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6/13 주일설교, '여호와를 찬송하라', 시 100:1-5

강대식 2021. 6. 13. 17:21

2021-06-13 주일설교

본문: 100:1-5

제목: 여호와를 찬송하라

 

1.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100:1,4)

 

찬송은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 부르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43:21)

 

사도 바울은 웅장하고 우주적인 에베소서의 본 내용을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며 그 찬송의 대상과 이유와 목적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히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6)

 

다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송하고 그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2)

 

다음은, 우리로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고 인치시고 보증이 되신 성령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14)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분의 영광을 찬송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든 영광과 존귀와 위엄과 나라와 권세가 하나님께만 영원무궁토록 있음을 찬양해야 한다.

내 필요한 것, 구하는 것에 급급하여 영광의 찬양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며 노래하는 것이고,

송축은 기뻐하며 축하하며 하나님은 기리며 노래하는 것이라고, 뜻을 분리하기도 하지만,

찬송과 송축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기뻐하며 노래한다는 뜻에서 동일하다.

 

시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부른 찬송시이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잃어버린 찬송을 다시 하게 하며

만든 것이 시편 찬송이었다. 당시 널리 보급되었고 찬송하였다고 한다.

우리도 시편 찬송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시편 100편은 단순하면서도 여호와께 드리는 찬송을 축약하고 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한다.

온 땅과 그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를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면서 노래 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가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명령이 곧 찬송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찬송은 제사이며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3:15)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한다.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은 성경에서 항상 함께 한다.

감사하고 찬송하며”(대상23:30)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18:49)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감사와 찬송을 잊어버리고 원망과 대적하다 멸망하였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감사와 찬송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와 배교로 멸망하였다.

형식적인 찬송과 감사가 아니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송의 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여호와를 알고 우리와의 관계를 알고 찬송하라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00:3)

 

베드로 사도는 그의 마지막 편지의 끝맺음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찬송과 감사도 제대로 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저 주신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도 자라가야 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도 자라가야 한다.

 

그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방법도 베드로 사도는 말씀해 주었다.

갖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무엇인가?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알고 있는 말씀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될 수 없다.

세상의 영을 받아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가르친 말씀,

그 말씀과 해석들은 결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될 수 없다.

 

그 말씀과 그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피 흘리며 영으로 전한 말씀이요,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피를 흘리며 생명을 바쳐 영으로 가르친 말씀이요 해석이다.

 

주님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른 말씀이요,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말씀은 이미 율법책과 성경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확정되었고,

이제 그 해석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영과 육을 가르고 생명과 사망을 가른다.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말씀을 육으로 사망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사사시대도, 왕정시대도, 중세 쳔년 카톨릭도, 종교개혁후 기독교 오백년도,

말씀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석하고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해석 적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다.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던 그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전통,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가르친 전통, 곧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아

그 영의 지혜로 가르친 전통, 그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맛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을 알 수 없고,

그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갈 수 없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할 수 없다.

여러분은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고 있는가?

 

무섭고 놀라운 일이 닥치기 전에,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에서 벗어나고

거짓 제사장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좋게 여기는 내 백성의 무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다고 탄식하였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지 않으면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2:8)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면 그 안에서 행하면서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아야 한다.

그럴려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교훈을 받고 그 교훈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와 찬송을 넘치게 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그 젖으로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바알브올에 가담하는 무리가 되고 만다.

민수기 25장에서 광야생활이 끝나는 시점에 모압 땅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24천명이 염병으로 죽고, 가담한 백성의 수령들은 태양을 향해 목매어 달았다.

 

그리고 26장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명단을 다시 계수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를 보면 그 명단에 올랐다고 구원이 보장되지 않는다.

저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구원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이루어가야 한다.(2:12)

바알브올에 가담하는 것은 육적인 간음 뿐 아니라 영적인 간음이 더 무섭다.

사실은 영적인 간음이 이루어졌기에 육적인 간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 또한 바알브올에 가담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가 그의 것임을 알았다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임을 알았다면,

그 아비들이 다 죽어간 광야생활이 끝날 즈음에, 바알브올에 가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광야 생활이 다 끝난 줄 알고, 안심하고 방심하다가, 세상과 그 방법을 따라가다가

바알브올에 가담하여 멸망의 자식이 되고, 최후 명단에서 제외되고 마는 것,

그 민수기 2526장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도 바알브올에 가담하는 것이다.

 

사람은 순전하고 신령에 젖에 사로잡힘을 받지 않으면,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곧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정신이 깨어야, 바알브올의 음행을 본받지 않을 수 있다.

 

3.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100:5)

 

모세는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다고 찬송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다.

악은 그분하고는 관계가 없고 악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그분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분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순수하신 분이시다.

그 거룩함과 순수함에서 공의와 정의가 나오고 선하심 곧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나온다.

하나님을 아는데, 이 순서가 중요하고, 전체 그 성품의 균형과 통일과 조화가 중요하다.

 

선하심과 사랑,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먼저가 아니다.

거룩이 먼저이고 공의와 정의가 그 다음이고, 사랑과 선허심은 그 다음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모든 속성이 완전히 균형을 이루고 조화와 통일을 이루신다.

 

우리의 죄는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정의를 거스르는 것이고,

우리가 죄 사함과 용서와 긍휼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곧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의 영원함과 대대에 이르심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선하심 곧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심을

찬양하고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백성은 원래 성전 문 안에 그리고 그의 궁정 곧 뜰에까지만 들어가고

성소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과 은혜로 말미암아,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만을 찬송하는 자들은 항상 바알브올에 가담하여

불순종과 배교와 음란과 우상숭배에 빠지다가 멸망하였다.

하나님을 알고 우리와의 관계를 아는 데,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알아야 하고,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즐거운 찬송과 감사로 찬송해야 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정의를, 먼저 알고, 앞에 두면서,

우리는 그의 선하심 곧 그의 인자하심과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찬양해야 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함을 기억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