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7)
-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해놓으신 일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가 절망적인 죄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새 생명을 얻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하늘에 앉게 하여 주셨다.
그러나 이제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셨는가? 그 동기는 무엇인가? 그 답변은 바로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 된다. 그는 이 모든 일을 “무엇을 할 의도를 가지고” “어떠한 목적을 바라보고” 일을 하신 것이다. 이 구절을 숙고해 나감에 따라 우리가 가진 기독교에 관한 관점과 우리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 관해 가지고 있는 관점들이 결함이 있으며 부적합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우리의 구원에 대한 전체 개념이 부적합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먼저 중생의 의미를 마땅한 바대로 진정으로 인식한 적이 없다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 하나님 면전에서의 우리의 위치와 신분에 관한 개념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했음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고통들은 우리가 언제나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오며 그리고 너무나 느낌과 주관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사실에서 일어나게 된다.
우리 구원에 있어서 주관적인 요소가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만일 주관적인 요소를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전체적인 지위가 매우 불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주관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며 우리가 이 대목에서와 신약서신의 대부분에서 발견하는 진리의 객관적인 표현을 확실하게 포착하지 못하는 것만큼 우리의 복락에 매우 치명적인 것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참된 성경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 대부분은 즉각 멀리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작은 일들을 제거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큰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나갈 때 이런 저런 일로 고통을 받는다.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기 쉽다. 이 모든 일을 바르게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목적 속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들인가를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이 본문에서 적용하려는 일종의 처방이다. 이것은 자기 중심, 자기 관심, 곧 다른 형태의 여러 고통들을 가져오고 병적인 상태를 유발하는 자기 관심에 대한 치료책이다. 해야 할 일은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머리를 들게 하고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과 계획 속에서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알아보게 하는 것이다. 바울 서신과 모든 서신이 쓰여진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는가? 어째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야만 했는가?
1. 구원의 제일 되는 목적과 의도와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것이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 것은 모든 장래의 세대들에게 보여 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하여 구원을 우리를 위한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나 주관적이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첫째는 객관적이요 구원에 있어서 첫 번째 의도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제일차적인 의미에서 관계가 있다. 그것이 성경 처음에서 끝까지 계속되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죄들이 아니라 그냥 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보다 역사적으로 볼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세대든지 역사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늘을 살고 있고 또 여러 문제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뉴스를 보고 들으며 그것들에 깊이 관여한 나머지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작은 경점에 불과한 우리의 시대가 역사 전체라는 느낌을 가진다. 우리는 인간의 전체 문제, 역사 전체의 위기, 특별히 구원의 전체 과제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도하는 바는 내 자신의 죄악들과 내 자신의 문제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죄의 차원에서 인간 전체 문제의 차원에서 또한 이 세상에 있는 악이라는 전체의 난제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사도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렇게 할 때만이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반대적인 것이므로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일어난 일 또한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 온 그 모든 것의 귀추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다소 사회적인 문제로 돌린다. 그것은 사회적인 문제이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의 문제이다. 회개한다든지 참회한다는 느낌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이 커다란 문제를 어떤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이나 그런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죄를 하나님께 대한 공격으로 본다. 마귀는 하나님의 엄위와 존엄과 영광에 거스려서 자신 스스로 일어났다. 마귀는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과 경쟁하는 경쟁적인 신으로 세우려 하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마귀는 그것을 허물어뜨리겠다고 작정하였다. 마귀는 개인으로서의 여러분과 나에 대해서는 매우 작은 관심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인격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큰 게임에서 이용할 수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고 엄위와 위대하심을 격하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공할 일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는 부산물이지 죄를 죄 되게 만드는 진정한 요점은 아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문제는 그 자신의 영광이요 그의 영원한 위대하심이었다. 구원이란 일차적인 목적과 목표는 하나님을 옹호한 데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한 진리를 밝히는 데 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물론 마귀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과 성품을 무너뜨릴 수 없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피조물의 안목에서 볼 때 그는 확실히 그 일을 했으며 할 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천사들의 경우와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에 있어서 성공했다.
오늘날 세상에서의 전체 문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태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시작하신 것은 자신의 영광과 위대하심과 자신에 관한 진리를 선언하고 명백히 변호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오는 여러 세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셔서 자신에 관한 진리를 변호하고 선언하고 보여주셨고 보여주시고 계신다.
2. 구원은 그 밖에 다른 것을(것으로는) 행할 수 없는 특수한 방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변호한다.
