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위니, '에드워즈의 참된 기독교', 3장 명목상 기독교에 대한 에드워즈의 해결책

강대식 2020. 6. 3. 15:12

3장 명목상 기독교에 대한 에드워즈의 해결책

 

이미 우리는 확실성에서 나와 신비로 들어왔다. 지난 세기 대표적인 철학적 동향 가운데 하나는 확실성에서 회의주의로의 이행이다. 역설과 신비를 강조한다. 여전히 진리와 삶의 근본 원리들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진리에 대한 궁극적인 확신을 결여한 채, 세련되게 순화시켜 알맹이가 없어진 표현을 사용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하다. “, 맞아요,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복음을 믿지만, 그건 제 개인적인 입장일 뿐이에요현 시대가 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강도를 대놓고 경시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 신앙이 신적인 부르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한다. 우리는 성경적 설교자인 에드워즈에게 또 다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성경에서 내용과 단서를 얻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선명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해 줌으로써 자기 교회 회중과 독자들이 성경의 복음에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에드워즈는 시선을 사로잡고 기억에 남을 만하게 기독교 신앙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설명했고, 에드워즈의 설명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참된 기독교의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회심의 실재의 한 부분, ‘의지의 자유론의 한 부분,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에서 한 부분, ‘신적이며 영적인 빛그리고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신앙감정론의 몇몇 구절을 살펴볼 것이다. 참된 기독교에 대한 에드워즈의 탁월한 묘사는 에드워즈 당시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회심과 회심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성경적으로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회심은 실재다

 

에드워즈는 회심을 믿었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혼을 살리시는 역사와 이 역사의 실제적인 결과를 믿었다. 회심을 신화나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반대하여 에드워즈는 요 3:10-11에 기초한 회심의 실재라는 설교에서 회심의 진정성에 대해 수많은 논거를 제시했다.

비록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같은 크고 가시적인 결과를 갖다 주는 사랑은 이 세상에 없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거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이런 사랑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목소리, 성경, 경험, 가장 탁월한 사람들의 증언은 회심이 반드시 있다는 것에 일치한다.”

 

명목상 신자들로 인해 회심의 살재가 심각하게 의심받는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회심은 실재라고 담대하게 선언했다. 회심은 별난 심리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종교 심리적 기벽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고안해 낸 것도 아니다. 에드워즈는 구원이 하나님의 역사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구원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벌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이 만드시는 역사다.

 

생각과 의지의 조화

 

사람이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의 의지를 움직이고 촉발시킨다. 생각 속에 들어온 것들은 의지를 움직이거나 자극하는 힘이다. 지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자가 자각하고 이해한 것 가운데, 좋게 보이고 생각되는 바로 그것이 의지 또는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동기가 되고, 지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자의 영혼에 좋게 여겨지는 정도만큼만 영혼의 선택에 개입하고 지극할 힘을 갖고 있다. 항상 의지는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이다.”(‘자유의지론’)

 

이 인용문은 머리와 가슴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사람의 생각을 진리로 채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 준다. 우리 생각이 우리 의지에 고착시킨 바로 그것이 의지를 움직이고 촉발시킨다.’ 우리에게 바람직하고 즐겁고 최고로 좋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것을 우리는 원한다.

 

이 간단하고 중요한 요점은 회심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지적인 동의 없이 복음을 믿기로 결심함으로써 막무가내로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는 복음의 요구를 우리 머리로 생각하고, 복음이 옳은지, 좋은지, 아름다운지 판단한 후에 복음에 동의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회심 이후의 변화(12:1-2)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회심에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성령의 역사

 

에드워즈에 따르면 회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인 역사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좋은 삶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서 자신의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상위혹은 신령한원리를 치워 버렸다. 그러자 아담과 하와는 본능적인 자연적원리, 즉 육신적인 욕구와 욕망을 따랐고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모든 인류, 자기 모든 자손을 본능적인 하위원리의 지배를 받는 처지로 빠뜨렸다.

 

그러나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다시 들어오면 이 모든 상황이 바뀐다. 성령은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이미 고전이 된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에서 표현한 것처럼 새로운 본성의 원천이 되신다.

하나님의 영은 자신이 영구적으로 거하실 처소인 참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서 또는 생명과 행위의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천으로서 성도들의 심령에 영향을 미치신다. 성경은 성령을 움직이시며 때로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전이며, 처소이며, 영구적인 거주지인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분으로 묘샤된다. 그리고 영혼의 기능과 연합해서, 영혼 속에서 새로운 본성과 생명의 원리나 원천이 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상위의 영적 원리가 제어하는 생명을 사람 안에 넘쳐나게 하신다.

