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은 그렇게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사상이 지금 대중화되고 젊은 세대와 여론과 메스컴의 총아가 되고 있지만 그 태아와 전면적 도래와 위험성에 대해서는 19세기말부터 논의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데까르트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칸트의 이성 비판을 거치면서, 19세기말부터 본격적 비판적 대상이 되어왔다. ‘이성의 시대’의 종말은, 기독교적 신은 죽었다고 하면서 초인의 도래를 외치던 니체로부터 시작하여, 신앙의 기반을 위로부터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의존적 감정에 두었던 쉴라이엘마허에 의해서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다윈의 진화론, 또 나아가 성경에 대한 양식비판의 유행은 성경이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책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1, 2차 대전의 참상은 인간의 선과 지상천국에 대한 유토피아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인의 출발을 계시와 자연을 분리하여 지성의 자율성의 길을 열어준 토마스 아퀴나스에 두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제시하려다가 이성에게 잡혀먹은 꼴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절대성을 상대화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프로이드를 들 수 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였고 처음에는 거의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고 기독교적 지식인들을 결정적으로 오염시키고 말았다. 지금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접하고 나면 많은 기독교적 토양에서 자란 우수한 젊은이들이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을 써서 우리나라 지식인들을 기독교로부터 해방시킨 에리히프롬도 그 아류이다.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도시의 세속화를 하나님의 긍정적역사로 보았다. 리이즈만의 ‘군중속의 고독’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출현을 정확히 예측한 것이었다(안테나인간).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는 폴 틸리히, 불트만, 본 훼퍼의 신학을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차 대전 당시 본훼퍼는 감옥에서 종교이후의 세계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염려하였다. 종교가 무용지물이 되는 시기가 곧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 없이 신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 것을 주장하였다. 그 전제로 인간은 예수 이후 지식의 계몽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신과 종교를 믿을 수 없게 될 정도로 성숙하였다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에게는 구약과 신약의 1세기적인 세계관으로 쓰여진 성경을 그대로 전달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벗겨내고 오직 복음의 알맹이만을 이 시대의 언어로 선포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어록 가운데서도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 각색되었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골라내고 확실한 예수의 말씀만을 ‘로기아’로 다시 편집하고자 하였다. 요한복음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폴틸리히는 ‘신’이라는 말이 더 이상 현대인에게 신으로서의 의미전달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궁극적 관심’ 또는 ‘궁극적 기반’으로 당분간 부르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종교 다원주의적이고도 범심론적인 사상경향은 임종에 이르러 일본 신도의 사상에 기울어진 것을 그의 마지막 작품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엿볼 수 있다.
임종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성경을 그대로 믿으며 실존주의적인 사상 경향에로 빠져 들어가는 현대자유주의 신학과 끝까지 투쟁한 쉐퍼는 그의 마지막 작품,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에서 한 예화로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알프스산 정상에 눈이 쌓여 있는데 멀리서 보면 그것은 한 덩어리이다. 그러나 녹기 시작하여 한 흐름은 흘러흘러 차거운 흑해에 이르고 한 흐름은 흘러흘러 따뜻한 지중해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거리는 1000마일이 된다고 한다.
그 흐름은 한 번 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게 돼 있다. 순수한 복음주의 신학과 혼합된 자유주의 신학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미국이나 유럽에 성경을 그대로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의 순수성을 부인한 만큼 구미사회는 성적타락과 도덕적 오염을 사회와 국가에 가져왔음을 증거하고 있다.
특히 전후 유행병처럼 지식인사회와 기독교계에 몰아닥친 실존주의철학은 진리의 절대성과 객관성을 거절하고 오직 진리는 주체성임을 강조하였다. 내게 경험된 진리만이 의미있는 진리가 된다. 그리스도도 부활도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가 중요하고 그 역사성이나 객관성은 신화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은 이 실존주의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의존하고 있다.
주체성이 진리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객관적인 진리나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아니다. 인간에 고유한 본질도 없다. 무로 태어나서 그 본질을 실존이 만들어갈 뿐이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영향을 받은 신학은 인간의 정황으로부터 신학을 시작하기 때문에 신학은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놀라울 것도 못된다.
철학이 포기한 인간에 관한 종합학문으로서의 기능을 현대신학은 떠맡아 안을려고 한다. 그래서 신학은 인간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폴틸리히는 기독교 정통신학과 휴메니즘을 통일하는 것을 그의 학문의 과제로 삼았다.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이고 인간에 관한 종합학문을 꿈꾼 것이다.
주체성의 진리관은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등을 낳은 토양이 되었다.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공동체에 의미있는 진리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가 된 것이다. (예: 흑인신학의 구호, “Black is beauty!”) 앙드레 지드는 내 몸으로 거친 진리만을 진리로 믿겠노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실존주의 철학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으로부터 계시로부터 자유하고 독립하고 성숙하였다. 그러나 그 자유와 독립과 성숙을 가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처음 목표대로 하나님 없이 인간을 구원하고 완성하고 실현하고 있는가? 우리 복음주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죄와 타락에로의 자유와 독립과 성숙에 불과하였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흑암과 혼돈과 공허에 늪에 빠져들 수 밖에 없음을 현실 세계는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씀을 혼잡하지 아니하고, 오직 순전한 말씀과 성령으로 성결한 삶으로 기독교의 살아있는 생명을 보여주고 사는 것만이 어느 시대에나 구원의 길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성숙하고 성결한 인간의 모습을 교회와 성도들이 보여줄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메시야적 환상에서 저들을 깨우고, 우리는 많은 생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며 참 인간구원의 길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만 스승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를 극복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복음으로써 생명을 낳는 아비들만이, 상대화되고 다원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관으로부터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신학비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총을 침해하는 자연 / 프란시스 쉐퍼 (0) | 2012.03.12 |
---|---|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김의환 (0) | 2012.03.12 |
[스크랩]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 복음 없는 현대 교회의 충격적 실상! (0) | 2012.03.09 |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그레샴 메이첸 (0) | 2012.01.24 |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간음이다 성적 난잡을 불러온다/ 프란시스 쉐퍼 (0) | 2012.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