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9/6 주일설교, '감당할 시험 밖에는', 고전 10:11-13

강대식 2020. 9. 8. 21:57

2020-09-06 주일설교

본문: 고전 10:11-13

제목: 감당할 시험 밖에는

 

1. 이스라엘 역사는 본보기와 깨우침을 위한 기록이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다.

101절부터 10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

 

구름 아래는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왔음을 말한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9:23)

 

바다 가운데는 홍해를 마르게 하사 건너게 한 기적을 말한다.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 곧 만나를 먹었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들은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며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다.

그들은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다.

그들은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다.

 

그들을 본보기로 보면서, 우리에게 우상 숭배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주를 시험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게 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라 곧 우리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멸망을 본보기로 보면서, 깨우침을 받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표면적 유대인으로 만족하고, 살점을 찢은 할례로 만족하며 구원받은 줄로 여기고 있다.

악을 즐겨 행하고, 음행을 하고, 우상 숭배를 하고, 주를 시험하고 원망하기를 잘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한다.

그것이 주를 시험하는 것이고 원망하는 것이다. 주 위에 자기가 있다.

 

우리 시대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예레미야 시대와 같다고 쉐퍼는 통탄하였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들은 외식하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였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서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였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3,38)

 

그들의 의를 보면서 오늘 우리 시대 교회의 어르신들은 더 나은지,

우리의 의는 그들보다 더 나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성경이 말씀하는 참 그리스도인인지, 유사 그리스도인인지

그들의 멸망을 본보기로 보며서,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현대 교회도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갈구한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저지르고 있다.

 

악행과 음행과 시험과 원망이 얼마나 쉽게 들끓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그것들이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었다면, 우리의 멸망의 원인도 되는 것이다.

구름 아래 바다 가운데서 지나고 신령한 만나와 음료를 다 같이 마셨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으므로 광야에서 다 멸망을 받게 하셨다.

 

다수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큰 교회, 큰 교단, 유명 목사, 유명 신학 교수들, 베스트 셀러 책들, 인기 프로들, 좋아하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지 모르다가, 지옥 문 앞에 가서야 소스라칠 것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고 가는 자들이 많다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다. 그들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주범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말씀은 오늘날은 교회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말씀이다.

교회생활 평생 잘했는데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으므로 멸망을 받은 것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도 적다는 말씀을 유념해야 한다.

 

찾는 이도 적은 길을 지금 찾아가고 있지 않다면, 착각하며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다섯 장 밖에 안되는 예레미야 애가의 슬픔과 통탄이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본보기와 깨우침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을 알고 다시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아모스 요나 미가 스가랴의 선지서들이

오늘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처럼 악행과 음행과 우상숭배와 시험과 원망을 하다 멸망을 당하지 말라고

깨우치며 본보기를 삼으라고 하고 있다.

 

2.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런즉은 뭔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 당한 것을 보았은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는 선 줄로 생각하고 있다.

 

자기에게는 별 문제가 없는 줄로 생각하고 있다.

남이 문제이고 저 사람이 문제이지 나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문제가 있는 줄로 알았으면 지금 그렇게 무사태평하게 살고 있지 않겠지요.

 

사람들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본다.

주님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고 연후에 밝은 눈으로 남의 눈의 티를 빼라 하셨다.

티비 그만 보고, 인터넷, 모바일 그만 보고, 내 속을 잘 비쳐줄 수 있는 책을 보아야 한다.

 

성경을 즐거워하며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주께 복 받을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마침내 복을 받는다.

 

돈과 일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그것만을 묵상하는 사람은 저주와 멸망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둘 다 섬긴다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사람이다. 그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일 뿐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자기 식으로 생각하면 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넘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 사사시대, 암흑시대, 멸망의 날이 기다릴 뿐이다.

 

어떤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른다.

성경을 읽어도 사람의 지혜로 읽으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읽으면 바리새인의 의에 머물고 만다.

말씀은 영에 있지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해야 한다.

새 언약의 일꾼은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한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기 때문이다.

 

새 언약을 모르는 일꾼들은 율법 조문으로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가르친다.

그가 알고 있는 율법 조문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있다.

영으로, 성령의 지혜로 읽고 해석하고 가르쳐야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교회 안의 사람들이 사람의 지혜와 성령의 지혜의 차이과 구별을 모르고 있다.

성령의 지혜로 쓴 책들을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만 스승만 만났고, 아버지 스승은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책을 통해 성령의 지혜를 만나야 한다.

로이든 존스를 그의 책들을 통해 하루 빨리 아버지 스승으로 만나길 바란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실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알고 깨닫고 이스라엘을 본보기 삼아 확실하게 새롭게 서야 한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멸망 당하지 않도록 기독교 역사가 검증하고 보장하는 전통에 서야 한다.

 

3. 감당할 시험 밖에는 당한 것이 없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기 위한 시련과 연단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셨다.

 

야고보 사도는 1절의 문안을 끝내자 마자 이 말씀부터 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우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험, 시련과 연단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온전히 기쁘게 여길 일이다. 왜냐,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 없이 우리는 온전해질 수 없고 자기 소견에 옳은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다윗을 만들기 위해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선한 목자께서

그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셨다.

 

요셉의 시련, 모세의 시련, 아브라함의 시련, 욥의 시련이 없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시련이 없었던 사울과 솔로몬은 멸망의 길로 갔다. 그들은 도무지 회개할 줄을 몰랐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으로 시련을 주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를 확실히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도 위험이나 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한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아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다.

마침내 복을 받고 영생을 누리고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한 과정임을 믿고 인내해야 한다.

 

헤브론은 인간의 욕망만으로 오르지 못한다. 압살롬을 보라.

헤브론에 오르기 전에 다윗은 시글락의 마지막 위기를 통과해야 했다.

그 동안 모아온 것들이 불타고 빼앗기고 사람들도 사로잡혀 가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부하들도 다윗을 돌로 쳐 죽일려고 하는 위기였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의지하여 용기를 얻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회복하였고,

그 시련을 통과한 후에 헤브론에 올랐고 왕으로 세움 받는 영광을 누렸다.

 

헤브론은 갈렙에게도 나이 85세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고,

철옹성과 거인들과 싸워서 정복해야 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정복하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확신하였다.

 

사람들은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당한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

놀라고 두려워하고 주를 시험하고 원망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

환난 날에 낙담하면 자기 힘이 미약함을 보일 뿐이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다. 신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시련이 많아서 넘어지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주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시고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즐거워하고 기뻐할 날이 올 것이다. 헤브론에 오르고, 종려나무 같이 번성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