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02 주일예배
본문: 고후 3: 3-6
제목: 사도로 말미암은 편지
1.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여야 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고후3:3)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편지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편지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사도, 그리고 그 사도의 제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의 제자들은 사도의 가르친 전통을 이어받아 그 전통을 지키는 제자들이다.
2-3세기에 활동하였던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종(種)은 그 기원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원래의 사도적 교회와 하나이며, 이 사도적 교회로부터 유래하였다.”
‘원래의 사도적 교회와 일치해야 한다. 아니면, 뿌리가 다르다.’
‘그 끈을 잇는 것은 똑같이 전하는 동일한 전통이다.’
교회라는 종의 기원은 바로 사도가 세운 교회, 사도적 교회이다.
사도적 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교회는 그 뿌리가 다르고 줄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3-15)
‘너희’는 우리의 복음 곧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으로 부르신 형제들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한 형제들이다.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을 지키는 새 언약의 일꾼들이 복음으로 부르신 사람들이어야 한다.
전도 전도 노래하며 강요하며, 전도대폭발로 끌어모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아니다.
유아세례로 시민권과 교회회원권을 얻게 하며 이교들과 혼합한 로마교회 교인들도 아니다.
영접기도 따라하고 교리와 신조 믿는다고 고백하면 교인이 되는 개혁교회 교인들도 아니다.
심리학으로 철학으로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믿으면 쉽게 교인되는 현대교회 교인들도 아니다.
주님은 유대교회를 향해 말씀하셨다.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11)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8-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다.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 했고,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라 했다.
이들은 성경에서 율법 조문들을 뽑아내어 사람들을 옭아매고 자기들은 특권을 누리며 지배했다.
이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아닌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혁교회 5백년도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을 찾지도 않았다.
로마교회를 개혁한다고 하며, 성경에서 먹으로 돌판에 교리들만 뽑아내는 먹물 개혁이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의 개정판이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교인들도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편지가 아니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모습과 열매는 찾을 길이 없었다.
현대교회는 크게 자유주의파와 신정통주의파로 대별된다.
그 원조는 주님이 가장 싫어하신 사두개인의 누룩이다.
자유주의는 개혁교회의 교리를 싫어하면서,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대형교회를 이룬다.
신정통주의는 궁극적 관심, 존재의 기반으로, 깊이로 하나님을 정의하는 폴 틸리히,
실존주의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칼 바르트,
히틀러 암살단 조직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본 훼퍼가 대표하며
자기들이야 말로 새로운 정통, 신정통이라 한다.
이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편지가 아닌 것이다.
누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냐가 매우 중요하다.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은, 콘스탄틴이 공인한 기독교 로마교회가 아니라,
발도인교회 공동체들을 통해서 천년 동안 별도로 이어져 왔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십자군을 동원해서까지 말살시키려 했던 참교회였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킨 신앙과 삶의 열매들을 보면,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이 그대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 줄기가 같은 것이다.
그들의 변화된 성품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진실한 사랑에, 화형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능력에, 그 매력에, 사람들은 끌렸고,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서기 240년에 키프리안이 북아프리카 교회에 남긴 120개의 행동수칙에는
전도를 권면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일해야 한다’,
‘성령이 자주 불로 나타났다’ ‘고아와 과부가 보호 받아야 한다’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발도인교회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가르친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았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발도인교회의 신앙과 삶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 길만이 같은 영 줄기를 이어 받는 것이고, 사도들의 전통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
2. 영으로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여야 한다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3)
먹으로 쓴 것은 머리의 돌판에만 쓰는 것이다. 교육이 그것이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영으로 쓴 것은 육체 안의 마음판에 쓰는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인 것을 모르고, 너무 무관심했고, 흘려보냈다.
예수님은 영으로 마음과 생각에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것이 새 언약이고 시내산 언약과 다른 것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
이렇게 주님의 피로 세우는 것이 새 언약이고, 주의 말씀을 영으로 마음판에 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리와 신조만 믿으면 구원 받는 것으로 우리는 긴 세월 속아 왔다.
율법 조문, 교리 조문, 철학 조문들은 다 먹으로 머리 돌판에 쓸 뿐이다.
그러니 말만 근사하고 요란하고 복잡하고 성품이나 삶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머리 돌판에 쓴 것들은 절대 행하지 않는다.
마음 속에 있는 탐욕과 방탕과 악독과 위선과 외식만을 행할 뿐이다.
예수님의 피로, 영으로, 마음판에 쓰지 않으면,
‘나라의 본 자손’인 줄 착각하다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뿐이다.
예수님의 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지 못하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7:21)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어도, 주님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한다고 하셨다.
교회도 성경도 진리도 경건도 다 그 성취를 위한 방편이고 이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는 자기 인생의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이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셨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착한 행실이 사람 앞에 비치는 빛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 빛을 보면, 그 착한 행실로 인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 빛의 공동체로, 착한 행실의 공동체로 그 매력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 보좌에 상달되었다.
흉악의 결박,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 공의의 빛이다.
여기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행한 것이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것, 그것이 빛이고 착한 행실이다.
3.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주님이 세우신 ‘새 언약의 일꾼’만이 오직 영으로 하고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한다.
먹으로 머리 돌판에 쓰는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오직 마음판에 쓰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일꾼은 사람의 지혜와 학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한다.
그래서 그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한다.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아야 한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해야 한다.
그러할 때만이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될 수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한다.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것들을 알 수도 없다.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도 오래 다니는 데, 직분도 높은데, 왜, 사람 앞에 비치는 빛, 착한 행실이 없을까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는 구제와 돌봄이 없을까요?
왜, 교회가,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까요?
영으로 마음판에 쓴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먹으로 머리 돌판에 쓴 교리 조문들 철학 조문들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친 교훈만 따르며 헛된 예배만 드린 때문이다.
사도적 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영 줄기를 따라 가는 것이다.
율법 조문 지식 조문들은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다 자기 신학이요 자기 철학일 뿐이다.
먹으로 쓰는 먹물 개혁을 참 개혁으로 알고 속는 것이다. 헛된 예배만 드릴 뿐이다.
살아 있는 초대교회, 그 사도적 교회와 하나된 발도인교회를 찾아 나서야 한다.
초대교회의 가르친 전통을 그들을 통해 이어받아야 한다. 같은 영 줄기를 이어가야 한다.
발도인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도의 사명이고, 새 언약의 길이고,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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