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3/6 주일설교, '질그릇에 가진 보배', 고후 4:7-11

강대식 2022. 3. 6. 17:28

2022-03-06 주일설교

본문: 고후 4:7-11

제목: 질그릇에 가진 보배

 

1.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우리는 흙으로 빚었기에 질그릇이다.

도기 또는 토기라 불리우는 질그릇은 진흙으로 빚은 용기이다.

인간이나 도기나 성분은 같다.

 

질그릇에 지나지 않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역사와 문명은 끝장과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선거 때가 되어 권력을 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지만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헛되고 헛되도다이다.

 

권력을 새로 쥐고 세상을 얻은 것 같았지만, 5년도 10년도 지나기 전에,

죽고 감옥에 가고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다.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다.

 

지금의 권력이나 부귀가 영원할 듯하지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그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통치하고 계심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교회도, 현대교회도, 하나님을 헛되이 섬겨 왔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헛되 경배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느니라

인간들은, 자기 의와, 자기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헛된 예배이다.

 

인간은 보배를 가지지 못하면 질그릇의 운명으로 끝이 나고 멸망으로 끝이 난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구원이 없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는 것과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똑같다.

빛이 있으라하여 창조를 시작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에도 빛이 있어야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셔야 구원을 받는다.

 

그 빛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영원한 빛이라고 이름하였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빛이다.

이 빛이 비침으로, 인간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된다.

 

인간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서는, 교회와 사회와 국가는 변화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을 받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전 것은 지나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구약 교회도 신약 교회도, 이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만든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오랜 교회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나라와 함께 멸망을 받았고, 또 멸망을 받을 것이다.

초대교회가 유대교회를 개혁하고, 새포도주로 새부대를 만들었지만,

로마정부가 공인한 로마교회는, 유대교회와 같이, 암흑을 낳는 외식종교일 뿐이었다.

 

거짓 선지자와 신부와 목사가 이끄는 교회는,

항상 많은 사람들을 큰 문 넓은 길로 인도하여 멸망에 이르게 한다.

오직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들이 적다고 하셨다.

 

오직 참 교회와 참 성도만이, 로마 교회와 정부들에 의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갔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다른 길, 다른 복음은 없다.

 

말씀학교에서 먼저 변화를 받은 자만이, 사회학교에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

올바른 소프트 파워가 올바른 하드 파워를 만들 수 있다.

속이 먼저 변화돼야 겉도 변화될 수 있다. 상부구조도 하부구조도 변화될 수 있다.

 

천년에 이르는 참 교회의 역사가, 유럽의 종교개혁을 낳았고, 문예부흥도 낳은 것이다.

자본주의도 청교도적 신앙이 없다면 천민 자본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한 것은 청교도의 신앙이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세계를 제패하는 미국을 세우고 그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청교도 신앙이었다.

미국을 이끄는 두 정신은 청교도 신앙과 개척 정신이라고 한다.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변화시키고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정신은 청교도 신앙 밖에 없다.

 

왜냐하면 청교도 신앙은 초대교회와 발도인들, 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도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청교도의 경건서적들을 가방에 넣고 왔고, 그 청교도 신앙으로 교회를 세웠다.

 

교회와 사회의 개혁과 부흥은, 항상 초대교회, 발도인들 개혁자들 청교도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들만이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속에 가진 참된 질그릇들이었다.

 

능력이 심히 큰 것이 그 질그릇에 있지 않고 모신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핍박을 받는 질그릇이었지만, 교회와 사회는 주님의 능력의 역사로

참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게 하셨다.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5)

 

2.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속에 가진 보배에게 있었기에,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였다.”

 

유대교회와 로마교회는 이들이 당하는 고난의 가해자였을 뿐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고난을 가한 자들이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9:22)

 

초대 교인들, 발도인들, 개혁자들, 청교도들은 힘의 논리에 의하면 벌써 역사에서 사라졌어야 했다.

그런데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그 가해자들이었지,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가르침과 헌신의 전통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것 같았지만, 결코 이 참 교회를 이기지 못하였다.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질그릇인 그들의 안에 계시면서

심히 큰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셨다.

 

오늘날도 기독교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도권의 어르신들, 신학교들은,

로마교회가 추구하던 것들을 추구할 뿐

이 가르침의 전통은 그들의 교회와 학교의 커리큘럼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이다.

 

군소 신학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와 목사가 먼저 변화될려면, 신학교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가르침이 변화되어야 한다.

발도인들은 그 핍박 속에서도 신학교와 학교를 제일 먼저 세웠다.

 

개혁자들도 그랬고, 청교도들도 그러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16세기에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

18세기에 테넌트 목사가 세운 통나무 신학교와 같은, 말씀학교부터 교회가 세워가야 한다.

그 변화 위에 사회학교도 세워가야 한다.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들이 세웠던 최초의 신학교가 지금의 하버드 대학교였다.

한국에 건너온 청교도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연세대학교였다.

지금 그 학교들에서 설립자들의 정신과 추구를 찾아볼 수 있는가?

미국의 보수신학교의 대표였던 프린스턴 신학교는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교회와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은,

그 자체의 하드 파워를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인간의 부패한 심령과 죄성으로 새로워질 수 없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비치신 빛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고 성숙한, 가르침의 전통만이,

사람을 옛 것에서 새 것으로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사람이 가정과 교회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가정과 교회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8-20)

 

우리 주님이 가지신 권세는 하늘과 땅의 권세이다.

교회만의 권세가 아니다. 땅과 관계가 없는 하늘만의 권세가 아니다.

대상은 모든 민족이요, 기한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제자의 신앙과 삶이 없는 세례는 형식적인 할례일 뿐이다.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될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고,

부모 형제 처자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

 

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은 무엇인가? 성경과 경건서적이다. 경건서적 없는 성경은 위험하다.

가르칠려면 스승이 있어야 하고, 교회와 학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승이 다 스승이 아니고, 선지자 목사가, 다 선지자 목사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15,19-20)

 

그리고 그 가르침은 신앙과 삶에서 지켜 행해져야 한다.

성품과 삶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성숙해져야 한다.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이었고, 발도인들, 개혁자들, 청교도들의 신앙과 삶이었다.

 

그 가르침을 지켜 행하는 가운데,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면서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하는 과정을 경험하고 신앙과 삶이 성숙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능력이 심히 큰 것이 질그릇인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우리 중심에 모신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훈련과 연단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모든 것이 더해지는 경험을 쌓아야 하고,

땅의 계산법이 아닌 하늘의 계산법으로 사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3.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11)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길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거나,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길 밖에 없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것,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

박해를 받는 것,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

그것이 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훈련이요,

우리 자신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훈련이다.

 

참 교회 참 성도의 길에 왜 고난이 많은지 우리로 알게 해주는 오늘의 본문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긴 기다림. 요셉과 다윗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바울이 경험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이 모든 고난들이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연단이었고,

예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지고, 자신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연단이었다.

그 결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영으론 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