성도들이 받는 은혜로운 영향들과 그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들은 완전히 자연을 초월해 있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자연적인 본성이나 자연적인 원리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런 성령의 영향들과 역사들은 본성적인 자질들과 원리들을 계발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거나 고양시킨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을 결합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과 다르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 정도와 상황을 전혀 경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과 종류도 다르며 훨씬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초자연적인 영향 때문에 비롯된다고 말할 때, ‘초자연적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신앙감정론’)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신령한사람이 된다. 성령은 완전히 새로운,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키신다. 성령은 죄인의 생각에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이 참되고 신실하다는 것을 납득시키고 확신을 주고, 죄악된 가슴을 새롭게 하고 이 새로운 회심자 안에 내주하신다. 성령은 신자 마음을 집으로 삼아 그리고 은혜로운 감정을 신자에게 일으키신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에드워즈의 생생한 묘사는 회심이 사람의 지적 정신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 우리는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게 된다. 우리는 추상적인 신학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에 의해 회심한다.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에 있는 생생한 확신

 

우리 의지가 우리 생각을 따르고, 성령이 우리 영혼을 회심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어떤 진리를 심으실 때 회심이 발생하게 되는가? 성령의 회심키시키는 역사와 일반 종교적 경험을 구별시키는 내용상의 기준은 정확히 무엇인가? 회심은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생명을 주는 부활을 믿는 순간 발생한다.(‘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과업을 떠맡으시고 우리를 대표하사 스스로 율법 아래 들어가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바로 이 동일한 율법에 따라 고난을 받으셔야 하고, 이 동일한 율법에 따라 순종하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책을 친히 떠맡으사 우리의 보증이 되셨기 때문에, 이 동일한 율법에 따라 고난을 받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는 무죄선고를 받으실 수 있었다. 또한 이 동일한 율법을 순종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는 보상을 받으실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개인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머리로서 무죄선고를 받으셨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무죄선고 안에서 무죄선고를 받는다. 그리스도의 보상받으심 안에서 우리도 보상을 받는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의롭게 되셨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가 의롭게 되셨다는 것에는,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우리의 죄책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는 것과 자신의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승귀와 영광을 받으시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 그런데 신자들은 믿는 순간, 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도록 허락받는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준다(4:25)”

 

이 인용문은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자신이 사역하는 동안 전했던 복음의 가장 간결한 요약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는 복음의 근본 원료인,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믿어야 하는 진리가 담겨 있다. 성경의 복음이 회심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악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구원의 핵심과 참된 기독교의 중심이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람의 죄책을 친히 떠맡으사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내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삼켜 버리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대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선물인, 영생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도 보상받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이고, 에드워즈의 설교의 핵심이며, 회심에 대한 다른 모든 논의가 흘러나오는 중심적 내용이다.

 

구원을 맛보기 위해서는 이 복음에 단지 동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이 복음을 믿어야 한다. 거룩한 것에 대한 참된 감각은 회심한 사람의 마음의 본질적인 특징이고 오직 성령의 역사와 영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적이고 영적인 빛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신적이며, 최상의 탁월함을 참되게 깨닫는 감각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구속,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역의 탁월함을 실제적으로 깨닫는 감각이다. 이런 것들에는 신적인 최고의 영광 즉 다른 것들보다 더욱 뛰어나고 우수한 본성의 탁월함이 있다. 영적으로 조명을 받은 사람은 그런 영광을 참으로 이하하며 본다. 즉 그런 영광에 대한 감각이 있다. 그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단지 이성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낀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좋은 분이라는 이성적인 믿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사랑할 만한 것이라는 감각이 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평가를 받기에 얼마나 합당한 분이신가 하는 것 즉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에드워즈는 참된 감각이 지적인 확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멋지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하는 견해를 가지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꿀이 달다고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꿀이 달콤함을 맛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것이 탁월하다는 것을 개념적이며 이론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그것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머리와만 관게되는 것이나 후자는 가슴과 관련되어 있다. 가슴이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때, 그것은 반드시 이해를 했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이 자기 영혼에 달콤하고 즐겁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것의 사랑스러움을 가슴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탁월하다고 하는 이론적 개념을 갖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의 모방에 불과한 명목상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는 목회자 겸 신학자인 에드워즈가 여기서 말하는 참된 감각에 있다. 이 표현 자체가 참된감각’, 깨달음과 감정을 결합시킨다.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기독교, 에드워즈가 경험한 기독교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 전인과 관련이 있다. 열정 없는 머리만의 지식은 기독교를 흥미로운 명제 모음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진리 없는 가슴뿐인 지식은 기독교를 또 하나의 종교 경험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머리와 가슴이 결합될 때 비로소 이상적인 균형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참으로 믿고 나면, 이전에는 연예인, 스포즈, 영화 또는 여러 다른 흥미로운 것에 비해, 그토록 진부하게 보였던 기독교, 성경, 교회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들이 지상의 일시적인 모든 것들과 크게 구별되어 영광스럽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에드워즈의 지극히 성경적인 견에 따르면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더 이상은 기독교를 세속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없다. 고치에서 나온 나비처럼, 한번 회심한 사람은 기독교와 기독교의 교리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이런 차원에서 구속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으로 넘쳐난다. 아무런 중심도 없고 심지어 자기파괴적이었던 삶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경 모든 페이지를 수놓고 삶의 모든 구석에 스며들게 된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