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종교개혁은 온 세상이 끄지 못할 불/ 그리스도와 그의 의가 개혁의 핵심/마이클 리브스

강대식 2021. 1. 31. 16:32

종교개혁은 온 세상이 끄지 못할 불이다

그리스도와 그가 선물로 주신 의가 바로 진정한 개혁의 핵심이다/ 마이클 리브스

 

우리는 관대하다. 각 교회의 초점이 되는 제단을 강단으로 바꾸었던 종교개혁 정신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강단이라니, 강단이 대체 뭔가? 그런 생각은 듣기에 권위주의 같고 속임수 같다.

우리 종교의 핵심 대의는 평화와 일치이지만, 이런 대의는 우리가 가능한 한 이런 말들을 거의 정의하지 않아야 존속할 수 있다고 말한 이가 바로 에라스뮈스였다. 요컨대 우리는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따지는 엄밀한 신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신학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느끼는 문제들을 놓고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에라스뮈스에 대한 루터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신학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러느라 진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군요.” 어쩌면 이 말은 신랄한 욕설이었을 수도 있다. 루터가 한 말은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미친 놀라운 영향을 담아 낸 말이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지위를 선물로 받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더 거룩하게 되는 과정인가?’ 같은 문제들이 결코 작은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내 구원이 오로지 그리스도께 달려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의 거룩함도 내 구원을 좌우하는가? 어느 쪽이 옳은가? 교리에서는 글자 하나 지우고 토씨 하나 덧붙이는 것이 그저 귀찮고 까다롭게 구는 일이 아니며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에라스뮈스가 교리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주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의 태도가 우리를 구속하고 좀먹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에라스뮈스가 다만 할 수 있었던 일은- 그가 몸담고 있는 시스템에 묻어 있는 얼룩을 닦아 내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보다 더 깊은 교리 문제에는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고, 표면적 변화를 만들어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는 그 당시 교회의 포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우리도 교리를 무시하는 한, 그것이 무엇이든 이 시대를 지배하는 시스템이나 영의 포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라스뮈스는 성경은 가졌지만 복음은 갖지 못했다.

 

그는 우리가 쓸 수 있는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만들어 종교개혁을 일으킬 연료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가졌지만(그리고 성경을 깊이 연구했지만), 그 성경이 자신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그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성경에 다스리는 권위는 물론 아무런 실제적인 권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결국 에라스뮈스는 성경을 많은 목소리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성경의 메시지를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모습에 맞게 뜯어 고치고, 쥐어짜며, 끼워 맞추었다.

 

사람을 질식시키는 이런 체제에서 벗어나 어떤 실질적 개혁을 이뤄 내려면, 루터의 태도 곧 성경만이 믿음의 확실하고 유일한 원천(오직 성경)이라고 믿는 태도가 필요했다. 성경을 최고 권위로, 성경은 다른 모든 주장과 다르며 그 모든 주장을 지배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다른 것에 지배 당하고 그 메시지를 다른 것에 빼앗기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성경을 공경하거나 성경이 어떤 권위를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정도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성경은 변화에 없어서는 안 될 열쇠였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단순히 성경의 권위만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으나 에라스뮈스는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성경에서 간파한 내용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스뮈스는 성경을 그저 도덕에 관한 권면을 모아 놓은 책이자 신자들에게 더욱 그들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라고 독려하는 책으로 보았다. 루터는 에라스뮈스의 이런 견해를 복음을 뒤집어 엎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낙관론은 죄의 심각성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터가 간파했듯이, 죄인에게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자다. 성경에는 구원을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루터보다 한 세기 뒤에 등장한 리처드 십스가 탄식했듯이, 사람들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그가 선물로 주신 의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아주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가 선물로 주신 의가 바로 진정한 개혁의 핵심이었다. 성경을 펼쳤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의라는 선물을 베풀어 주셨다는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종교개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 투 더 퓨처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부정하는 운동, 다시 말해 로마에게서 벗어나자는 운동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긍정하는 운동, 곧 복음으로 나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순전히 부정으로 일관한 반응은 급진파의 전형적인 특징이었으며, 주류 종교개혁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혁신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현대인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을 단순히 전진이라는 대의에 포함시킬 수가 없다. 실제로 종교개혁자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처럼 새것에 매혹당하지 않았다. 옛것을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내치지도 않았다. 그들의 의도는 기독교의 원형인 옛 기독교, 오랜 세월 인간의 전통 속에 묻혀 있던 기독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이 단순히 500년 전의 역사적 상황에 맞선 반동에 불과했다면, 그것이 단지 16세기에 나온 전진에 불과했다면, 종교개혁은 끝났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늘 복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프로그램이었기에 결코 끝날 수가 없다.

 

오늘날의 상황은 그때만큼이나 큰 개혁이 필요함을 증언한다. 이신칭의 교리를 하찮다거나 잘못된 생각이라거나 복잡하다 하여 부끄럽게 여기고 멀리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루터가 겨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조항들이라고 말했던 것을 포기하거나 타협할 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은 성경을 새롭게 읽는 데 그치는 일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와 자아존중을 외치는 문화는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지워 버렸다.

 

우리 문화는 묘하게도 죄라는 오랜 문제에 굴복하면서 이 문제에 대답할 수단조차 갖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더 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연일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다. 이런 메시지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분명 행위를 앞세운, 행위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다. 반면, 종교개혁은 가장 돋보이는 좋은 소식을 갖고 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죄인이 매력있는 이유는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죄인이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본능에 어긋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은 이 메시지만이 진지한 해답을 제시한다.

 

복음은 심히 중대하고 아름답고 달콤한 메시지요 기쁨을 주는 메시지이며, 죽음조차도 물리치는 메시지다. 리처드 십스가 종교개혁을 가리켜 온 세상이 결코 끄지 못할 불이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pp 287-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