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2:7)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 마디의 말 속에는 전체의 복음, 특별히 성탄절 메시지의 모든 진수가 들어 있다. 이 7절에서도 사도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시며 그의 은혜의 놀라움을 드러내고 계심을 말해 나간다. 그가 그러한 것들을 드러내시되 더욱더 특별히 그가 그 일을 행하신 방식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라는 방식을 통해서였다.
이 이름! - 여러분은 그것을 바울 서신들 가운데서 어디서나 발견하는 것이다. 바울이 얼마나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가를 보기 바란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서” 여러분은 그것을 너무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는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라고만 할 줄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부요를 재기 시작하는 출발점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모든 은혜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고 강조할 필요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지 않는가?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생각하는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도 모든 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도는 그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을 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수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만이 사람을 다루시고 사람을 축복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분명히 그것만으로 충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없이 기도할 수 없다.
요한은 요한복음 초두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고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다. 그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다 그는 머리이다. 모든 것이 머리로부터 온다. 율법 자체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몰아가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축복도 기대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몽학 선생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유일한 통로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오직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방식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편에서 살펴보아 왔으나 이제 하나님 편에서 그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일을 행하는 방식은 행하는 그 일 자체보다 훨씬 더 의미 있을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인류를 축복하시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가 우리를 보아 주신다는 사실 자체가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행동의 궁극적인 척도는 그 행동이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인 고난과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개인적인 손해를 함축하고 있을 때 그것은 훨씬 크게 가치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재는 어떤 유의 척도를 진정으로 알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국면에서 그 점을 바라볼 때이다. 그것은 너무 놀라워서 사람의 척도로서는 도저히 전부를 잴 수가 없다. 사도는 우리의 이해의 눈이 열려서 이 높이, 우리가 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지점까지를 재기 위해서 노력하고, 끊임없이 그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측량하기에 힘쓰도록 기도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 발에서 신을 벗어야”하는 지점이 여기이다.(출3:5) 만일 여러분이 측량할 수 없는 부요를 재기 원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헤아리기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살펴보기 시작해야 한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고통을 받을 수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논쟁을 했다. 우리는 그것을 통찰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서 해놓으신 일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보내사” 보내신 일이 있었다.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에 계셨으며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고 계셨고 동등하게 영원하신 분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보내신다. 그것이 하나님께 어떠한 것을 의미했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보여 주시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이다. 또한 하늘에 있는 모든 정사들과 권세들이 하나님의 엄청난 지혜를 감탄하게 되는 것도 이 행동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그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하나님께서 “주셨다”니!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다. 주되 그것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아끼지” 않으셨다.(롬8:32)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으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자기도 의로우시기(롬3:26) 위해서 먼저 무엇이 필요하였던가를 아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이 죄인이 아니지만 죄를 삼으셨다.
우리는 너무나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쉽게 취급하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 입심 좋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를 생각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고 그 아들을 상하게 하셨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로 하여금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슬픔을 담당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세 마디의 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생각하기까지는 그 은혜를 측량조차 하지 못한다.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하심! 누가 이것을 잴 수 있겠는가?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이 복음이다.
- 그 점을 성자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카알라일이 말한 바 “무한성과 광대성”, 곧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혼돈케 하고 복잡하게 만든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잴 수 있는가?
사도는 빌립보서 2:5-11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1) 그것은 그 영원한 영광의 모든 특권들과 표지들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정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는 그의 신성의 표지들을 고집하여 취할 권리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정해진 기간 동안 그것들을 미루어 두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신성을 미루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표지들을 제쳐 놓으신 것이다.
