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비판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그레샴 메이첸

강대식 2012. 1. 24. 14:16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그레샴 메이첸

 

현재 자유주의가 기독교의 전통적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는 상위한 일개 종교일 뿐만 아니라 전혀 별개 종류의 종교에 속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씩 순차로 그의 적에게 양도한 후에 남아 있는 잔여물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고 별종의 범주에 속하여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종교이다. 그 근원은 자연주의이다.

 

기독교와 현대과학을 타협시키려는 자유주의의 기도(企圖)는 실제에 있어서 기독교의 모든 특징을 포기함으로써 그 남아 있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기독교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그 막연한 종교적 갈망에 불과한 것이다. (이상 pp14-19)

 

현대는 안일과 환락의 시대가 아니고 열성과 기도로써 역사할 시대다. 무서운 위기가 확실히 교회 중에서 발생하고 있다. 복음적 교회의 교직자 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대군(大軍)이 있다. 전통적 용어의 이중적 사용에 의하여 또한 견해의 상위를 단순히 성경해석상의 상위에 불과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에 의하여 신앙의 토대 바로 그것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침입하였다.

 

교회는 성경의 속박이 거의 공공연하게 포기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가 무용한 번쇠사의 유치장으로 퇴락할 수 있는 정도의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는 절망을 용납할 여지가 없다. 다만 우리의 희망을 모래 위에 세워서는 안된다. 우리의 희망은 위기에 대한 맹목적 무지 위에 세워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고귀한 약속 위에 홀로 세워야 한다. 교직자나 성도가 다같이 이 시련의 날에 있어서는 새로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경주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사랑과 충성으로 감행될 것이며 당파적 열정이나 개인적 원한은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십자가의 복음과는 상이한 복음을 전한다면 배척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이여, 원하옵시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결정을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학대보다 더 암흑한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를 인도하였다. 우리는 이교주의가 기독교의 명칭하에 교회 중에 침입하였음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제2세기에 있어서도 동일한 싸움이 있었고 또한 그것은 승리로써 종결하였다. 다른 일면에서 현대 자유주의는 인간의 공적에 의존한 중세의 율법주의에 흡사하다. 그러나 가장 적당한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영혼은 시련을 받고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피로써 우리를 대속하신 구주를 신뢰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미래는 하나님의 수중에 들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 그의 뜻을 성취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현존의 교회가 자유주의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하여 사람들이 영혼의 근본적 요구의 만족을 현존교회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 외부에서 발견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기독교 단체가 형성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딘가에 반드시 구속함을 받은 남녀성도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겸손하게 단합하여 그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여 그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게 경배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단체만이 홀로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의 마음 속에 왕왕히 망각하고 있는 한 가지 갈망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형제들과 교제하려는 심각하고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갈망이다. 그러나 현재의 연합들은 주에게 반항하는 세상과의 연합을 의미할 때가 많다. 평화의 매는 줄로 이루어진 성령의 참된 연합과는 얼마나 상이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대한 갈망이 진실로 이루어진 때가 있다. 현재와 같은 투쟁의 시대에 있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식탁의 주위에 충심에서 집합하는 회중이 있다. 진실로 목사다운 목사가 있다. 그러나 많은 도성에 있어서 이러한 회중은 발견하기 어렵다.

 

세상의 투쟁에 피로한 나머지 사람들은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여 교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슬프다. 그들은 거기에서도 역시 너무나 빈번히 이 세상의 요소를 발견한다. 설교자는 명상과 능력의 은밀한 장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의 설교를 풍부케 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도 없이 인간의 지혜와 심대한 죄의 문제에 대한 안일한 해결책으로 그의 설교를 채운다. 세상의 싸움이 하나님의 전당에까지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평화를 구하려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비참한 것이다.

 

투쟁으로부터 피할 곳은 없는가? 사람이 영생의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휴식처는 없는가? 세상의 투쟁들을 다 망각하고, 십자가의 발 아래 차고 넘치는 감사의 희열 속에서 연합하기 위하여 2인이나 3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는 곳은 없는가? 만일 이러한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다. 그리고 그 집의 문지방 아래서는 피로한 세계를 소생시킬 강물이 흘러 나올 것이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pp 229-233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