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늘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야 하는데, 특히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때 더욱 그래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자비이든 심판이든 간에 상관없이 섭리의 사역은 무엇이나 깊이 묵상하라고 요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신한 대가로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은 모두 제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실로에 가서 그분이 행하신 심판을 깊이 묵상하라고 명령하셨다(렘7:12). 또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미6:5)라는 말씀처럼 자비를 베푸신 섭리에 대해서도 깊은 묵상을 요구하셨다.
이 말씀은 “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으면 나의 의로움은 가려지고 너의 불의는 들어나리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섭리의 묵상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주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이다(마6:28).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경솔하고 부주의한 태도를 싫어하신다.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시66:5). 섭리의 사역에 온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찬양을 올려드릴 수 없다. 찬양과 감사는 섭리의 사역을 깊이 묵상하는 데서 비롯된다. 묵상이 없으면 찬양과 감사도 있을 수 없다.
시편 107편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하나님의 섭리를 길게 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4-6절), 감옥에 갇힌 죄수들(10-12절), 질병으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17-19절),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23), 기근을 당하는 사람들(33-40)에게 섭리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큰 변동이 일어날 때마다 일일이 개입하시어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신다(40,41). 이 시의 매 단락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하고 찬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라는 마지막 섭리에 대한 묵상이 의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섭리에 대한 묵상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지탱해주는 믿음의 양식이다. 예를 들어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시74:14)라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용기를 격려한다. 성도는 과거의 섭리를 기억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섭리를 의지할 수 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17:37)라고 말했고, 바울도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1:10)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경우에는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16:9)라는 말씀대로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죄의 용서를 빌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섭리에 의지해 “구하옵나니--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민14:19)라고 기도했다. 교회도 모세가 새로운 은혜를 구했던 것처럼, 과거의 섭리에 근거해 새로운 섭리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사51:9,10).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시하는 죄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하나님은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말3:5)라는 말씀과 같이 심판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시는도다”(시145:18)라는 말씀처럼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징계하실 때도 우리에게 다가오시고(호9:7), 구원을 베푸실 때도 우리에게 다가오신다(시106:4).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한다(욥10:12).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시고 “아침마다 -- 분초마다”(욥7:18)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등한시하는 것은 그분을 멸시하는 가증스런 죄에 해당한다(사1:3,습3:2). 사람도 자신의 존경하는 사람은 등한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나 심판에 무관심한 것은 악인의 특징이다(렘5:3).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상황을 올바로 하나님께 아뢸 수 없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때로는 감사를 드리는 기도가, 때로는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사26:8)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고(습2:1,2,암4:12), 때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때로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사12:1,2). 다윗의 시들이 각각 주제가 다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때마다 깊이 묵상했기 때문이다. 경솔하고 부주의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 곧 성도의 의무이다.
-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 pp 16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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