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의 결과/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이안 머리

강대식 2021. 2. 3. 21:23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의 결과/ 이안 머리

 

교리적인 확신은 필연적으로 실천적인 중요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 ‘교리가 잘못 되면 실천은 항상 위험에 처하게 된다.

첫 번째 견해는 성령을 주시겠다는 구약의 약속이 현재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그의 임재하심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가운데 언제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많은 시험을 받아 침체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날들로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부어주신 모든 은혜와 도움이 지금은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 위배된다고 한다. 우리는 도리어 다음과 같은 많은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더 크고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 기도하거나 바라지 않는 태도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만족해 버리거나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사에서 자주 일어났다. ‘나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교회는 기도에 힘쓰기보다는 인간적 계획이나 은사들, 학자들을 더 의존하여 결국 무기력한 타성에 자주 빠져들곤 했다. 그런 시기에는 자연히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 친히 역사하시고, 심지어 성경의 진리를 더욱 확증하신다는 사실을 거의 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의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살전1:5)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첫 번째 견해의 지지자로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아브라함 카이퍼이다. 그러나 그가 네덜란드 보브러지 마을에 일어난 부흥에 대해 말할 때는 자기 주장과 부합되지 않는 말을 하였다. 마침내 9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주님은 그의 간구에 응답하시기 시작했고 놀랍고 충격적인 주의 역사하심이 나타났다고 했다. 당시 그 교구를 담당하던 몰롬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부흥을 비상한 것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황폐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통 보수를 고집하며 외모로도 흠잡을 데가 없는 교인들을 십자가 앞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콤리는 이렇게 묘샤했다. ‘우리 마을에서 있었던 주의 역사는 성령의 인 치심을 받은 모든 회심한 백성들이 끊임없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모실 뿐 아니라,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거절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견해는 부흥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제시할 수 없으며, 따라서 부흥을 기다리도록 격려할 수 없다.

 

두 번째 견해는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다. 사람의 책임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부지런한 자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있는 반면 수동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힘써 전도를 하면 열매를 맺을 것이며, 열심을 다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오류는 교회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고 부흥을 경험할 때만 전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예외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처럼 보편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부흥이 없는 모든 시기는 마치 교회가 성령을 훼방하는 시기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게 된다. 부흥이 없는 것을 황폐함,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니의 말처럼 기독교의 부흥은 필연적으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려 놓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많이 순종하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부흥이 없는 곳에는 불순종만 팽배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심각성을 거론하면서 윌리엄 매크롤플린은 만약 피니의 신학이 옳다면, 교회의 역사는 기독교의 왕성 또는 기독교의 빈곤 두 가지로만 대별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 두 번째 견해는 성도들에게 부흥을 위해 열심을 품고 노력할 것을 격려하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머지않아 실망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흥의 은혜는 단지 그것을 사모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기본적인 것들은 우리의 관심 밖에 있다고 해서 그냥 지나쳐 버린 채 특별한 은총만을 사모한다면 우리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곧바로 낙심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부흥이 계속되지 않는 한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조지 휫필드 목사는 친구 윌리엄 매컬럭 목사에게 이 점에 대해 주의를 준 적이 있다. 결코 1742년의 부흥이 교회의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자네는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그런 놀라운 일을 이미 목도하지 않았는가’.

로이드 존스 목사 역시 비슷한 예를 들었다. 웨일즈의 한 목사의 경우 1904년의 부흥이 있던 시기에 목도하고 경험했던 것만을 계속해서 갈망했기 때문에 그의 전체 사역은 황폐화되고 말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낙심에 빠져 거의 40년간 열매 없이 불행하게 그리고 쓸모 없는 세월을 보냈다.”

 

두 번째 견해는 또 다른 경향이 있다. 만약 부흥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몹시도 부흥을 일으키고 싶어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며, 만일 이런 노력들이 흥분을 자아내고 군중들을 많이 모을 수 있게 되면 일시적으로는 정말 기대한 것이 성취된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애써 노력을 기울여 고작 일시적인 결과들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부흥의 개념을 왜곡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구학파의 세 번째 견해는 도출되는 결과로 볼 때 성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견해는 그 이론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을 최대한 피하는 한편, 다른 견해들의 장점만을 모아 혼합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견해는 오순절이 끝나 버렸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더 이상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복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모순으 안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결과적으로 부흥을 배제하는 것이요, 두 번째 견해는 부흥이 모든 것인 양 지나치게 부흥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이 양자는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부흥을 이해하게 되면 이 모든 함정을 피할 수 있다. 역사는 부흥을 과소 평가하거나 과대 평가하지 않는다. 이 견해는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며, 따라서 교회가 누리는 일반적인 은혜를 평가절하 하지도 않는다.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길만을 걸어가고 있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패턴 박사의 말처럼 성령의 한량없는 부어 주심을 믿어야 한다.

 

부흥은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에 첨가되는 영광스러운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때에 엄청난 규모와 비상한 속도로 회심자들을 만들어 내시며,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을 고양시키고 원수의 심장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그와 같이 뚜렷한 부흥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그 기간에 하나님은 온 미국 땅에 만연되어 있던 불신퐁조와 세속적인 것들에서부터 미국을 구원해 내셨다.”

 

부흥의 진위를 구별하는 실제적인 적용

 

일반적인 은혜의 상태와 부흥은 강도와 수준의 차이이다. 이것은 본질의 차이가 아니다. 더 많은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지는 것이 부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더하여 받는다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누군가 부흥을 경험했다고 말할 때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표지가 그 속에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 가고, 성경 말씀에 경외감을 가지고 이에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날마다 거룩에 힘쓰며, 이웃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흥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소유한 것에 더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와 똑같은 특성들과 행동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부흥의 진위는 바로 이렇게 입증된다. 그러나 이런 특성들을 우선적으로 눈여겨보지 않고, 방언이나 계시, 공적인 죄의 고백, 흥분의 상태 등과 같은 다른 표적들을 부흥의 증거로 생각하게 되면 잘못된 판단이 내려질 것이 거의 확실하다.

 

논의의 핵심은 어디에서 부흥의 중거를 찾아야 하는가이다. 잘못된 것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취급된다면 정확한 식별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정상적인 기독교의 근본이 아닌 것들은 결코 부흥의 진위를 판단하는 안전한 표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례적인 현상에 근거를 두고 부흥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곳에서는 그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사건들이 반드시 그 주장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할 때 그에 대한 증거로서 가장 비중 있게 제시되는 것은 언제나 성령의 역사하심의 표지라고 불리는 몇 가지 현상들이다. 이 현상들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의 다음 세 권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할 저자는 아무도 없으리라고 본다.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균형잡힌 부흥론, 신앙감정론.

 

1742년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제임스 로브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많은 사람에게서 부흥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은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 죄를 미워함, 자기 의의 포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하나님의 의를 붙잡음, 모든 일에 주만 의지함, 철저한 삶의 개혁, 복되신 구세주에 대한 최고의 사랑,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을 향한 사랑,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구령의 열정과 불신자들의 회심을 위한 기도 등이다.”

 

- 이안 머리,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PP 5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