멈추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죽음의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그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원수가 그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택함 받은 자들이 다 모일 때까지, 그가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신 영혼들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에 다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 그는 장차 다시 오셔서 원수를 멸하시고 자신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때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그의 참모습을 볼 것이며, 자신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 다스리며 그와 함께 심판할 것이다.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이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구원은 이같이 큰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인간이 아는 모든 이름,

천사가 지닌 모든 이름,

지혜와 사랑과 능력의

영광스러운 이름 다 모아도

그의 귀하심 담기에 부족하고

내 구주 일컫기에 초라하도다. -아이작 와츠-

 

여러분도 구주께 면류관을 들고 있는가? 구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는가? 이같이 큰 구원을 기뻐하고 있는가? 온 세상이 그를 알길 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기이함과 광대함과 영광의 크기를 본 적이 있는가?

다시금 그를 바라보라. 여러분을 위해 태어나신 그를 바라보라. 여러분을 위해 사시고 죽으신 그를 바라보라. 구주께 자신을 내드리라.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눈을 여사 이같이 큰 구원의 크기를 보게 해주시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