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 바울은 이 세 절의 본문 말씀에서 2:1-7에서 행해 왔던 위대한 논증을 요약하고 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촛점에 모으고 있다.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이 무엇인가 대해서 진정으로 그리고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 특별한 진술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모든 복음전도에 있어서 여기 이 진술은 결정적인 진술이다. 또 그 진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 전체를 결정지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서신은 심오한 신학과 교리적인 진술들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일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방식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사도는 설교자요 복음전도자였다. 그는 어떠한 사람도 먼저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무엇인가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못하는 한, 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먼저 이 위대한 교리부터 시작한 다음 그 교리에 대한 적용으로 나아간다.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그들의 이해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의 부요함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인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기 위해서 그들의 눈이 열려지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믿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설명하고 파헤쳐 주고 그들 앞에 분명하게 지적하여 진술하여 주는 것이다.
1-3절까지에서는 부정적인 묘사로, 4-7절까지는 적극적인 묘사로 진술한 것이다. 그 다음에 자, 이제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8절을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의 계속되는 어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묘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처음 단계에서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난제들과 어려움과 의문들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혼란이 있는가? 혼란은 흔히 사람들이 사도의 이 위대한 진술들을 논쟁거리로 삼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도의 분명한 진술들을 취하는 대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알 수 없다. 만일 그러하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철학화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유일한 기초로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든지 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들인다고 말은 하면서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무능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고통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 진술들을 여러분 앞에 갖다 놓는 것이며 그 진술들을 숙고하고 묵상하기를 여러분에게 요구한다.
- 사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8절에서 적극적인 진술을 하고, 9절에서 소극적으로 그 점을 다룬다. 부정적인 것, 소극적인 것은 적극적인 것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10절에서 적극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결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정적인 면)
1.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전적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나올 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공로없이” 호의로 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우리가 받을 만한 또는 공로가 있어 얻을 만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진수는 우리가 구원을 주장할 만한 어떤 유의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라는 용어의 전체 의미이다.
앞의 1-7절에서, 인간은 죄의 결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본질상뿐 아니라 행동으로, 행실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태도로 그러하다.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육체와 욕심과 육체의 원하는 것들과 마음의 원하는 것들을 채우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가 어떤 다른 것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러한 존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떠한 것을 요구하는 권리가 있겠는가? 사도의 전체 요점은 그러한 존재는 하나님의 손에서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고 형벌밖에는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그에게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주시되 값없이 주시고 부어 주셨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즉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만일 여러분이 이 시점에서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다른 곳에서도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어 있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은혜로 된 것이다.
사도는 옛날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때에 그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고 말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저는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자신의 옛날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여러분의 죄의식이나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에 대한 깨달음에 있어서 무엇인가가 심각한 결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세기에 걸친 많은 성도들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던 것이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어떠한 자랑할 근거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서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떠한 자랑거리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에 대해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할 수 있는 중대한 시금석이 언제나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것의 배경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가진 생각이 자신을 자랑할 만한 어떤 근거를 제공하는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로마서 3장에서 사도는 그 점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거기에 하등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다소 사람 사울만큼 자만한 사람이나 자기 확신에 넘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자신을 자랑하였다. 베냐민 지파를 자랑했고, 바리새인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업하였던 사실을 자랑했다. 자신의 종교성과 도덕성과 자기 지식을 자랑하였다. 그는 뻔뻔히 서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누가 이것을 도전할 수 있는가? 착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인 내가 여기에 있다. 내 삶과 나의 모든 방면에서 나를 살펴보라. 나는 하나님을 만족해하고 있노라.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자기에게서 가장 큰 차이를 가져온 것 중에 하나는 그 모든 것들이 집어 던져졌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설물이요 분토!”라고 말한다. 그것은 비열하고 쓸모없으며 어리석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자랑하기 쉬운 두 가지 특별한 방면)
① 행위의 문제 - 우리가 자랑하기 가장 쉬운 것은 언제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마귀가 우리를 가장 교활한 방식으로 시험하는 것이 그 점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원수들이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리새인이 “내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며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2)라고 말할 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바리새인은 그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어떤 일들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악한 사람을 개종시키기보다 선한 사람을 개종시키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렵다고들 말한다.
