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6 주일설교
본문: 행 20:24
제목: 사명, 나의 생명
1. 믿음은 경주요, 달려갈 길이다
믿음은 우리 앞에 주신 경주이고 인내로써 감당해야 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
주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너희도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해,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그분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경주하는 선수들은 옷 차림과 마음가짐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달리는 것을 본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온갖 세상 염려와 걱정은 무거운 것이다. 죄는 우리를 얽어매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
믿음은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는 것이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할 것 다하면서 이길 수 없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달음질하되,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
믿음의 경주를 잘할려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해야 한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달려갈려면 푯대가 분명해야 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셔야 한다. 사람이 옆에서 아무리 불러도 소용 없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셨으면 그 부르심에는 상이 있다.
그 상을 푯대로 하여 달려가는 것이 믿음의 경주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분이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아브라함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기에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
2.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어야 한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은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에 그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고 그 이루신 구원을 은혜로 주셔서 믿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 믿음은 행함의 열매로 증거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세 전에 구원 계획을 세우셨고,
아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대속제물로 화목제물로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구원을 성령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적용하여 믿게 하신다.
참된 그리스도인과 그 공동체인 교회는 이 은혜의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무엇으로? 입술로 이론으로 교리로가 아니다. 성품과 삶의 열매로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복음의 증언은 주께 받은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만이 아니라, 사도들만이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사명을 주께 받았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9)
오늘날 교회는 과연 사도들이 전한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많은 무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가나안 땅이 흑암의 땅, 사사시대가 된 것은 다른 복음이 이스라엘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왕정시대 끝에 멸망한 것도 다른 복음으로 그들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쉽게 땅의 축복과 쾌락을 얻기 위해 제사는 형식적으로 드렸고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오직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때가 차매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은혜의 복음으로 3백년의 핍박 속에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지만,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로마 교회는 천년 동안 그대로 유대 교회를 재현하였다.
개혁교회 현대교회도 5백년 동안 개혁한다고 해놓고 실상은 유대교회 로마교회의 재현이었다.
교회는 다시 제도권에 정착하고 장악하면서 같은 현상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주 받을 다른 복음이 교회에 만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요근래 금세기 최고의 신약성경학자인 제임스 던을 만나게 하셨다.
그가 쓴 책 제목을 보면 그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상하권1180p), ‘초기교회의 기원’(상하1600p),‘예수, 바울, 복음’(340p).
극히 방대한 책들이지만, 초기 교회의 실상을 더욱더 확실히 하기 위한 작업으로 믿는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사람들 중, 르낭과 하르낙을
복음으로 생명을 낳는 아버지 스승으로 만나게 해주었다.
르낭은 ‘예수의 생애’ 책에서,
‘가슴의 순결함과 인간의 형제애를 토대로 하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예배’를 강조하였다.
하르낙은 ‘기독교의 본질’ 책에서 그 본질을 셋으로 표현하였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됨,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사랑의 중요성’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도그마의 그리스도’에 등을 돌렸고, 예수에 대한 진정한 신앙은
‘교리적 정통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행한 대로 행하는 차원의 문제’라고 하였다.
하르낙은 복음을 교리로부터 분리하였다. 교리는 그리스 철학적 구성물이라 하였고,
그 껍질들을 벗겨내고 알맹이인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 자신이 설교한 복음의 단순성과 자유를 재발견하였다.
이 문장들을 접하면서 초기교회의 실상이 확연하게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의 신학자들 중에도 복음으로 생명을 낳는 아버지 스승들이 있었음을 새삼 발견하였다.
초기교회의 실상에 대해 더욱더 분명하게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르낭의 ‘예수의 생애’,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을 여러분도 읽고 감동에 젖기를 바란다.
3. 사명은 나의 생명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는,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열심과 헌신이 필요하다.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을 맞이해야 한다.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사도와 목사와 성도는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데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고,
성품과 삶으로 그 복음을 인내로써 사는 데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내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신 주님의 진리가 경험되어져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진리로 행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진리를 지켜 행한다.
지금 같이 부패한 교회에서 내가 진리를 살려면 내가 마음을 다해 진리를 공부해야 한다.
부모 형제 처자와 더욱이 나의 생명조차 미워하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제자가 못 되면 구원도 없다.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주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성품과 삶의 열매로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까지,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사도 뿐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각오와 자세이다.
거짓 교회들과 싸우며 생명 바쳐 참 믿음을 고수한 이들을 통해 참 교회는 이어져 왔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주님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셔서 교회를 세우셨다.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의 복음을 삶으로 증언한,
골짜기의 사람들, 곧 발도인들을 통해, 위그노들을 통해서 였다.
거대한 대세의 흐름 따라 죽은 고래처럼 함께 떠내려 가지 말고,
살아 있는 작은 물고기처럼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2:2-3)
은혜의 복음은 사도들과 초기교회처럼 발도인교회처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증언해야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여호와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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