우리는 구원과 구속이라는 이 전체적인 운동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들을 배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던진다. “어째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타락을 허용하셨는가?” 궁극적인 대답은 우리는 알지 못하며 그것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것을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므로 완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죄에 빠짐으로 인해서 그것을 상실했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일부였다. 그 설명이 어찌됐든 간에 하나님께서 구속을 통해서 자신의 거룩한 존재와 본질과 성품에 속한 속성들을 드러내시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것을 지배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들과 성품들은 알려질 수 없었다.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 만일 사람이 그가 행했던 방식대로 죄에 빠지지 않았다면 긍휼에 있어서 하나님이 풍성하다는 개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그처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재는 궁극적인 척도이다.
“자비하심으로써”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그의 무지상태에서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아담은 그런 것을 알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보여 주시지 않았던 독특한 방식으로 이러한 일들을 보여 주셨다.
3.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와 위대하심과 영광을 드러내시고 변호하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장엄한 일을 우리를 방편으로 해서 우리를 통해서 맨 먼저 행하신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해서” 하셨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영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어떤 일에 의해서 자신과 자신의 거룩한 존재와 본성을 변호하고 계시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요 이것이 교회정신의 의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인 상태와 감정과 분위기와 지나가는 조건들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이 위대한 영원한 계획 속에서 자신들을 보게 된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의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9-10)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들로서 우리 자신들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영광스러운 전시가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이미 그것을 행하고 계신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최종적인 잔치를 여시고 그 모든 하늘의 정사들과 권세들이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될 것이며, 장막이 드리워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예비되고 있다. 잔치, 쇼, 전시회가 다가오고 있다. 놀랍고 기이한 일은 그것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완벽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9-13) “이들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과 사랑과 이해에 의해서 구속받은 사람들이다. “교회에 의해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이다. 언제나 고통과 아픔이 있는 우리 같은 비참한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과 혼란은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시는가?”이다.
저는 여러분이 저 하늘을 쳐다보고 그 영광의 마음을 던지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우리의 곤고한 주관주의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에게 일어난 일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행해진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4.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이르게 되었는가?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전에 처하여 있던 상황을 모두 보셨다는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의 옛 삶의 모습을 보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판과 지옥밖에는 받을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비참함과 야비함과 어리석음과 곤고함과 더러움 -그는 언제나처럼 우리를 보고 계셨다. 만일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될 것이고 멸망케 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우리를 구속하실 방식을 계획하셨고 작정하셨다. 그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만드셨다. 사람은 그것을 원치 않았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는 우리 속에 새 생명을 넣으셨고 그 자신의 생명을 넣으셨다. 그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살았다. 우리는 새로운 관심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영광 중에 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 일을 행하신다.
5. 이 모든 것에 비추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선함만을 생각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선한 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고도 은혜와 자비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장담한다면 여러분은 바로 소경이다. 우리의 생각은 다만 이것뿐이어야 한다. 나는 은혜의 빚진 자요, 내가 노래할 것은 자비로운 언약뿐이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과 생각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길로 행동해야 한다.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이제는 세상을 할 수 있는 한에서 멀리하고 싶어 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어떤 일들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에 좁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절대적으로 정결하고 흠이 없게 될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손을 씻고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신약의 호소이다. 여러분은 할 수 있는 한 세상을 멀리하라. 영광을 바라고 은혜의 길로 곧장 나아가라.
그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의 기초는 이것이다. 곧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자신의 영원한 성품을 드러내시고 계신다는 점이다. 여러분이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든지 거듭났음에도 다시 저주를 받는다는 개념보다 더 괴상망측한 개념이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목적은 나를 구원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본성을 옹호하려는 데 있다. 나는 그 목적의 쓰이심을 받고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니”
- 그 모든 것의 특권!
자신의 영원한 영광스러운 성품을 밝히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특권!
“나는 누구인가?” 다윗은 이 위대한 계획에 자기가 처하게 될 위치에 대해서 희미하게 알려 주셨을 때 “내가 누구관대 나의 집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큰 영예를 내게 주셨나이까?”라고 물었다. 우리도 그같이 말하고 싶은 것을 느끼지 않는가?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그의 계획과 목적과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 계획의 일부가 되도록 택하여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이기에 그의 영광과 지혜와 사랑과 자비와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나타내시기를 위한 계획 속에 나를 선택하셨는가?
그리스도인들이여, 자신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라. 그리고 영광을 바라고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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