복음적인 신앙의 가장 큰 적수는 선하고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성도들은 선한 사람의 손에서 그리고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가장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 행위 때문이다. 복음적인 복음은 어제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을 배격하고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나 행한 일에 대해서 교만한 것을 불식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그것을 참아낼 수가 없다. 그들의 모든 지위는 바로 그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복음전도를 미워하였고 그것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투쟁한 것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또한 우리 모두를 발가벗긴다.
바울이 어느 곳에서나 주장하듯이 밖에 있는 이방인이나 종교적인 유대인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행위가 길을 비켜야 한다. 그 행위는 자랑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 종교적인 행위나 선한 삶을 자랑하는 경향에 빠진다.
사도는 행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율법 아래로 다시 들어간다면 여러분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가장 훌륭한 행동이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충분한 선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한다. 그러하니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은혜에서 돌리지 말라.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로 자신을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10) 비극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것이다. 기독교로 인도하는 것은 선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선한 행실로 인도한다. 이러한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경향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지위와 완전히 충돌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자랑이 배격된다.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결코 자랑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우리의 선함을 의식한다든지 또한 우리가 행한 어떤 일을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정반대이다.
② 믿음 - 믿음은 가만히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느냐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이것”은 “믿음”을 가리키는 견해와 또 다른 견해는 “이것”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존 칼빈은 이것은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론이 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나, 그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을 “행위”로 돌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매우 인기 있는 복음주의적인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사람들에게 “여기 십계명이 있는데 그것들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한 쪽으로 밀어 붙이고 더 이상 율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만 말씀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행위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나를 구원하는 것이 내 믿음이라고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한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다시 그것은 나에게 어떤 자랑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바울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원인이다. 믿음은 하나의 도구요, 그 구원이 나에게 이르는 통로에 불과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난 이 구원이 나에게 미치는 그러한 수단인 것이다. “저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나의 믿음이나 신앙이나 내 이해나 내가 행하는 어떠한 것도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2장 처음 세 구절은 어떠한 다른 입장도 전혀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특히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하나님께 대해서 원수인” 사람이 어떻게 공로가 되는 어떠한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첫째로 죄인이 필요한 것은 생명이다. 나는 죽어 있으므로 살려달라고 요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살리셨다. 그러므로 자랑은 결코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행위나 믿음조차도 자랑할 수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우리로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개념이 너무나도 빈약하고 낮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기인하는 것이다.
어떠한 일을 행하신 이는 하나님이시요 행하시고 계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이다.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선한 행실과 노력과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고자 하는 소망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것은 우리의 결심이나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결정”이 아니다. 어느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이 이러했다. “나는 30년 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심을 하였고 그것을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그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으면 더 좋을 뻔했다. “30년 전에 나는 죄와 허물 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고, 나를 부서뜨리고, 나를 다시 만들고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다” 내 편에서 행한 것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한 어떤 것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이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는 선한 사람이든지 무언가 개선된 사람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 받은” 새로운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의 속에 기입되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이다. 하나님의 만드신 존재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한 것은 예배당에 참석하는 것이나 어떠한 의무를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바리새인 되게 할 수는 있다.
바울은 만일 여러분이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관심을 주시는 행위의 종류에 대해 말하겠다고 말한다. 본질상 죄의 존재로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비참한 행위이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기독교에 대한 개념이 부적합할 뿐 아니라 선행에 대한 우리의 개념도 더욱 더 잘못되어 있다.
4.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무엇인가?
산상설교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거기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대가를 계산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일이다. 이웃을 위한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들이 하나님의 선한 일이다. 바로 그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되는 선한 일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본을 따라서 새롭게 지으신 사람이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 그저 몇 조각의 선함이 아니라 참된 거룩, 전적이고 절대적인 의! 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려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어떻게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사람이 스스로 그런 일에 대해서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자랑할 수 없느니라” 그것은 하나님만의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지으신 존재이다. 그는 그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기독교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너희 속에 있는 그리스도와 영광의 소망”이다. 그것이 은혜로 된 것임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이 은혜로 된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이기 때문에 내 자신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또한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해질 것을 안다. 우리는 그의 장중에 있으며 만일 그가 우리 속에 어떤 일을 시작하셨다면 그는 끝내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기꺼이 복종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여러분을 징계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그늘진 것들을 떼어내어 그것들을 멀리 집어 던질 것이다.
그는 모든 “점이나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들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흠없고 책망 것이 없이”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으로 서기까지 그의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이 내가 믿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또한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감사하라.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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