2) 그는 자신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자기를 비워” 그의 신성에 있어서 자신을 비우셨다는 의미에서 “케노시스”(kenosis)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다. 여전히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그분은 땅에 내려오셔서 어린아이로 태어나시고 사람으로 살아가셨다. 그는 여전히 같은 분이었지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아무도 그 왕을 알지 못한다. 왕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낮추신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인 체하였다. 그는 자기의 왕의 신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표징들과 장식들을 버려두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땅에 내려오셨을 때에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비록 그는 언제나처럼 정확히 그였지만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종의 모양을 취하셨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측량하기 시작한다. 여러분과 저의 구원이 의미하는 바와 또 여러분과 저의 구원을 위해서 지불된 대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점이 말해 준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얼마나 측량하고 있는가? 베들레헴의 아기에 관해서 얼마나 감상적이 되기가 쉬운가? 여러분이 그를 살펴볼 때 영원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여기 이 세상에 그가 오시게 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머리로 시작하고 이지로 시작하고 이해로 시작한다. 사도는 우리의 이해의 눈이 열려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3) 그는 성육신하시기 전에 먼저 그 두 가지를 내리셔야 했다. 그런 다음에 성육신이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 여전히 그 하나님이면서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면서 참 사람이셨다. 거기서 우리는 그가 구유에 누이신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시고 계셨으며 더 나아가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과 천사들이 놀라도록 하셨다. 천사들이 하늘의 장막 너머를 내려다 볼 때 다음과 같이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처럼 약하고 도울 자 없는
비천한 히브리 쳐녀에게 난
아기는 누구인가?
거기는 오직 하나의 대답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주시요 영광의 왕이시다” 바로 그것이 첫 번째 성탄절의 놀라운 이야기이다.
그 얼마나 역설인가! “육체로 가리워진” - “신성이 보인다”. “한 아기가 울고 있다” -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은혜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자비하심을 보여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이며 아들을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에 보내심을 통해서이다.
4)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죄의 세상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여러분이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어떤 죄의 행동들을 목격하면 굉장한 혐오감과 반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몇 만 배로 확대시켜 보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같은 세상에서 사셨고 거하셨다고 하는 것이 어떠하였던 것인가? 우리 타락한 인간들과 섞여 사는 것이 어떠하였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묘사된 그 분이 세상에 산 것은 무엇을 의미했겠는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재는 척도의 일부이다.
그는 33년 동안 자신을 향한 죄인들의 거역을 참아내셨다. 그가 이 땅에 계실 동안 자신의 집을 가진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만드시고 아무것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던 그분이 머리 둘 곳이 없었고 자기의 집이 없었다. 그를 향해 모욕하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보라. 그를 때리고 야유하고 침 밷고 욕설을 퍼붓고 채찍으로 때리고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 사실들에 관심을 집중하여 그것들에 곧 바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철학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어떤 아름다운 개념으로 어떤 기이한 환상이나 어떤 시적인 개념으로 구원 받지 않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을 보라. 고뇌에 차서 “땀이 피처럼” 되도록 땀을 흘리신 그분을 보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있었고 그런 다음에 십자가와 고난이 있었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울부짖으셨다. 고통을 당하시면서 버림받은 느낌을 가지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 죄의 무거운 짐을 담당하셨다. 그의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당하셨다. 그것이 은혜를 재는 척도이다. 그가 모든 것을 참으시고 계시면서 그는 여전히 사람의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셨다.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죄의 모든 형벌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고통을 받으셨다. 축복은 우리에게 오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 이다.
- 사도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신 것은 장래의 오는 모든 세대에 그의 영광과 위대함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창조의 아침에 노래 부르던 천사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는 날 아침에 노래 불렀다. 그분이 아기로 태어나서 구유에 연약한 아기로 누워 계신다. 그들이 노래 부르고 메시야의 탄생을 선포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계속 놀라고 있는 것은, 지나간 세대의 선지자들이 이러한 일을 예언했을 뿐 아니라 뒤따라올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도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천사들로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그 얼마나 놀라운 진술인가?(벧전1:12) 이 “일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다음에 오게 될 영광”이요 성육신의 전체 진행과정이다. 삶과 속죄 죽음과 그리스도의 장사지냄과 부활과 영광, 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 일들을 천사들이 살펴보기 원한다고 말한다. 천사들이 그 일을 살펴보기 위해서 몸을 굽히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창조자의 무덤, 그것은 모두 놀라운 일이다. 그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알고 보았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우리 배반한 죄인들이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해서 살게 되었고 그의 존전에서 영화롭게 되어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행하실 방식을 볼 때 심지어 그들의 표현하는 힘으로도 그것을 바로 표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의 독생자를 그 수치스럽고 잔인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내어 주실 정도로 사랑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공로 없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 이것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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